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01화 (401/471)

0401 / 0471 ----------------------------------------------

연구소에서 일하는 남자는 후배가 시킨 심부름을 했다

──────────────────────────

연구소에서 일하는 남자는 후배가 시킨 심부름을 했다

──────────────────────────

최한석이 휴먼오토엔지니어링 연구소에 들어온 지 6개월이 지났다.

영제는 김해 공항 승객 출구 앞에서 초조해하고 있었다. 분명 알림판에 그가 기다리는 비행기의 도착 시그널은 들어와있는데 정작 기다리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역시 판때기를 하나 만들었어야 하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출구에서 "어디어디서 오신 누구씨"라는 식으로 대문짝만하게 써서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 주변에서는 그러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괜히 자기 혼자 그런 거 들고 있으면 쪽 팔릴 것 같아서 주저하고 있었다.

'한석이 형은 설명 좀 더 해주지.'

비록 후임이긴 하지만 나이도 있고 배경도 있고 해서 영제는 한석에게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처음에 호칭을 어떻게 할까 주저했더니 한석은 웃으면서 "형님이라고만 부르지 말아줘.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너무 많아서 골치야."라고 답했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 형이 오늘 아침에 영제에게 부탁한 게 있었다.

"영제야. 내 차 내줄 테니까 그거 가지고 김해 좀 다녀올래?"

"김해요? 거긴 왜요?"

"오늘 마지막 강연하시는 박사님이 너무 시간 딱 맞게 도착하거든. 내가 모시러 갔으면 하는데 지금 여기서 내가 몸을 빼기가 곤란해. 니가 공항에 좀 나가라."

연구소가 주최한 포럼이 한창 진행되고 있느라 전원 눈코 뜰새 없이 바쁠 때였다. 특히 한석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느라 그가 제대로 쉴 틈도 없었다.

영제가 보기에 겨우 석사과정 하나 마쳤을 뿐이고 연구 과제가 그리 특출난 것도 아닌 한석에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아닌가 싶어 의아했다. 그런데 영제는 어느 연구원이 살짝 귀띔한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알고 보니 한석이 운영하는 어떤 기금에서 나오는 이공계 후원금이 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전기전자, 제어공학 쪽에서 어지간한 연구소는 죄다 선이 닿아있다고 할 정도였다.

영제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이 연구소를 세운 사람이 한석이었다는 알게 된 이후부터는 소장이 한석에게 쩔쩔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연구소 말단 시다에 불과한 영제는 심부름이라면 도가 튼 청년이었다. 그는 한석에게 차 키를 받아가지고 김해로 갔다. 평소라면 손도 못 대볼 대형 세단을 몰고 붐비는 시내를 벗어났다. 낙동강을 건너 김해공항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출국장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마중해야 되는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러니까 맨날 욕을 먹지....'

분명 소장이 시킨 심부름이었으면 그저 좌절하고 절규하고 있었을 테지만 시킨 사람이 한석인지라 부담 없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뭔가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졌으면서도 지인들에게 친절하고 소탈한 대응을 하는 한석이었기 때문이다. 영제는 한석이 친근했다.

"어, 여보세요. 형, 저 영제에요."

그런데 수화기 너머 한석 대신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영제 씨. 무슨 일이죠?"

영제가 아는 목소리였다. 지난번에 식사초대를 받아 한석의 집에 방문했을 때 본 적이 있었다. 전화기 너머 상대가 보지 못하는데도 영제는 자기도 모르게 꾸벅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했다.

"아, 형수님. 안녕하세요. 회장에 나오신 거예요?"

"얘. 그 이가 많이 바쁘다고 해서 도와주러 나왔어요. 근데 무슨 일이죠?"

리사...라고 했던가? 로사라고 했던가. 무슨 가톨릭계의 이름이었는데 딱 한번 들었던지라 영제는 벌써 까먹었다. 암튼 그 형수님이 한석의 전화를 대신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게 아니구요. 형이 어떤 박사님 마중하라고 보냈는데 제가 이름도 안 듣고 어떻게 생겼는지를 몰라서요. 그것 좀 물어보려구... 아님, 혹시 연락처 같은 건 없나요?"

"어떤 분이죠?"

"오늘 마지막 발표자라던데요."

"그래요? 잠깐만요. 제가 행사 프로그램 좀 확인해볼게요."

"예."

잠깐의 침묵 후, 형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네요. 이름이..... 흐음...... 그러니까 저희 애들 아빠가 영제 씨 보내서 이분 마중까지 하러 가라고 했다 이거죠?"

영제는 깜짝 놀랐다. 상대 목소리가 단숨에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아뇨. 아, 무, 문, 제 없어요."

영제는 자기도 모르게 쫄았다. 분명 상냥한 말투인데도 묘하게 무서운 박력이 깃들어 있었다. 눈빛만으로 연구소 사람들의 야코를 죽이던, 그 검은 옷 입은 푸른 눈의 여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푸른 눈을 가진 경호원은 그래도 실물이라도 봐야 무서운 건데, 지금은 목소리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어째 한석이 형 주변의 여자들은 다들 왜 이렇게 기가 쎈 걸까.'

