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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409화 (40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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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부도덕한 여교사

일주일은 금방 흘러갔다.

한석은 여전히 어리바리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데 꽤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다만, 아침 일찍 출근하라고 한 지시는 여전히 못 지키고 있었다. 매일 저녁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술잔 돌리느라 정신없다는 그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아침마다 이마에 힘을 주고 혼내고 있었다.

벌써 금요일이 되었다. 오늘도 늦는다.

교무실에 앉아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 한석은 오지 않았다. 뜬금없이 양 선생이 다가와 아침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짜고짜 물어 보았다.

"그래서, 잘 되어가?"

"잘 되어가다니요?"

양 선생이 갑자기 물어보는 통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보았더니, 꽤나 은근한 표정으로 낮게 속삭였다.

"최 군 말이야. 최 군. 어떻게, 잘 꼬시고 있어?"

옆구리까지 쿡쿡 찌르는 양 선생의 작태에 한숨만 나왔다. 어이없다고 그렇게 반응했는데, 그녀는 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어머, 잘 안 되가나 보네? 어디 둘이 따로 시간 가지거나 한 건 없어?"

"시간은 무슨... 최 선생은 퇴근만 하면 술자리 불려다느니라 바빠요. 아침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나타난다고요."

내 딴에는 변명을 한다고 했는데 양 선생은 그걸 또 다르게 캐치했다.

"아침마다 잘 체크하고 있었구나... 점심 도시락만 챙겨주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눈치만 빨라 가지고. 그걸 또 언제 보았지.

"....그런 적 없어요."

"그럼 점심 두 배로 먹으려고 두 개씩 싸가지고 다녔어?"

"사수잖아요, 사수."

애써 항변해보지만, 양 선생의 느글거리는 미소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이 아줌마. 눈치 없는 줄 알았는데 이쪽 방향으로는 너무 발달해서 탈이었다. 양 선생은 씨익 웃더니 내 팔뚝을 붙잡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잡아. 연구실 선생님들하고는 이야기 끝내놨어. 다 같이 밥 먹으러 갔다가 두 사람만 남기고 빠져줄게. 괜찮지?"

"오늘 저녁에 집에서 할 일 많은데..."

"알아서 일찍 집으로 가면 되지. 누가 못 가게 붙잡았나? 아니면 한석이도 데리고 들어가든가?"

양 선생이 그렇게 날 흔들어놓고 떠났다. 거절도 제대로 못한 내가 한심스러웠다. 교무실에 멍하니 앉아있자니 한석이 출근했다. 전달사항을 몇 개 말해주다가 말미에 살짝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말을 꺼낼까 말까 계속 고민했다. 간신히 겨우 꺼냈지만,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이건 누가 봐도 데이트 신청처럼 들리는 말투인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그런데 바싹 얼어붙은 한석의 반응은 날 살짝 실망시켰다.

"네엣?! 에... 이.... 있습니다!"

슬쩍 얼굴을 살피니,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가 이번 주 내내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술자리에 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시간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아마 줄창 술 먹이는 회식의 연장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웃음이 나왔다.

"긴장하지 말아요. 오늘 연구실 분들이랑 저녁 먹기로 했으니까 이따 끝나고 주차장으로 와요."

"예."

한석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일단 이 서류는 행정실에 내주시구요."

"옙."

내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고 교무실을 나서는 한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퇴근 후, 기가연구실 선생들 모두 모여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 최 군과 송 양을 확실히 밀어주자고 선동하는 양 선생의 너스레에 다들 까르르 웃고 있었다. 여기에 말을 보태보아야 좋은 꼴 당하기 어려우므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양 선생은 한석을 향해 농 아닌 농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머나, 최 선생. 오랜만이에요?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여기에 다른 선생들도 가세했다. 분명 한석에게 질문을 던져놓고도 자기들끼리 답을 주고받았다. 아직 한석은 대답도 안 했는데 말이다.

"송 선생이 안 놔주나 보지."

방금 말을 꺼낸 박 선생을 살짝 흘겨보자 마흔이 넘은 그녀는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난 또 내가 들러붙어서 도망간 줄 알았지. 호호호."

"박 선생이 들러붙으면 총각이 아니라 총각 할애비라도 도망가겠어요."

"어머나, 연상도 나쁘진 않은데 할아버지는 좀 심하잖아."

한석은 어색한 표정으로 애써 따라 웃었다. 아줌마들 유머는 전혀 재미가 없으니 안 웃어도 될 텐데, 고생이 심했다.

우리는 내 차와 양 선생 차에 나누어 타고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일식집으로 갔다. 평소 연구실 선생들끼리 곧잘 오는 곳이었다. 양 선생은 맞은편 한석에게 이것저것 계속 물었다.

"요새 다른 선생들이 술 많이 먹이지?"

"아, 예."

"원래 그래. 술 잘 먹어야 직장 생활 잘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신념을 가진 아저씨들이 꽤 많아서 말이야. 아마 다음 주부터는 좀 괜찮을 거야."

"그런가요."

날 향해 눈을 찡긋거리는 양 선생을 애써 무시했다. 자리 배치를 유도하여 나로 하여금 한석의 옆에 앉게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에게 무어라 딱히 할 말이 없어 난감했다. 평소 학교에서야 이런저런 업무지시나 조언을 할 수 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 저렇게 양 선생처럼 실없는 소리를 웃으며 하긴 쉽지 않았다.

"많이 먹어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런 소리다.

"아, 예."

내 몫으로 나온 초밥 몇 개를 한석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일주일 해보니까, 어때요? 할 만해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모르면 어떻게 해? 평가 점수 깎을까요?"

