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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대피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일출 시간에 맞추어 오른 천왕봉은 그렇게까지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차이가 제법 있는 듯싶었다.
하산을 서둘렀지만, 지리산 터미널까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후였다. 혹시 아직 버스가 남아있을까 싶어 터미널에 가보았지만, 이미 매표창구가 닫혀 있었다. 침낭을 가지고 대합실에서라도 잘까하다가, 요 며칠 농장에서 뜨끈한 온돌에서 잘 잤던 터라 그렇게 자고 싶었다.
지갑도 두둑하겠다 싶어 잘 곳을 찾았다. 터미널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여인숙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동네에서 모텔은 고사하고, 여관도 찾기 어려웠다.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가니 검버섯이 성성한 노파가 날 맞이했다.
"어서 오슈."
"방 있습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은근한 말투를 던졌다.
"혼자유?"
"그런데요?"
"색시라도 하나 넣어줄까?"
아예 대놓고 물어보니 오히려 이쪽이 당황스럽다.
"아뇨. 괜찮습니다."
"에헤이. 빼지 말고. 5만 원이면 참한 애로 불러줄 수 있는디."
"아뇨. 정말로 괜찮아요. 잠만 자고 바로 올라갈 거예요. 여기서 서울 가는 첫차가 몇 시죠?"
"그걸 내가 어찌 아누."
노파는 툴툴거리며 손바닥만 한 TV화면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여인숙 주인이 버스 시간을 어찌 모르겠냐 싶었지만, 아무래도 아가씨 안 부른다고 하니 골이 난 모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가씨 하나를 불러서 5만 원을 내면 그중 얼마는 노파 앞으로 떨어지는 모양이지. 지갑에 그만한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별로 생각이 없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나 방으로 향했다.
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나왔다. 방에는 전화가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랐나. 신발을 꿰어 신고 터미널 앞 다방거리 쪽으로 가니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에 든 잔돈의 개수를 가늠해보고 수화기를 들었다. 다행히도 백 원짜리가 제법 있었다.
달카닥-
신호가 가고, 상대방이 수화기를 드는 동시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농장에서 일할 때나 혼자 여행할 때 말할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본격적인 대화를 하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아, 여보...세요?"
"아저씨!"
이쪽은 겨우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수화기 너머에서는 말의 폭풍우가 밀려온다.
"대체 어디에요? 아니, 일단, 밥은 먹고 있어요? 잠은 어디서 자고요? 돈은 충분해요? 설마 이상한 생각 갖고 혼자 절벽 같은데 가고 그런 건 아니죠? 아니지. 정말 혼자 여행 간 거 맞아요? 혹시 그 쌍둥이 여자들이랑 같이 있다거나..."
"아아, 유진아. 나도 말 좀 하자."
그제야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겨우 내가 말할 시간을 얻었다.
"그래, 잘 지냈어?"
"그야, 뭐. 당연히요."
조금 볼멘소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착실히 대답을 하는 걸로 보아 그동안 연락도 없던 것에 대한 화는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들 잘 계시고?"
"엄마는 여전하고... 선영이 언니는 뭐... 좀...."
"선영이가 왜?"
"....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지지난주... 그러니까 소란이가 뉴스에 나온 날이요."
"아아....그랬어?"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소란의 이름을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게다가 선영의 부친상이라니..... 난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옆을 지켜주지도 못 했다.
그날 새벽, 갑자기 내게 전화했던 선영이 떠올랐다. 그녀의 전화는 아마 이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 자기 부친이 위독함을 전해 듣고 가던 길이었던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 유진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랑 엄마랑 그리고 가게 언니들이랑... 전부 다녀왔구요, 그래서 저도 학교에 좀 빠졌고.... 그래서 소란이 얘기랑 아저씨 얘기를 나중에 들었어요. 아저씨 집에 전화했더니 받지도 않고...."
"그래. 소란이는 좀 어때?"
".....회복실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직 치료가 많이 필요하대요. 저도 아직 면회는 못해보고 이야기만 전해들었어요."
"그랬구나....."