영제의 궁금증이 더 커지기 전에 형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교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이름은 진유진이구요. 으음... 얼굴은, 아마 한번 보면 바로 눈에 띌 거예요."

"눈에 띄다뇨?"

"전 한석 씨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만."

상냥한 목소리와는 달리 굉장히 불친절한 설명. 전화는 그대로 뚝 끊겼다. 다시 걸기도 뭐하고 해서 영제는 그냥 폴더를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시 출국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띄는 사람이라니. 어디 몸이 특이하게 생겼거나 얼굴이 곰보나 그런 건가. 그러다가 영제의 생각은 이 사람이 외국대학에서 오는 사람이라는 것에 미쳤다.

'으아... 외국놈이면 우짜지...'

영제는 웰컴이라고 해야 하나 하우아유로 시작해야 되나 엄청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출국장에서는 이미 나올 사람은 거의 다 나왔는지 더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눈에 띄는 사람이라니. 아무리 둘러보아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왔다는 박사 같은 사람은 없어!'

영제는 투덜거렸다. 그의 눈에 어떤 귀엽게 생긴 아가씨 한 명이 커다란 트렁크를 옆에 세워두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오오... 죽이네....'

영제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그 아가씨에게 집중했다. 박사는 나중에 찾아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영제가 위아래로 주욱 훑어본 결과, 나이는 이제 스무 살 초중반쯤 되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릴지도 몰랐다. 블라우스 아래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차림새가 무척 단정하여 야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옅은 물빛의 블라우스나 화장기 없는 얼굴도 수수하다기보단 자연스럽고 환한 느낌이었다.

'은테 안경만 없다면 저 미모가 더 빛날텐데.'

영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안경 쓴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몰래 훔쳐보고 있는 걸 들킨 걸까. 여자는 영제를 보더니 뚜벅뚜벅 걸어와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이봐요."

".........네?"

영제는 그 아가씨가 자신을 바라보며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사람은 없었기에 그에게 말을 건 게 맞았다.

"무슨... 일이라도?"

"혹시 셀폰... 그러니까 휴대폰 있어요?"

"있는데요."

"내놔봐요."

손을 척 내미는 그녀. 키는 작으면서도 어째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문맥상 빌려 달라는 게 분명한데도 여자의 태도는 자신이 맡겨두었던 물건을 찾는 사람처럼 당당했다. 영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어쩐지 거절을 할 수 없어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여자는 폴더를 열고 번호를 입력했다. 휴대폰 액정 화면을 보고 있던 영제는 그 여자가 누르는 번호가 무척이나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번호를 다 넣고 통화버튼을 누르기 직전 영제의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의 이름이 떴다. 영제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그녀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 여자가 왜 한석이 형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지?'

여자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고 - 여자의 키가 좀 작아서 영제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 영제를 쳐다봤다.

"이봐요. 당신. 아저씨... 아니, 최한석이랑 무슨 사이죠?"

"에? 에..... 한석이 형이랑 같은 데서 일하는 데요?"

그러자 여자의 눈이 아주 가늘게 변하며 영제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뭐야. 당신도 깡패야?"

"네? 에엑?"

난데없는 오해에 영제는 뒤로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립니까? 전 그냥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연구소....?"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자는 지금 영제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 이름을 댔다. 영제는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가 팔짱을 턱 끼더니,

"뭐야. 간신히 여기까지 왔더니 직접 나오지도 않고 딴 사람을 보내? 이 인간이 진짜... 오랜만에 본다고 봐줄라고 했는데 안 되겠네."

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영문을 몰라 멍 때리고 있던 영제를 보더니 말했다.

"차 가져왔죠?"

"아, 예."

"가요."

여자가 자신에게 트렁크를 턱 맡기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키는 쪼끄만한 주제에 발걸음은 무척 빨랐다. 영제는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끌고 황급히 그 뒤를 따라붙으며 물었다.

"저기, 근데... 누구세요?"

그러자 여자의 걸음이 딱 멈췄다. 뒤를 돌아본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 마중 온 사람 아니었어요? 아저씨가 보낸?"

"에? 전 오늘 발표하실 박사님 모시러....."

그러자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키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리 큰 가슴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굴곡은 있었다. 고 짧은 시간, 영제는 그걸 파악해내고 있었다. 거기에 시선이 뺏긴 그의 귀에 엄청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게 나라구요. 칼텍에서 온 닥터 진. 바로 저 진유진이라구요. 아저씨 이 인간은 설명도 안 해주고 이런 녀석을 보낸 거야? 대체. 정말 어이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휴."

영제가 뜨악해있는 동안 유진은 다시 몸을 홱 돌려 주차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제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라붙었다.

"기다리세요. 박사님! 같이 가요!"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