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0 / 0471 ----------------------------------------------
Route 6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학생들을 뒤로 하고 교실을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려는데, 지애가 달려와 나를 제지했다. 복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한참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지애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면 괜찮아. 다들 실습을 한 번에 제대로 해내는 경우는 드물어. 이 정도 일탈은 있을 수 있어."
고개를 저었다. 결심은 이미 섰다. 지애는 굳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후회, 않겠어?"
이미 너무 많은 후회를 했기에 더 이상 할 후회가 없다고 대답했다. 소란이 때문이냐고 재차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싸늘한 표정이 되어 나를 놓아주었다. 뒤에서 그녀 목소리가 들렸다.
"교사 한 명이 모든 아이를 책임질 수는 없어. 고작 한 아이가 잘못되었다고 나머지 모든 아이를 저버린다면, 넌 선생 될 자격이 없는 거야."
그녀의 말이 맞다. 틀린 말은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고작 한 아이라니. 그건 너무 심하잖아. 너무 슬프잖아. 고작 한 아이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다른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그런 방식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내 스스로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인가.
교무실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교무주임을 만나 실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황망해하며 이유를 묻는 그에게 송 선생이 말해줄 거라고 답하고 학교를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운동장에서 태근이 형을 마주치고 말았다. 애들이랑 어울려 축구를 하고 있던 형은 수업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형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란에 대해 말하기도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주저하고 있었더니 형이 먼저 소란이의 이름을 꺼냈다. 그는 그 아이 때문이냐고 내게 물었다.
"어떻게 알아요?"
"지금 학교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어.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반쯤 미쳤다면서? 너네 반 맞지?"
"미친 게 아니라요... 하아. 걔는 피해자라구요."
"그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니가 왜 그만 둬?"
"그 아이가 거기에 끌려가기 전에 저한테만 그 교회의 수상한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구요. 그런데도 전 아무런...."
평소 같이 껄껄 웃으며 "어이구, 이 찌질아~" 하면서 한 대 쥐어박을 줄 알았는데, 형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날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팔짱까지 낀 형은 표정이 심각했다.
"그래서 그만 둔다?"
".....네."
"너한테 내가 이야기한 거 있지? 선생 하려고 집안 반대까지 무릅쓰며 애쓰는 사람이 있다고."
"형 이야기잖아요."
"그래. 난 그거 하겠다고 진짜 존나 애쓰고 있거든? 경력에 흠집 내려는 년 훅 보내버리기까지 하면서?"
은애 이야기인가. 그녀에게 생각이 미치자 더 우울해졌다. 형의 말은 이어졌다.
"근데 넌 이제 일주일만 버티면 되는 걸 내버리고 내빼겠다고? 정말로, 정말로 후회 안할 자신 있어?"
"후회 안 해요."
"하아. 넌 좀 더 강단 있는 놈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봤나 보다. 알았어. 빨리 꺼져버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손을 내저었다. 등을 돌린 형에게 더 할 말은 없었다.
발걸음을 대학교 쪽으로 향했다. 과사에 들러 휴학계를 냈다.
ROSE에 가서 노트북을 돌려주었다. 유미도, 선영도 보이지 않았다. 면식이 있는 웨이터 한 명에게 노트북과 쪽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분간 일을 돕지 못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글을 남겼다.
그대로 집에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갈아입을 옷과 예전에 사두었던 침낭 꾸러미 하나가 전부였다. 짐을 거의 다 쌀 때쯤 효진이가 들어왔다. 그녀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디 가게?"
"음... 뭐. 조금 머리를 식힐까 하고. 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오빠가 전화했어. 그나저나 하영이 언니한테 수임료 주기로 했다면서? 그거 안 주고 어딜 튀려고?"
"음... 조금만 나중에 주겠다고 하면 안 되나? 후불제 같은 건?"
"어림없어. 언니가 얼마나 수전노인데. 선불 받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아."
그 여자, 생긴 것처럼 노는구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면 니가 대신 좀 내줘. 나중에 갚을게."
"나한테 빌리면 나중에 이자가 쎈데?"
"사채 이자라도 갚을 테니까 염려 마라. 절대로 안 떼어먹어."
그러자 효진이 두 팔을 번쩍 내밀었다.
"사채 쓰면 선이자라고 있는데 혹시 한석 군은 들어봤나 모르겠네?"
"그게 뭔데?"
"돈 빌리기 전에 이자를 먼저 내는 거야."
"미친....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디 있긴? 빌려주는 사람 마음이지."
둘러메던 배낭을 내려놓았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서 너한테 빌린다고 했잖아. 그런 내가 돈이 어디 있냐? 통장에 조금 있기는 한데..."
"고전적인 방법이 있지. 돈 없으면 몸으로 때워."
손짓에 따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효진의 앞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내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효진은 내 팬티를 마저 내리더니 축 늘어져 있는 내 자지를 어루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어여쁜 애를 데리고 얼마나 멀리 가려고?"
"몰라. 그냥 당분간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학교에 휴학계도 이미 냈어."
"그럼 1년이나?"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추워지기 전에는 돌아올게."
그러자 효진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그녀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꼭 돌아와. 알았지?"
