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02화 (40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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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한석의 자취방에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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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한석의 자취방에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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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7화와 368화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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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은 오전 수업 뿐이었다. K대 부속고등학교 1학년 3반, 출석번호 3번인 양소란은 가방을 챙기면서 토요일은 도시락을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되어 참 편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반 친구인 세은이가 오더니 소란에게 물었다.

"영서랑 지수가 노래방 가자는데, 같이 갈래?"

소란은 잠시 고민했다. 주말에는 집안 일을 돕는 게 소란의 주된 일이었다. 동생은 많고, 엄마는 집에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세탁소 일에 바빠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소란은 집에 조금 늦게 가고 싶었다. 한 시간 정도 놀고 가는 건 괜찮겠지 싶었다. 소란은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고는 옆자리에서 가방을 싸고 있는 유진에게도 권했다.

소란의 짝인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난 가봐야 할 데가 있어."

"어디?"

"있어. 그런 데가."

소란은 약간 아쉬웠다. 오늘 아침부터 유진의 표정이 안 좋았기에 기분을 좀 풀어주려고 했건만 타이밍이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란은 유진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른 친구들과 먼저 교실을 나섰다. 유진은 소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자기도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시내의 한 대형 서점이었다. 유진은 생각했다.

'오늘이 생일인데... 그냥 빈 손으로 가긴 좀 그렇겠지?'

처음에는 책을 선물하려고 했다. 유진은 한석이 카페에서 보고 있던 책을 떠올렸다. 그러나 한석이 항상 읽고 있던 건 대학 교재였던 탓에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난하게 베스트 셀러 코너에서 한 권 고를 수도 있지만, 왠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진은 망설이며 서점 안을 둘러보았다. 참고서, 문제집이 쌓여 있는 곳을 지나면서, 지난번 여기에 같이 왔던 한석을 떠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적 코너를 지나치고 나니 각종 학용품 및 팬시 상품을 파는 곳이 나왔다. 한쪽에 내놓은 좌판에서 익숙한 녀석을 발견했다. 예전에 한석이 자기에게 사주었던 펀치 브라이스 인형이었다. 유진은 걸음을 멈췄다.

'남자한테 인형이라....'

조금 주저하며 보고 있는데 앞치마를 두른 점원이 다가와 선물로 할 거냐고 물어보았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예전에 한석에게 받은 것과 같은 녀석을 집어 들었다. 그걸 본 점원이 옆에 있는 다른 인형을 들어서 보여주었다.

"지금 들고 계신 애랑 이 아이랑 서로 커플이에요. 공식 설정북에 보면 얘네들이 사귀는 만화가 나오죠."

"그래요?"

"입고 있는 셔츠를 보시면 서로 상대방의 이름이 씌여있죠."

유진은 그 인형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지 공식 설정북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은 점원이 권한 녀석을 달라고 했다.

'커플이라니, 뭐야. 미쳤나 봐.'

유진은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로 한다는 말을 들은 점원은 인형을 포장하고 예쁜 종이가방에 넣어서 건네주었다. 서점을 나온 유진은 택시를 잡아타고 한석이 지내는 자취방으로 갔다.

"아저씨! 아저씨!"

유진이 꽤 큰 마음 먹고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석은 집에 없었다. 유진은 아침에 전화를 했는데 그가 받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그때부터 외출해서 지금까지 안 들어온 건가 싶었다.

혹시나 싶어 앞집의 벨도 눌러보았는데 반응이 없었다. 조금 속상했다. 한석의 삐삐 번호를 알고 있기에 한 번 쳐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자기 입으로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던 터라 호출을 하긴 싫었다.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진은 조금 짜증이 났다. 자기랑 별 상의도 없이 덜컥 과외를 그만둔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다니! 그것도 직접 말하는 것도 아니고 언니를 통해서!

유진은 한석을 보게 되면 정강이를 냅다 한 대 차주리라 생각했다.

'진짜 아프게 뻥 찰거야. 절대 안 봐주고. 생일빵이라고 둘러대지 뭐.'

그런데 막상 저녁 시간이 다되도록 한석이 오지 않자 생각이 달라졌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안 오나 지루하기도 하고 짜증도 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이사를 간 건가? 그새?'

빌라 밖으로 나가 창문 쪽을 올려다본다. 밖에서 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때 검은색 차 한 대가 빌라 앞에 도착했다. 무심코 본 유진은 조수석에서 내리는 마리를 알아보고 자기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평소라면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이지만 늘 한석 옆에 붙어 다니는 저 사투리 쓰는 아줌마라면 알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저기요."

이름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왠지 이름을 부르면 친한 척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유진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리사와 마리는 빌라 입구에 서 있는 유진을 알아보았다.

"얼레? 니 오늘도 놀러왔네? 웬일이고?"

"아저씨... 어디 갔어요?"

"아, 선배님은 긍까...."

다쳤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다소 난감한 마리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정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리사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리사는 유진을 보며 물었다.

"학생, 유진이라고 했지?"

유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만만했지만, 어쩐지 이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똑같이 생긴 얼굴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리사는 타이르듯이 조용히 말했다.

"전에 어머님도 말씀하셨지만 이렇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찾아오고 그러면 안 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전 그저 이걸....."

유진이 종이가방을 들어 올리자 마리가 그걸 받아들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해 낸 마리가 물어보았다.

"생일 선물?"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있던 리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선물은 전해줄게. 하지만 앞으론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거나 하지 말아줘. 학생이니까 해야 할 일도 많을 거 아니니?"

"전해주다뇨? 아저씨가 어디 갔어요?"

"당분간은 집에 못 올 거야. 우리랑 지내야 하니까."

원인이나 이유를 딱 잘라 말해주지 않는 리사의 말투에 유진은 다소 울컥했다. 그녀의 말투 어딘가에서 미묘한 무언가를 캐치해낸 것이다. 무어라 말로 딱히 설명은 안 되지만 유진은 본능적으로 그걸 알아차렸다. 유진은 고개를 치켜들고 리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줌마는 대체 뭔데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죠?"

"뭐?"

"그때도 아저씨 집에서 청소하고 그러고 있었죠? 나한테는 오지 말라 그러면서 아줌마는 왜 그러고 있는 건데요? 아줌마가 아저씨 부인이라도 되요?"

조금 발끈하여 센 기세로 말했지만, 리사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미소마저 띄운다.

"그렇게 되길 희망하고, 또 노력하고 있지. 온몸을 다 바쳐서."

오히려 당당하게 인정하고 나와버리니 따지고 들던 유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여자를 왜 꺼려 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지금 그녀가 내뿜는 아우라는 유진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것과 굉장히 닮아있었다. 유진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리사는 마리에게서 봉투를 건네받으며 유진을 지나쳐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대로 선물은 건네줄게. 하지만 네가 주는 거라고 말하진 않겠어."

"뭐라구요?"

"일단 넌 내 연적인데 마냥 도와줄 수는 없잖아?"

상큼하기까지 한 미소를 보며 유진은 기가 막혔다. 리사가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유진은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난 또 올 거예요. 아줌마가 뭐라 하든 말든! 내 발로 올 거라구요!"

그러자 리사가 다시 웃었다. 그녀는 몹시 친절한 얼굴로 유진에게 답해주었다.

"화이팅."

"이익!!!"

문이 닫히고 더 이상 리사와 마리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유진은 우뚝 선 채로 주먹을 불끈 쥐고 바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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