유진이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좀 좋아질까 싶었는데 소란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우울해졌다. 애써 이야기를 돌려보았다. 유미가 어찌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엄마는 요즘도 장부 붙들고 집에 와서 끙끙거리고 있어요. 원래는 선영이 언니가 하던 걸 아저씨가 하고 있었다면서요? 선영이 언니는 장례식 끝나고 또 어디론가 가버렸구요. 아저씨나 선영이 언니가 엄마 두고 도망갔다고 자기도 꼭 도망가겠다고 벼르고 있어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죄송하다고 전해줘. 내일 서울에 올라갈 거야. 올라가면 보자."
"피이. 아저씨 보고 싶다는 사람이 서울에 있어요?"
"하하. 그런가? 알았어. 넌 안 보고 싶다 이거지? 그러면 로즈에만 인사드리러 가야겠다."
"아, 진짜. 뭐예요?"
툴툴거리는 유진에게 만날 약속을 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숨을 골랐다. 소란이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날 괴롭히고 있지만, 이겨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떠나온 여행길이 아닌가. 심호흡을 한 다음,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오오! 한석 군!"
경쾌한 목소리가 날 반겼다. 하하. 이 녀석은 정말이지... 한결같네.
"지금 어디야? 전에 엽서 보낸 게 지리산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아직 거기야?"
"응. 오늘 내려와서 지금 터미널이야. 내일 버스 타고 다른 곳으로 갈까 싶어. 아니면 서울로 올라가던가."
"하아. 정말 백두대간 종주를 하셨군요. 나 심심하니까 서울로 와라. 그만 돌아다니고."
"아니, 뭐... 종주까지는 아니고 중간 중간 내려와서 버스도 타고 다른 곳도 가고 그랬어. 걷기만 해서 종주 했으면 이 정도 시간 가지고는 어림도 없거든."
규모가 좀 큰 절에 묵을 때나 산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있으면 효진에게 엽서를 하나씩 써서 보내곤 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나의 출발을 배웅했던 그녀였기에 여행의 보고는 필수라고 생각했다. 효진은 내가 보고 싶어졌다면 칭얼거렸다.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보고 싶다고?"
"그래. 너 없는 동안 지혜 침대에서 내가 얼마나 쓸쓸하게 잠들었는지 알아?"
"하하. 자기 집 두고 왜 남의 집에 가서 자는데?"
"몰라. 그러니까 빨리 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전이 떨어졌다. 휴대전화로 전화를 건 거라서 동전이 좀 빨리 떨어졌다.
"어? 공중전화야?"
"응. 여기 터미널 앞에 있는...."
"그럼 어디 근처에 카페 같은 거 없어? 내가 전화를 걸도록 할게."
"뭔 이야기를 그리 많이 하시려고?"
"왜, 내가 한석 군 목소리 듣고 싶어 하면 안 돼?"
"돼."
우리 둘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별거 아닌 이야기지만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 내 목소리를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마웠다. 전화박스에서 고개를 빼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페는 어림없고.. 다방은 있다. 별빛다방."
"이름 한번 참.... 그래도 한 번 가봐. 거기서 전화 좀 쓰겠다고 해. 내가 걸 테니까."
"이런 시골 다방이면 커피만 파는 데가 아닐 텐데, 괜찮겠어?"
"뭐, 우리가 그런 거 신경 쓰는 사이였어? 얼른 가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천둥 같다."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길을 건너 푸른 색 플라스틱 간판에 불을 밝힌 다방으로 들어갔다. 문에 매달린 종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님의 입장을 알렸다.
"어서 오세요~"
이제 갓 스무 살 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 아가씨, 아니, 아가씨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린 녀석이 튀어나왔다. 스무 살이 뭐냐. 유진이나 소란이 또래 같았다.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입고 있는 차림이나 입에 바른 빨간 립스틱의 흔적은 여지없이 "나 다방레지요."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못내 씁쓸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 혹시 전화 좀 쓸 수 있나요?"
"어머, 여긴 다방이지 전화국이 아닌데요."
능숙하게 받아넘기는 걸로 보아 물장사 한두 해 한 솜씨는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곤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전화를 걸게 아니라 받을 거라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카운터에 있는 마담과 쑥덕거리며 뭔가 이야기하더니 무선 전화기를 들고 왔다.
