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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한석이 건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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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한석이 건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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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2화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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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밤에 일하는 사람이다. 새벽까지 일하다 들어오면 아침에 잠 들고, 대개는 점심을 지나 오후 정도에 일어나는 게 보통 일과였다.
그러나 요 몇 주 전부터, 그녀는 오전 중에 일어났다. 어떤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 검정고사를 대비하는 과외 수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 대신 사용하는 부엌 테이블에는 풀다 만 4절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치워야 하는데.'
선영은 생각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피로가 너무 쌓여 있었다. 선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었다. 어제 새벽에 들어오고, 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몸을 감사고 있던 검은 원피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검은 속옷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선영은 손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다. F컵에 달하는 가슴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선영은 크게 호흡하고 억눌려 있던 가슴의 해방을 잠깐 즐겼다. 헐렁한 티셔츠를 찾아 그대로 걸쳐 입고,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손을 멈추었다.
'내가 왜 방을 치우고 있지...'
전 같으면 방 청소 같은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던 그녀였다. 그러나 방에 남자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면서, 그녀는 은근히 청소에 신경 쓰고 있었다. 그녀에겐 새벽이나 다름없는 이른 시각에 일어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럴 필요... 없잖아.'
선영은 손에 들린 옷가지를 대충 뭉쳐 빨래 바구니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아른거리는 시야 너머로 달력이 보였다. 다음 주 일요일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선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그 표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선영은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예요. 한석."
선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연락이 오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후로, 이제는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선영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잠자코 있자,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유진이한테는 과외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선영은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건 통보구나. 그렇게 이해한 그녀는 최대한 시큰둥한 목소리를 꾸며 대답했다.
"예, 들었어요."
"저 죄송하지만요, 그리고 당분간 그쪽 과외는 못 갈 거 같아요. 제가 좀 일이 생겨서요."
"무슨 소리죠, 그게?"
"그게 그러니까요. 제가 일이 있어서 당분간 선영 씨 과외는 못 할 것...."
"제 과외요?"
선영은 그제야 남자가 왜 전화를 했는지 깨달았다.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고, 순진할 정도로 올곧은 이 남자를, 선영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안에서 치미는 어떤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대답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힘을 쓰고 있었기에, 입에 담긴 말투는 사나웠고, 뾰족했다.
"하, 난 또 무슨 소리인가 했네요. 그래요, 그것도 그만두도록 해요."
순박한 남자는 이 거친 말투에 조금 발끈한 모양이었다.
"네? 아예 그만두라고요?"
선영은 내친김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예전처럼 하하 호호 하던 모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유진이 과외를 그만두기로 하셨으면 굳이 제 과외를 계속 하실 필요는 없어요."
"하아. 그럼 당신이 말했던 목표라는 건... 이제 필요 없어요?"
선영은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에 놓인 문제집을 보았다. 남자는 89페이지까지 풀어놓으라는 숙제를 내주었고, 선영은 엊그제까지 혼자 애써가며 숙제를 마친 터였다. 맞춘 문제보다 틀린 문제가 더 많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다 푼 건 사실이었다.
선영은 침을 한 번 삼켰다. 한 번 더 모질게 말했다.
"그건 더 이상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남자는 소리쳤다.
"그럼 계약서니 뭐니 한 건 대체 뭡니까!"
선영은 생각했다.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그리고 대답했다. "계약서? 그딴 건 그냥 찢어버리세요. 저도 버릴 테니까요."
수화기 너머, 남자는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외쳤다.
"아뇨. 잠깐만요. 난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었고 당신의 목표에 대해서 공감했기에 과외를 하기로 한 거였어요. 그리고 아직 당신이 말한 금액, 그거 채 갚지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그쪽이 끝내자고 하면 그냥 끝인가요? 그럼 난 여태까지 뭘 한거죠?"
수화기 너머 들리는 말, 하나하나가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 마시는 건 선영의 버릇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차갑게, 그리고 무신경한 목소리를 꾸며 보았다.
"뭐야. 그러면 그런 터무니없는 청구서가, 진짜라고 생각한 거란 건가요? 최한석 씨. 생각보다 많이 순진하시네요."
"뭐?!"
상대방의 어이없어하는 비명을 들으며 선영은 가슴이 아팠지만 최대한 힘을 다해 마지막 목소리를 짜냈다.
"아무튼 앞으론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물론 올 필요도 없구요."
한석의 대답은 없었다. 그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선영이 냅다 전화를 끊은 탓이었다. 조금만 통화가 길어진다면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말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다. 선영은 그것이 마치 무서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화기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선영은 한숨을 내쉬고 물을 한 잔 마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다가 문득 달력을 보고 말았다. 다음 주 일요일에 표시된 동그라미가 눈에 또 들어왔다.
선영은 자기 직장 보스이자 직속상관인 유미에게 저 날 못 나간다고 미리 말해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사실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언니한테 이야기 했던가? 안 했나?'
그러나 기억나는 건 있다. 누군가와 같이 가기로 약속했었다. 그는 어리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그 날 시간이 되노라고 대답했다. 둘은 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오늘 이렇게 전화로 서로의 인연을 끊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둘은 함께 차에 타고 저 멀리 외딴 곳에 있는 산소에 찾아갔을 터였다.
선영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난 왜 그 남자를 엄마 산소에 데려가려고 한 거지? 엄마한테 보여주려고?'
선영은 혼란에 빠졌다. 사실 그와 동침 아닌 동침은 몇 번 한 터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를 거두어 이 방에서 재운 적도 있었다. 듬직한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그 밤은 분명 달콤했지만, 선영에게 온전히 주어진 기회가 아니었다.
'착각했어. 그게 내 것인 줄 알고.'
선영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하아...."
마음이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남자 따윈 그저 자지 달린 짐승에 불과하다고 늘 스스로에게 말해왔는데 왜 이럴까. 엄마 만나러 가는 일에 같이 가자는 약속 따위를 왜 한 걸까.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선영은 문득 무언가 생각나 책상에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손을 뻗어 서랍 안쪽에 놓인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잘 접혀 있는 손수건. 그녀의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과 호스티스가 어울린다라.... 무슨 쌍팔년도 한국영화에서도 안 쓸 스토리네. 유치해. 지독하게 유치해.'
그녀는 웃었다.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잠시 후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내야만 했다. 다 울고나서 선영은 씻었다. 그리고 전보다 더 진한 화장으로 표정을 감추었다. 다시 검은 옷을 입었다.
그 날 저녁, 그녀는 출근하는 길에 문제집 꾸러미를 버렸다. 그렇지만 손수건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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