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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부도덕한 여교사
반장은 새로 온 교생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맨 앞자리에 앉은 반장은 반 아이들을 한번 돌아보고 구령을 붙였다.
"차렷. 경례."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체 인사를 마치고 반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4주간 교생실습을 하면서 우리 반 부담임을 맡게 되실 최한석 선생님이다. 최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예."
한석은 쭈뼛거리며 교탁에 섰다. 아이들을 향해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최한석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와아~"
"에이~"
여학생들이 외치는 환호와 남학생들이 쏟아내는 실망 섞인 야유가 교차했다. 여자 교생이 왔으면 아마도 남학생들이 환호하고, 여학생들이 우우- 하는 소리를 쏟아냈으리라.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조회를 진행시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조회를 마치고 1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교실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한석을 달고 교무실로 내려갔다. 내 자리 옆에 간이의자 하나를 가져다놓고 한석이 앉도록 했다.
"최 선생, 우리 반 애들 보니까 어때요?"
"네? 최 선생이요?"
한석은 내가 부르는 호칭에 깜짝 놀랐다.
"아까 말했잖아요. 교생이라고 해도 선생님입니다. 앞으로 그 호칭으로 불릴 테니 익숙해지도록 해요. 실습생이라고 부르는 분도 있을 테지만, 일단 전 선생이라고 부를 게요."
"아, 예에...."
한석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선생님이란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십여 년전, 아마도 나 역시 저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으려나.
교생 실습 첫날의 긴장감이라는 거... 하도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까마득할 지경이었다. 한석을 재촉하여 반 아이들에 대한 감상을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조금 놀랐달까요..."
"놀래?"
"아, 아뇨. 음. 다들 쬐끄마할 줄 알았는데 큰 애들도 많네요."
다소 얼빠진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등학생이면 이미 다 큰 애들인데 작긴 뭐가 작아. 여자애들이야 좀 덜 큰 애들이 있겠지만, 남자애들은 죄다 시커먼 녀석들뿐이라고."
"그런가요."
한석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책상 앞에 붙은 시간표를 가리켰다.
"여기 보면 알겠지만, 오늘은 3교시에 제 수업이 있어요. 그때부터 참관을 시작하도록 할 테니 그때까지 아침에 말한 거 하고 있어요."
"출석부... 말씀이죠?"
고개를 끄덕이자 한석은 출석부를 펼치고 아이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보기 시작했다. 한석이 한 녀석의 사진을 한참 쳐다보고 있기에 부연설명을 좀 해주었다.
"아까 봤겠지만, 걔가 반장이에요. 이름은 진유진. 꼼꼼한 성격이고 시킨 일이 있으면 틀림없이 잘 해내는 아이니까 학급 일에 대해 물어볼 게 있으면 그 아이에게 물어보도록 하세요."
"아, 네에... 유진이가 반장이었군요...."
"유진이?"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손을 내젓는 한석을 보며 뭔가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때 지나가던 박 선생이 오늘 전체 회식이 있으니 빠지지 말라고 말했다.
"메뉴는 뭔가요? 또 회?"
혹시나해서 물어보았는데, 역시나다. 박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다. 우리 학교 교장은 전생에 무슨 회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어있는지 회식을 했다하면 회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회를 먹으니까 회식이다."라는 농이 존재할 정도였다.
"선생님들 회식하시나 봐요?"
옆에 있던 한석의 질문이 들렸다. 여전히 얼빠진 목소리다.
"한석 씨도 선생님이에요. 남 이야기처럼 말하네. 실습생들 환영회로 여는 회식이니 아마 술잔 좀 많이 돌릴 겁니다. 술 세요?"
"네? 뭐... 그럭저럭 마십니다."
"그럭저럭 이라... 별로인가 보네?"
"하하. 예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 한켠이 떨렸다. 황급히 한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책상 위에 놓인 교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속으로 애써 중얼거렸다. 주책이라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했는데 말이다. 왜 이럴까, 나는.
그렇게 하루는 어찌어찌 흘러갔다. 저녁이 되었고, 회식에 참석했다.
그럭저럭 마신다는 한석의 대답은 거짓말이었다. 그럭저럭 은커녕 엄청 잘 마신다. 말이야 선생님들 전부에게 술을 돌리라고 하지만 그걸 제대로 다 해내는 이는 드물었다. 회식을 하면서도 줄곧 한석을 지켜보았다. 꽤 마셨는데도 끝까지 거의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 돼? 눈을 못 떼네."
옆자리에 앉은 양효주 선생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을 붙였다. 소주 한 잔만 마시면 얼굴이 벌게지는 아줌마라 마시라는 술은 안 마시고 아까부터 내 앞자리 안주를 죄다 박살내는 중이다. 남의 시선을 뭐 그리 신경 쓰는지... 얼른 술잔을 들어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사수잖아요. 실수....같은 거 안 하나 보는 거죠."
"실수? 어떤 실수?"
양 선생은 고개를 돌려 한석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 선생님들 사이에 끼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꽤 마신 것 같은데도 앉은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다. 술이 정말 쎈 모양이다. 양 선생도 감탄했다.