"이건 2번선이라 전화 올 일이 별로 없거든요. 빌려드리긴 하는데...."
"하는데?"
"저도 커피 한 잔 사주시면 빌려드릴게요."
내 그럴 줄 알았다. 동전 몇 백 원이면 끝났을 통화가 다방 커피 두 잔 값으로 폭증하고 말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러라고 대답했고 전화기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효진에게 전화를 걸어 여기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다시 걸려왔다.
"별빛다방 들어간 거야?"
"그래, 인마. 너 덕분에 커피 두 잔 값이 나가게 생겼잖아. 물어내."
"크크큭. 너 나한테 빚진 거 벌써 잊었어? 억울하면 거기서 커피 값 까줄게."
"크악. 이런 샤일록 같은 녀석을 보았나."
"샤일록이면... 그 베니스의 상인? 살 떼어 달라던?"
"그래, 인마. 악덕고리대금업자."
"푸하하하. 그럼... 음... 나는 살 대신 뭘 받아갈까. 단백질로 된 뭐, 그런 거?"
"아, 진짜."
우리 두 사람은 정말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히히덕거렸다. 이 녀석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난 원래 남자들이랑 대화하면서도 성적인 농담은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효진이랑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런 게 술술 나왔다. 상대가 워낙 아저씨 같아야 말이지....
"아, 그런데 왜 한 잔이 아니고 두 잔이야? 누구 있어?"
"응. 전화 빌리는 조건으로 여기 일하는 아가씨도 한 잔 사주기로 했어."
마침 예의 그 레지가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받쳐 들고 내 자리로 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옆자리에 바짝 다가앉더니 내 앞과 자기 앞에 커피 잔을 세팅했다.
"지금 내 옆에 앉았다. 아주 귀여운 아가씨야."
"얼... 한석 군은 정말이지 어딜 가나 여자가 꼬인다니까.... 너 이번에 산행하면서도 여자 많이 꼬셨지?"
"인마, 산에서 본 여자라고는 비구니 스님이랑 아줌마들밖에 없었어."
"어, 뭐야. 이젠 연상도 가리지 않는 거야? 폭이 넓은데?"
"아니라니깐."
레지가 내민 커피 잔을 한 모금 마셔보았다. 시골 노인네들이 딱 좋아할 정도로 달달하게 타진 커피는 어쩐지 그리운 맛이 났다. 아마도 내가 커피를 처음 마시게 된 국민학교 때 이렇게 타서 마시지 않았을까 싶었다. 효진은 여자 이야기를 더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올라오면 오빠가 한 번 보재."
"태근이 형이?"
"응. 그때 너한테 잠깐 욱해서 싫은 소리 했었다고... 지금은 널 이해할 수 있겠다고 하더라. 사과도 할 겸 한 잔 사주겠대."
"뭐... 형이 나한테 그렇게 심한 소리 한 것도 아닌데 그럴 것까지야... 그리고 형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런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럼 다행이고..."
"응."
이야기가 잠시 끊어졌다. 두 사람 다 묘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비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여태 궁금하던 걸 물어보았다. 늘 엽서를 띄워 내 이야기만 하다가 굳이 전화를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저기, 송화 씨나 하영 씨한테서 무슨 이야기 없어?"
"무슨?"
"그 교회 말이야."
"아아. 그거 말이지....."
중간 중간 신문이나 주간지를 살펴보고 있었지만, 어찌 된 요량인지 어떤 기사에서도 말세 어쩌구 하는 그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만한 난리를 치고 엄청난 피해자를 낸 사건이면 분명 후속보도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내 질문을 받은 효진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송화 언니 말로는.... 윗선에서 뭔가 오더가 떨어졌대. 교회 관계자들은 거의 다 풀려났고 약을 한 신도들만 따로 모아서 약품관리법 위반인가 뭔가로 처벌하기로...."
"뭐라고?!"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풀려나고, 누가 벌을 받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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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화 댓글에서 향향공주님이 "그래, 청학동에나 가서 훈장이라도 해라..."라고 써놓은 거 보고 미친듯이 웃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