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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부도덕한 여교사
둘째 딸은 손을 들어 웨이트리스를 부르며 말했다.
"그래, 내가 오겠다고 했어. 조카 돌잔치에도 안 오는 언니 좀 보게 말이야."
"나 봐서 뭐하려고."
"뭐하긴. 여전한가 보려는 거지."
날이 선 동생의 대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렸을 때는 지선이 만큼이나 지윤이도 몹시 살갑게 굴던 아이였지만... "그 날" 이후로는 날 타인보다도 못하게 본다. 누구도 아닌 내 잘못이기에 차마 그런 태도를 탓할 수 없었다.
"여전하다면 여전해. 그냥 저냥 지내. 넌 좀 어때?"
"나야 방금 들었잖아. 얼마 전에 한바탕 하고 양다리 걸치고 있던 두 놈이 동시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지금은 좀 프리하지."
지윤이는 지선이 몫으로 나와 있던 조각 피자를 들고 덥석 베어 먹었다. 지선이는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둔 거라며 안타까워했지만, 별 수 없었다. 지윤이는 자기 몫의 스파게티와 피자 한 판을 더 시켰다. 그제야 지선이의 쫑알거림이 가라앉았다. 지윤이는 손에 붙은 빵가루를 털며 내게 말했다.
"다다음 주에 아버지 칠순이야. 모르진 않겠지?"
고개를 끄덕인다. 다이어리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알아."
"유빈이 돌잔치처럼 대충 빠지려고 하지 말고. 꼭 와. 지훈이도 그때 맞춰서 말년휴가 받아서 나오기로 했어."
필라프로 향하던 내 숟가락이 멈칫했다. 날 보기 싫어하는 지윤이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개를 들고,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몹시 딱딱한 표정의 지윤이가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꼭 와. 가능하면 남자 데리고 말이야."
씹고 있는 필라프가 한없이 맛없게 느껴졌다. 역시 내게 양식은 별로 맞지 않은 것 같았다. 지윤이가 날 보며 말했다.
"남자... 있어?"
"왜. 있어야 하니?"
지윤은 살짝 코웃음 쳤다.
"있는 게 보기 좋잖아. 언니 나이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본격적인 남자가 있어도 이상할 게 아니니까."
"본격적인 남자라.... 대체 어떤 남자를 말하는 거야?"
"말해줘야 알 나이는 아니잖아."
지윤과 내 사이 대화가 너무 격화되었던 걸까. 지선이가 끼어들면서 음식 접시를 내밀었다.
"언니들. 이거 먹어 봐. 이거. 맛있어."
동생의 필사적인 정성 덕분에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들었다. 세 남매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식사를 그렇게 조금씩 진행되었다. 헤어질 때는 그래도 가벼운 포옹 정도 할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꼭 와."
지윤은 이렇게 강조했고, 지선이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언니 마음대로 해."
동생들이 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몸을 돌렸다.
*
동생들을 만나고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난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설령 간다고 해도... 그냥은 못 갈게 분명했다. 애써 시간을 내어 나온 지윤이의 조언대로 누구 하나 데리고 가지 않는 이상, 참석한다고 해도 가시방석이 될 게 분명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책상에 놓여있는 출석부와 야간자율학습 신청서 따위를 노려보고 있어도, 좋은 생각이 날 리 만무했다. 한숨을 내쉬고 그중에서 야자 신청서만 따로 추렸다.
"일 하자, 일."
이건 행정실에 넘겨주어야 하니까. 맨 앞장에 있는 반장의 신청서를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청사유 : 시간이 남아서. 한 달간 야자 하겠음.'
한숨이 나왔다. 당돌한 녀석 같으니...
이 녀석은 과외 한다고 야자 빼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다시 신청하는 건지 모르겠다. 공부는 곧잘 하는 녀석이고 눈치도 빠른데, 워낙 똑똑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녀석이라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은 진유진. 입학성적 학년 1등이 우리 반에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임시 반장을 시켰었는데 어느 순간에 정말 반장이 되어버렸다. 꽤 예쁘장하게 생기고 도도한 성격이라 여자애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지만 남학생들의 몰표가 이 녀석에게 쏟아진 모양이었다.
마치 인형 같이 예쁘장한 얼굴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색기 어린 표정을 가끔 짓는 녀석이라 뭇 남학생들이 반장에게 목메고 있다는 건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정작 본인은 반장이 된 걸 탐탁치 않아하면서도 시킨 일은 틀림없이 맡아 제법 잘 처리하고 있었다. 일을 잘 해주니 담임인 나로서 불만은 없지만... 뭔가 다루기 힘든 학생인 것도 사실이었다.
"교무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모이세요."
박 선생의 외침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무실 한쪽에 자리한 회의 탁자로 갔다. 교감 선생 옆에 못 보던 얼굴 네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얼마 전 박 선생에게 넘겨받은 서류가 떠올랐다. 한 장짜리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그리고 관리방침이 담겨진 서류철이었다.
"자자,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주부터 우리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게 될 재원들입니다. 거기, 박 군부터 인사하게나."
`
실습생은 네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이 남자였다. 남자 둘 다 키는 컸지만 폭이나 두께에 있어서 두 배가량 차이가 났다. 두 사람 중에서 큰 쪽이 앞으로 나와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박태근이라고 합니다! 체육 담당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딱 보기에도, 목소리만 들어도 체육 담당인 줄 한 번에 알 수 있는 인상이었다. 다소 험상궂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표정은 몹시 밝았다. 선생들의 박수가 끝날 무렵, 두 번째 남자 실습생이 앞으로 나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얼굴은 평범하게 생겼고 옷차림 역시 심심할 정도로 단정했다.
