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18화 (41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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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88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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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경찰서를 벗어났다. 닭장차가 오더니 시위 중인 사람들을 하나씩 담요로 싸서 태워가는 광경이 보였다.

휴거...라고 했던가. 저들이 믿는다는 게? 게다가 중독이라니?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까 뉴스 화면에 약 2초정도 비쳐졌던 소란의 모습을 떠올렸다. 단 일주일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경찰병원이든 뭐든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또 걱정이 되는 것이.... 지금 경찰서도 천만다행인 요행으로 들어왔는데 병원도 그게 될까 싶었다. 윤태라는 경찰이 말한 걸 떠올려보았다. 그는 "어지간한 빽"이 아니고는 근처도 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게 나한테 있을 리가 있나.....

패배감과 무기력함에 젖어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되든 안 되든... 도움을 요청해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내가 가진 돈이라고는 50원짜리 동전 하나뿐이었다.

젠장. 아까 택시비도 겨우 냈던 게 떠올랐다. 이제 차비도 없으니 여기서 집까지도 걸어가야 할 판이었다. 전화를 걸 수 있는 곳은 딱 한 군데뿐이지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얼마 전부터 신세를 지고 있는 ROSE. 또 다른 하나는 무려 변호사를 대동하고 다니던 효진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효진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효진과 함께 있는 변호사라면 이런 상황에서 조언을 구하기 용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예 외어버린 효진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효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대전화로 거는 건 동전이 빨리 떨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말했다.

"나, 한석인데. 여기 종로거든? 좀 와줄 수 있어?"

"무슨 일인데?"

"전화로 길게 말하기 곤란해. 암튼 도움이 필요해. 부탁할게. 가능하면 그 변호사 씨도 같이."

다짜고짜 한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효진은 즉답했다.

"혹시 시노벨이라는 커피숍 알아? 피카디리 앞에 있는...."

"알아."

"언니랑 같이 30분 안에 갈 테니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길로 나섰다.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그녀가 말한 장소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낙원상가를 지나 계속 걸어 종로3가에 도착했다. 커피숍에 들어가 있을까 하다가 앉아있을 기분이 아니라 밖에서 서성거렸다.

잠시 후, 눈에 익은 은색 대형차가 도로에 멈추더니 효진과 하영이 내렸다. 인사도 생략한 채 내가 보았던 장면과 경찰서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처음에는 무표정하게 듣고 있던 효진의 표정이 점점 뜨악해졌다.

"자...잠깐만. 그러면 그 네 학생이라는 애가 이상한 교회에 끌려갔다가 지금은 병원에 있다고? 뭔가에 중독되어서?"

"그래. 경찰들 말로는 외부인 면회까지 차단할 정도라고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그런 거면 학교에 먼저 연락을 해야지."

"그럴 경황도 아니고 잔돈도 없어. 너한테 한 전화가 내 마지막 동전으로 한 거였어."

효진은 혀를 차며 자기 휴대전화를 내주었다. 수첩에서 학교 당직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직 선생님 역시 크게 놀라더니 송 선생에게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효진의 휴대전화 번호도 함께 알려주고 연락을 바란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효진은 하영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제 동기 중에 검사로 있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사정을 물어볼 수 있겠지요."

친구 중에 검사가 있다니! 역시 어려운 공부 많이 하고 배운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다른 건가 싶었다. 기대감 잔뜩 품은 눈빛으로 하영을 쳐다보자 그녀는 내 시선이 못내 부담스럽다는 듯이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다만, 별로 친한 녀석이 아니라서...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요. 한번 부탁은 해볼 수 있는 거잖아요."

혹시나 싶어서 연락해 본 거였는데 이렇게 튼튼한 동아줄이 하늘에서 내려올 줄이야! 나는 반가운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하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영은 깜짝 놀라더니 손을 빼내었다.

아차... 이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 살짝 어색해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에 그녀에게 몇 번 더 재촉했다. 그러자 하영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근데 말입니다. 한석 씨. 제가 알기로는 정식 교사도 아니고 이제 겨우 교생이라고 하면서 학생 하나에 너무 과도하게 신경 쓰시는 게 아닌가요? 학교에 연락도 취했으니 그만 돌아가 보셔도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뜨끔했다. 그녀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하아. 분명 하영 씨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녀의 지적은 너무도 정확해서 너무도 아팠다. 진심으로 아팠다. 선생으로서의 소명감이라든가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뭐, 그런 거창한 이유는 나에게 없었다.

내가 소란이 일에 이토록 몰두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나는 알아주지 못했다. 자기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미처 말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혼자 숨어서 울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고 알아차리지도 못 했다. 그게 미안하고 죄스럽고 한스러웠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거 하나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저는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는 분명 나에게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만에 하나 그 아이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저는 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꼭 눈으로 봐야겠어요. 그 아이의 무사함을...."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간신히 말을 마쳤다. 효진과 하영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영의 얼굴이야 원래부터 무표정 일색이라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늘 히죽거리던 효진까지 그런 표정을 짓고 날 보고 있으니 어쩐지 쑥스러웠다.

"아니,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미안해서...."

그러자 효진이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하영에게 말했다.