"넷? 아, 저... 그게....."

당황하는 한석을 보며 다들 까르르 웃었다. 양 선생이 손을 내저으며 한석에게 말했다.

"최 선생. 송 선생이 농담한 거야. 송 선생은 농담하는 말투가 저렇게 진지하다니까?"

"아, 예에....."

창피했다. 난 어째 농담 한마디도 농담처럼 할 줄 모르는 걸까. 매사에 진지하고 재미없는 사람. 그게 나에 대한 오랜 평가였다. 그리고 또 다른 평가도 있지만, 그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알아서는 안 됐다.

농담에 실패한 내가 잠자코 있는 동안 다른 선생마다 돌아가며 한석에 대해 한마디씩 던졌다. 아줌마들의 짙은 농담에 한석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회식을 했는데도, 술을 별로 안 먹었다는 사실이 한석에게는 놀라운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설명했다.

"대부분 애들 엄마라서 일찍 들어가니까요. 2차는 따로 없어요."

"아, 예. 그러셨군요. 다행입니다."

중간에 한 명씩 내려주고 나니 이제 차에는 한석과 나만 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리던 선생님이 내게 은근한 신호를 보내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헛기침을 하며 한석에게 물었다.

"최 선생은 어디서 내려줄까요?"

"아, 전 가까운 지하철역 아무데나 내려주셔도 돼요."

"그래요, 그럼. 내일은 출근 안 하죠?"

"예. 학교에 실습 보고 하러 가야 되어서요."

한석이 아직은 대학생이라는 게 실감났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대학생은 좋겠네요. 토요일은 쉬고."

"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왜요?"

"밀린 리포트도 써야 되고 교안도 써야 되고..... 이번 주 내내 술만 마시느라 집에 가면 뻗기 바빴거든요."

의외였다. 항상 어리바리한 면이 있어 그다지 믿음직스러운 인상은 아니었는데...

"착실하네? 대개 막판에 닥치면 하곤 하던데."

"제가 손이 좀 느려서요. 미리미리 안 해두면 나중에 곤란해지거든요."

학교생활과 교생실습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후드득 소리와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봄비 치고는 꽤 오네?"

"그러네요."

"우산 있어요?"

"아뇨."

한석을 이대로 보내기 싫었다. 그러던 참에 좋은 핑계가 생긴 셈이었다. 갑작스레 내리는 비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비도 오고 그런데, 한 잔 더 할래요?"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비랑 술이랑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그럼, 어디 보자... 전철역에서 가까운 데가...."

평소 잘 가던 수입맥주 전문점으로 갔지만 만석이었다. 금요일 저녁이 이렇게 사람 많은 시간일 줄은 몰랐다. 공교롭게도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비도 오는데 계속 왔다 갔다만 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한참 고민하던 나는 마음을 굳혔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기왕 이런 게 된 거 무리라고 해도 좋다. 주책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한석을 쳐다보았다. 내 처분만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그 순한 얼굴을 향해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조금... 더 가야 하는데, 거기로 갈래요?"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라... 그럼, 잘 따라와요."

어차피 그는 내 차에 타고 있으니, 따라올 수밖에 없다. 차를 돌렸다. 비가 점점 더 세지기에 와이퍼의 속도를 올려야만 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앞유리 창은 금방 흐려졌지만, 촤악- 촤악- 하는 와이퍼 소리마다 조금씩 걷혀 시야를 확보해주었다.

내 얼굴에도 지금 와이퍼가 달려 있으면 좋겠다. 내심 피어오르는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누가 좀 가려줬으면 좋겠다.

차로 금방인 거리였다. 골목에 차를 대놓고 한석과 함께 내렸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급히 뛰어 대문 앞까지 도달했다.

"여기에요. 들어가요."

"네? 여...여긴."

당연히 술집에 가리라 생각했던 그는 난데없는 가정집 등장에 놀란 표정이었다. 저렇게 투명하게 생각이 얼굴이 비치는 것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이상한 생각은 말아요. 마땅한 곳이 없어서 여길 선택한 거니까."

"예에..."

내가 생각해도 억지논리였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한석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난 지금 한석을 데리고 내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네? 네!"

거실에 한쪽에 놓인 테이블 의자를 끌어다 한석에게 권했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다 잠시 망설였다. 평소처럼 트레이닝복을 꺼내 입을까 하다가 나도 모르게 옆에 놓인 짧은 치마를 챙겼다. 아주 예전에 충동적인 생각으로 사다놓고도 이걸 내가 입기에는 나이가 주책이라며 입지 않았던 옷이었다. 그걸... 지금 집에서 있겠다는 나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이미 손에 잡은 후였다.

셔츠 하나와 치마를 가지고 옆방으로 가서 갈아입고 돌아왔다. 뻘줌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한석에게 거듭 변명했다.

"내가 자주 가던 술집들이 다들 만석이라.... 비가 오니 다들 술 생각이 나나 봐요."

"그런가요."

"맥주 괜찮죠?'

"네."

냉장고에서 캔맥주와 마른안주가 담긴 병을 꺼냈다. 맥주를 한석의 앞에 놓아두고 접시를 꺼내왔다. 안주가 담긴 병을 열려고 하는데, 웬걸. 이게 쉽게 열리지 않아 나도 모르게 기를 쓰게 되었다.

"저 주세요."

불쑥 내 앞으로 내민 한석의 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건 남자의 손이다. 분명히 남자의 손이다. 나는 지금 나만의 성에 '남자'를 들였다. 스스로 문을 열고, 그를 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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