"기술, 가정을 맡은 최한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생긴 것만큼이나 목소리도 평범했다. 조금 전 박태근처럼 패기가 넘치는 목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눅 든 목소리는 아니었다. 침착하면서도 자기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인 듯했다.
문득 지훈이 생각이 났다. 얼굴이 닮았다고 보긴 어렵지만, 큰 키와 차분한 목소리가 언뜻 닮았다.
"수학을 맡은 양현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국어를 맡은 박은애라고 합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나머지 두 여자 실습생의 인사도 지나갔다. 애처럼 생긴 양현아와 달리 늘씬하고 잘 빠진 스타일인 박은애가 인사할 때 동료 남자 선생님들이 과도하게 좋아라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늘 하는데도 늘 지겨운 교무회의가 흘러갔다. 흩어지는 선생들 사이로 한석을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내 앞에 서서 고개를 꾸벅하더니 재차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최한석입니다. 한 달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까 했던 생각은 취소했다. 가까이서 보니 지훈이를 전혀 닮지 않았다. 그렇지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어쩐지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반갑습니다. 송지애라고 해요."
한석은 허리를 굽히더니 내 손을 맞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키만큼이나 커다란 손이었다. 그 손이 내 손을 한 번에 감쌌다.
순간 짜릿했다. 그것은 분명 남자의... 손이었다. 악수가 끝나고도 손의 감촉이 아직 내게 남아있는 것 같았다.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이러지.'
두근거림이라니. 서른셋의 여자에게는 사치스러운 감정이다.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젓고는 들고 있던 서류와 출석부를 한석에게 몽땅 안겨주었다. 내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빠른 말투로 말을 쏟아냈다.
"앞으로 4주간 저희 반 부담임을 맡게 되실 겁니다. 오늘 안으로 이 출석부의 이름과 사진을 외우세요. 3주간은 제가 하는 수업의 참관 및 수업 보조를 하실 거구요, 마지막 1주차에는 최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시게 됩니다. 그 전까지 수업계획서 및 교안 작성을 마치세요. 질문 있습니까?"
어리바리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한석은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오라고 이르자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크기와 종은 전혀 다르지만, 어미 닭을 따르는 병아리가 생각났다.
그 모습이 왠지 웃겨서 최대한 더 딱딱하게 말했다.
"교생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선생님입니다. 우리는 소수이고 학생들은 다수죠. 학교에서 혹은 인근 지역에서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감시하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모든지 한 번 더 생각하고 움직이기 바랍니다. 단순히 저와 교감 선생님의 평가만이 최 선생님의 실습 평가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 명심하세요."
"네."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나면 실습은 전면 중지입니다. 해명 따위는 먹히지 않아요. 학교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시끄러워질 심산이 보이면 바로 손을 떼니까요. 선생님들이야 노조도 있고 경력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교생은 전혀 다른 입장이라는 거, 알고 있죠?"
"아, 예."
"좋아요. 앞으로 4주간 잘 해내길 빕니다."
"옙."
대답은 잘 했다. 이 정도 겁을 주면 충분하려나. 생긴 걸로 보면 엄한 짓은 안 하게 생기긴 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교무실을 나설 때 수업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복도를 지나 교실을 향했다. 이런 것까지 굳이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는데 괜한 오지랖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1층이 교무실 및 행정동. 2층이 3학년, 3층이 2학년, 4층이 1학년 교실입니다. 건물의 양쪽 끝에 화장실이 있고 과학실, 음악실, 체육관을 비롯한 각종 시설은 별채에 모여 있습니다. 남교사 휴게실은 1층 끝에 있구요, 여교사 휴게실은 아직 없습니다. 전부터 설치해달라고 계속 요청중인데 이 놈의 학교행정은 도무지 발전이라는 게 없군요."
아무 이야기나 꺼내다 보니 되도 않는 이야기까지 꺼내고 말았다. 여교사 휴게실이 한석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해놓고도 금방 후회했다.
"아, 예."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석은 그저 대답만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교실에 다 도착하기도 해서 서둘러 말을 끊었다.
"다행히 별채에 연구실은 있으니 기가 담당 선생님들과 계약직 선생님들도 거기에서 대기하고 쉬곤 하죠. 이따가 점심시간에 그쪽에 안내하겠습니다. 이 밖에 질문 있습니까?"
"없습니다."
"좋아요. 들어가죠."
내가 먼저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갔다. 늘 그렇듯이 소란을 피우며 자리로 찾아 들어가는 아이들. 교탁으로 올라서서 반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반장에게 인사를 시키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반장이 한석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내가 들어오면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할 준비를 마치던 녀석인데 오늘은 어쩐지 이상했다. 새로 온 교생, 처음 본 사람이 교실에 들어오니 신기했던 걸까.
"반장, 인사해."
불러 세우자 그제야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만 시선은 여전히 교생 선생에게 꽂힌 채였다. 쟤가 왜 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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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은 지난 어떤 루트의 어떤 장면을 지애의 눈을 통해 보고 계십니다.
그 루트와 조금 비슷하게 가지만 꼭 같게 흘러가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