"언니. 저도 부탁 좀 할게요. 한석 군이 사람은 가볍고 바보 같아도 생각은 깊으니까요. 분명 잘못된 일을 하려는 건 아닐 거예요."

앞부분에 있는 나에 대한 평가가 좀 기분 나쁘기는 했지만, 격려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하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대전화를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전화로 누군가와 티격태격 하더니 전화를 끊고 차로 이동했다. 하영은 운전석에 앉으며 말했다.

"얘기를 해두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아는 녀석이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군요. 일이 잘 풀릴 것 같습니다."

우리를 태운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앞에 도착했다. 1층 접수처를 지나 2층 집중치료실로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올라가 복도 쪽으로 꺾어 들어가려는데 정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우리를 제지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긴 관계자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하영은 경찰관 한 명에게 담당 검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무전기를 꺼내어 어딘가를 호출했다. 그러자 복도 안쪽 방이 열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였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내가 저 여자를 어디서 봤더라....

미처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는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영심이가 나한테 연락을 다하고. 무슨 바람이 불은 거야?"

여자 목소리치고는 꽤 낮은 저음. 분명히 어디서 들어봤는데 어디였더라.

그나저나 영심이라니. 고개를 돌려 하영의 옆얼굴을 보았다. 입 꼬리 한쪽이 슬며시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에 호명된 그 만화캐릭터 이름은 아무래도 그녀를 지칭하는 모양이었다.

"꽃이 시들었나 안 시들었나 보러 왔지. 많이 시들었으면 물 좀 주려고."

"네 년 물은 필요 없거든? 영심이는 영심이 답게 경태나 찾아보시던가."

"나는 경태라도 찾으면 된다지만 너는 그것도 없잖아."

"뭐야?!"

안 그래도 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인데 거기다 으르렁거리기까지 하니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얼굴은 곱상하게 생겼는데 말이 험한 걸로 보아 검사가 아니라 주먹깨나 쓰는 그런 쪽 사람처럼 보였다. 아까 하영이 말하길 별로 친한 친구가 아니라고 하던데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보고 확실히 알았다.

이 여자야, 말을 하려면 똑바로 이야기해주어야지. 이건 별로 안 친한 게 아니라 사이가 안 좋은 거잖아! 하아. 이거... 이대로 부탁해도 되는 건가? 그런 고민이 시작되었다.

험한 말과 점잖은 독설이 오가던 두 사람은 어느새 전초전이 끝났는지 다른 이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네가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인데? 내가 이 사건 맡은 거 알고 전화한 거야?"

낮은 목소리의 여자가 묻자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단순히 부탁만 좀 하려고 했었어. 근데 송화, 너한테 전화했더니 니가 여기 있다잖아. 그때 알았어. 니가 이 사건 담당자라는 걸."

"흐음... 그래서, 아까 전화로 말한 대로 피해자들을 보고 싶다고?"

"응. 여기 이 분이 그 피해자 중 한 여자애의 선생님이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멀뚱히 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집에 있다 바로 나온 터라 꼴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되지만 그래도 없어 보이진 않으려고 노력했다. 허스키 보이스 여자는 날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까 종로서 후문에서 뵌 분 맞죠?"

"아아... 아, 맞다! 네. 그랬죠."

그렇구나. 아까 종로 경찰서 후문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던 나를 도와준 사람이었다. 젊은 여자가 경찰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검사였을 줄이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에 봐놓고도 못 알아보다니... 이런 머저리 최한석같으니라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 뭐..... 선생님이라고 하시니....."

인사를 받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하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사정은 아까 내가 말한 대로야. 다른 사람들 다 확인할 필요까지는 없고 피해자 중에 양소란이라고 하는 여고생이 있어. 그 아이 안위만 확인하게 해줘."

그러나 하영의 친구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좀 사태가 심각해. 성급하게 알려질 경우 파장이 커질 수도 있어. 아직 언론에 공표도 안 했어. 가이드라인도 못 정했고.... 내부방침상 말세교 핵심 멤버들 법정에 세울 때까지는 피해자들을 치료를 하고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야.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면회는 허가할 수 없어."

무거운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소란이가 있는 건 여기 병원에 있는 건 확실하죠?"

날 빤히 보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무사한가요?"

두 번째 질문에, 그녀는 끄덕거리던 고개를 멈추었다.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기만 해주면 안심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재촉하자 그녀는 겨우 입을 뗐다.

"그게 그러니까...."

"꺄아아아악-"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 복도 안쪽 어딘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우리와 약 이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영의 친구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그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터진 상황에 다들 우왕좌왕 하기에 나 역시 그쪽을 향해 뛰어갔다. 처음에 우리를 제지하던 경찰들은 막아서려 했지만,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날 잡으려는 손길을 피해 조금 전 간호사가 비명을 지른 방 앞으로 달려갔다.

마음속에서 불길한 마음이 꿈틀거렸다. 설마... 설마... 제발 아무 일도 아니길.....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병실 앞에 선 내 시선에 들어온 광경은 나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소...소란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소란의 표정을 감히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어떻게 넌 그러고 있으면서 웃을 수가 있니....

개자식들.... 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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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새로운 루트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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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뜰에 가시면 여태까지 연재된 루트를 그린 순서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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