"젊어서 그런가. 저렇게 마시고도 끄떡없네."
"네에... 젊네요."
양 선생의 말은 그녀와 내가 젋지 않다는 말로 들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아직 미스란 말이다. 그렇게 어필하고 싶었지만, 노처녀 히스테리로 보일 것 같아 참았다.
시간이 흘러 회식이 끝나고 자리가 파했다. 횟집 앞을 시장바닥으로 만드는 인파를 헤치고 한석에게 다가갔다. 한석에게는 누군가 달라붙어 이차를 종용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양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곁에 가자 그는 날 알아보았다.
"아, 송 선생님."
얼굴이 다소 붉어져 있기는 하지만 혀는 꼬이지 않은 한석이었다. 그의 앞에 도달했지만, 막상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고작 생각해낸 말이....
"내일, 늦지 않도록, 하십시오."
였다. 세상에. 이런 꼰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다니. 말이 내 입을 떠나자마자 후회했다. 양 선생의 말마따나 난 이미 젊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한석은 내 말을 듣고도 그저 한번 씨익 웃더니,
"걱정 마세요."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라고 말한 다음 그 자리를 물러났다. 부끄러웠다. 사춘기 소녀가 남자애한테 말 붙이고 창피해하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었다.
다른 선생님들과 2차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리를 떴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니 한석은 자기 동기들을 추스르고 있었다. 비교적 멀쩡한 한석과는 달리 그의 동기들은 죄다 인사불성이었다. 혼자서 셋을 감당해야 하다니... 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횟집 앞을 떠나 노래방으로 걸어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지 싶었다. 옆에 있는 양 선생에게 속삭였다.
"저, 잠깐.... 나중에 갈게요."
"왜? 집에 가게?"
"집은 아니고... 아까 그 가게에 뭐 좀 두고 온 거 같아서요."
"저런. 그럼 얼른 가 봐요. 노래방은 알지? 저기 홈런 노래방."
고개를 끄덕이자 양 선생은 얼른 가보라며 날 보내주었다. 떠들썩한 무리를 살짝 빠져나와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생각했다.
내가 돌아가서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나 역시 멀쩡한 정신이 아니면서, 취한 동기들을 추스른 한석을 돕기라도 할 셈인가. 괜한 오지랖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래, 어쩌면 술김에 그리 하는 것이란 나 자신의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걸음걸이 하나마다 한석에게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니 나름대로 발걸음이 가까워진다. 모퉁이를 돌자 저쪽에서 한석이 보인다. 실습생 중에 여자 실습생 하나를 부축하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기 한석이야?"
내가 한석을 부르기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한석을 먼저 부른다. 길가에 검은색 중형차 한 대가 와서 서 있었다. 그 차의 운전자가 한석을 부른 모양이다. 운전자는 어떤 여자였다. 한석은 무척 기뻐하며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꽤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한석은 술 취한 자기 동기들을 차에 태웠다. 그리고 자신도 조수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한석과 운전석의 여자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이내 차가 출발했다. 모퉁이에 선 나는 그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몸을 돌렸다. 원래 가려던 노래방으로 갔다. 주인장이 일행이 들어간 방 번호를 알려주었다. 술에 잔뜩 취한 누군가가 고성방가를 하고 있는 방에 들어간다. 양 선생의 옆자리에 앉았다. 양 선생이 날 보고 물었다.
"어딜 다녀온 거야?"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했다. 잠시 후 나는 앞에 놓인 노래방 책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좀 쓸데없는 짓 좀 하고 왔어요."
그러나 양 선생은 이미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있었다. 이 시끄러운 노래방에서 내가 중얼거린 소리를 못 듣는 게 당연하다. 그녀는 박수를 치며 앞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의 박자에 동조하고 있었다.
노래방 책자를 펼쳤다. 뒷부분부터 보다가 영 모르는 노래뿐이라 앞부분을 폈다. 역시 난 젊지 않다. 뭘 부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ㅎ 부분을 펼쳤다. 그리고 엄정화 노래를 골랐다. 제목은 하늘만 허락한 사랑. 내 차례가 되어 그걸 부르고 있자니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아 보였다. 여태 떠들썩한 노래만 부르고 있었으니 내 선곡은 좀 뜬금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다만 양 선생만이 팔까지 휘저으며 콘서트장 흉내를 낸다. 끝까지 부를까 하다가 중간에 멈추었다. 다음 노래는 누군가 고른 김건모 노래였다. 노래방의 분위기는 다시 떠들썩해졌고, 난 거기에 적당히 편승하다가 중간에 빠져나왔다.
"후우...후우....."
내 숨소리에 내가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참 이상했다. 숨소리에 집중하고 싶지 않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까 부르려던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정말 미안해 날 용서해줘. 이런 얘기 이제는 아무 소용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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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왔던 외전 <카페 미리내>도 그랬지만,
이번 외전 역시 패러렐 월드입니다.
본작의 등장인물과 사건을 일부 인용하지만 별개의 스토리로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