대답 대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대로 침대로 기어 올라가 둘이 한바탕 엉켰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효진의 착실한 서비스를 받은 자지는 기운 없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빳빳하게 단단해졌다. 다리를 벌리고 내 자지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효진은 내 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랑 같이 지혜 만나러 가기로 했잖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와. 같이 가자."
효진이 통 놓아주지 않기에 밤이 되어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배웅하러 나온 효진은 칭얼거리듯이 말했다.
"기왕 시간 이렇게 된 거 한숨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안 되는 거야? 무슨 애가 이렇게 막무가내니?"
"너랑 있으면 나까지 마음이 해이해져 버려."
효진이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그녀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해이한 게 뭐가 어때서? 차라리 내가 낫다. 한석 군은 너무 극단적이라서 탈이야. 평소에는 누구보다 헤벌레하고 느슨하면서 이럴 때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세?"
그러나 내가 목격한 비극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 그녀는 소란이 이름을 일절 꺼내지도 않았고, 내가 길을 떠나는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저 조심히 다녀오고 한 번 씩은 연락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효진이 주소를 물어 수첩에 적어두었다. 자취방의 열쇠는 그녀에게 맡겼다. 여전히 불이 꺼져 있고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앞집을 한 번 쳐다보고 이내 몸을 돌렸다.
그 날 밤, 청량리에서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싣고 정동진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동해의 일출을 보고 나서 설악산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백두대간을 타고 종주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행에 익숙하지 않아 한참 애먹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 뒷산에 종종 올라가 놀곤 했는데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서울에 올라와 살기 시작한 이래 등산이라고는 공대 뒤쪽 언덕 올라간 게 다였으니 말 다했다.
남들 하루 걸리는 길을 이틀 걸리기도 하고 이정표를 놓쳐 산속을 한참 헤매기도 했다. 간신히 길과 방향을 잡아 남쪽으로 내려와 산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이곳저곳을 유랑했다.
잠은 주로 침낭을 들고 절이나 학교 같은 곳에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절에서 절밥을 얻어먹거나 가지고 있는 돈을 가늠해가며 식사를 적당히 사 먹었다.
지리산 기슭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가지고 온 돈이 다 떨어졌다. 어쩔까 하다가 꽤 큰 염소농장 하나가 보여서 무작정 들어가 사정을 말했다. 제일 젊은 사람이 오십 대 아저씨인 그곳은 젊은 일꾼을 굉장히 환영하고 아주아주 아낌없이 부려 먹어 주었다. 며칠 동안 염소 똥을 치우고 꼴을 베어왔다. 오랜만에 해보는 시골 일에 몸이 저절로 축나는 느낌이 들었다.
약정한 기일동안 일을 다 하고 나니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도 했는데 이 정도라니 무척 감사했다. 서울로 돌아갈 여비를 하고도 충분히 남았다. 감사를 표하고 농장을 나와 계획대로 천왕봉을 올랐다.
천왕봉까지는 단번에 오를 수 없었다. 정상 근처에 있는 장터목 대피소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웅성거리를 사람들 사이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자정이 넘도록 소주 타령하는 아저씨들 사이라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띠띠띠띠-"
손에 찬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얼른 껐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대피소에 늘어져 자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일어나 자기 침낭이나 모포를 개며 등반을 서두르고 있었다.
장터목 대피소의 아침은 생각보다 꽤 일렀다. 아직 네 시도 안 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나 있었다. 모포 반납을 하는 줄에 서서 모포를 반납하고 대피소를 나섰다. 먹먹한 어둠이 사위를 감쌌다. 어두워서 제대로 걸어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손전등과 헤드업 라이트를 달고 걸어가기에 그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따로 조명이 필요 없었다.
어젯밤 듣기로 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한 시간 거리라고 했는데, 웬 걸. 이게 어딜 봐서 한 시간 거리냐, 한 시간 거리는. 걸음마를 뗀 지가 언젠데 다시 네 발 걷기로 퇴화하여 기다시피 하여 올라가야 했다.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천왕봉에 도착했을 때는 다섯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길이 험하기도 하고 바람도 많이 불었지만, 무엇보다 쑥쑥 걸어 올라가는 아줌마들에게도 추월당하는 걸로 보아 내가 산을 아직 잘 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백두대간을 따라 오며 나름대로 산을 탔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누군가 외쳤다.
"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밝아지고 있기는 한데 어디서 해가 뜨는 건지 한 번에 찾지 못했다.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지난주에 동해에서 보았던 일출과는 달랐다. 동해에서의 일출은 붉게 타오르는 바다에서 별안간 불쑥 튀어나온다는 느낌이었는데, 여기서는 떴는지 어쨌는지도 모를 정도로 뿌연 안개 속에서 간신히 비집고 나오는 해의 끄트머리를 본 듯 만 듯한 기분이었다.
옆에 있던 어떤 이가 실망을 하며 궁시렁거리자 동행으로 보이는 이가 말하길 천왕봉에서 깨끗한 일출을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넘겨 들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와도 못 보겠군.'
단 한 명의 아이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그런 나에게 천왕봉은 결코 일출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