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25화 (425/471)

0425 / 0471 ----------------------------------------------

Route 6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저, 저기.... 대체 언제부터 들어와 계신 거죠?"

메이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약 10분 전쯤 들어와 커튼을 걷은 다음부터 일어나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뒤를 돌아보지 않으시기에 그냥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정말 별 일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러면 아까 일어나서 내가 효진이에게 하고 있던 행동을 낱낱이 보고 있었단 말 아닌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래요? 누가 깨우라던가요?"

효진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인마! 너 지금 알몸이라고....! 그러나 효진은 전혀 꺼릴 게 없다는 듯이 나를 지나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선미 역시 효진이 알몸으로 일어나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미리 손에 들고 있던 실크 가운을 효진에게 걸쳐주었다. 그리고 허리 쪽에 걸린 벨트를 매주었다. 효진은 선미가 옷을 입혀주고, 또 벨트까지 매주는 게 상당히 익숙한 듯 몸을 자연스럽게 내맡겼다.

자연스럽게 몸을 내맡기는 효진을 보면서 문득 예전에 효진이 내 방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던 장면을 떠올렸다. 효진이 자기 알몸을 남에게 내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걸까.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침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시더군요. 도련님도 곧 내려오십니다."

회장님? 도련님? 대화 맥락상 그녀가 말한 회장님은 효진의 아버지이고, 도련님은 태근이 형을 가리킨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곰처럼 생긴 형이 "도련님"이라고 불리고 있다니.... 으으. 적응이 안 된다.

"그래요? 아버지가 어쩐 일이지? 어제 출국하신 거 아니었어요?"

"협회에 내빈이 오신다고 연락이 뒤늦게 가서.... 오늘 새벽에 귀국하셨습니다."

"아빠도 참... 쓸데없는 걸로 고생이네. 돈도 안 된다고 불평하고 계시겠군요."

"네. 그러고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서던 효진은 그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날 돌아보며 말했다.

"한석 군. 거기서 뭐해? 밥 먹으러 안 가?"

"아니, 그게... 저...."

효진과 마찬가지로 알몸이었던 나는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어젯밤, 효진과 몸을 섞기 전 벗어 던진 옷들은 어찌 된 요량인지 보이지 않았고 여기서 내가 입을 거라고 해보아야 저기 선미라는 여자가 들고 있는 푸른 색 가운인 것 같은데.... 이런 내 모습을 보며 효진이가 재촉했다.

"이불을 둘러쓰고 식탁에 앉을 셈이야? 얼른 나와."

"그...그게...옷이..."

"옷? 선미 씨가 들고 있잖아. 나오면 알아서 입혀줄 거야."

"내가 직접 입으면 안 될까?"

"어?"

효진은 그제야 뭐가 문제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선미에게 옷을 자신에게 건네주고 나가라고 했다. 선미는 지시를 따랐다. 효진은 침대로 다가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야. 선미 씨 앞에서 알몸으로 나서는 게 부끄러워서 그랬어? 어휴, 귀여워라."

"얌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모르는 사람 앞에서 훌렁훌렁 벗고... 막 그래?"

"그럼, 내 앞에서는 괜찮다 이거지? 나와봐. 내가 걸쳐줄게."

"이런 것까지 남의 손에 맡기는 거야? 설마 양치질도 시켜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효진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넌 양치질을 직접 한단 말야? 어떻게 사람이 그런...."

"뭐! 정말?"

그러자 효진이 배를 잡고 웃었다.

"크크크큭. 역시 한석 군은 놀리는 맛이 있어서 좋아.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양치질은 직접 하지."

"그...그렇지?"

"목욕할 때 등 미는 거라면 부탁하겠지만, 말이야. 목욕탕에 상주하고 있는 언니들이 있으니."

"그거야 뭐..... 그렇겠군."

효진의 손에서 뺏듯이 가운을 가져와 몸에 걸치고 그녀를 따라 방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목욕탕에 상주하고 있는 언니들이라니... 대체 이 집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궁금했다. 하긴, 어제 효진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맞이한 메이드만 해도 수십 명은 족히 되어보였다. 누군가는 수발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부엌이나 거실을 담당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욕실에서 씻는 것만 담당하고 있는 메이드가 있다고 해도 특별히 이상할 게 없었다....

설마 태근이 형도 저 메이드들이 옷을 입혀주고 목욕할 때 등을 밀어주고 그런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형이 목욕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발가벗은 형이 목욕탕에 앉아있으면 저 검은 옷을 입고 앞치마를 두른 메이드가 등을 밀어주는 모습 말이다.

으으... 어쩐지 형이라면 그런 장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등판이 넓으니 한 명이 했다가는 손이 모자랄 테고 최소 두 명이나 많게는 세 명 정도 달라붙어서 구역을 정해 나누어 닦지 않을까 싶은데.... 마치 대형차 손세차 하듯이 말이다.

게다가 욕실이라니. 물에 젖을 것 아닌가. 그러면 저 치렁치렁한 치마와 앞치마로는 곤란할 테고 정말 욕실용 유니폼이 따로 있는 건가. 그렇다면 수영복 같은 모양의 앞치마라던가.... 그러다 과연 씻기만 할 것인가....

내 터무니없는 망상은 식당에 이르고 나서야 멈추었다. 열 명이 앉아도 너끈할 정도로 기다란 식탁의 끝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난 지금 엄청 뻘쭘한 시간과 위치에 있는 거구나! 중년 남자는 내 쪽을 힐끔 보고 말했다.

"늦었구나. 앉아라."

효진은 나를 두고 먼저 앞서 자리에 가 앉았다.

"새벽에 돌아오셨다면서요, 아빠?"

"으음. 그렇게 되었다."

"엄마는 어쩌고요?"

"자기는 계획대로 온천을 즐기겠다며 안 따라오더군. 그러라고 했다."

"아빠는 아무튼... 에휴. 말을 말아요."

효진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꽤 젊어 보였다. 태근이 형과 효진의 나이를 가늠해 볼 때 적어도 50대에서 60대 정도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관리를 잘 받아서 그런지 최소 얼굴만 놓고 본다면 40대 초중반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꽤 미남이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짝 주름 진 눈매나 뚜렷한 이목구비에서 뿜어지는 중후한 매력이 있었다. 태근이 형은 정말 안타깝겠구나. 왜 저런 아버지를 두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닮지 않아서 그 모양일까.

"어이, 안 앉고 뭐해?"

"아, 형.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그래. 아, 아버지. 오셨군요."

조금 전까지 나의 측은지심을 받고 있던 태근이 형이 나타나 식탁 끝 쪽으로 걸어갔다. 태근이 형의 아버지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한석이라고...."

"선미 씨. 식사 준비하지."

"네."

허리를 숙인 채로 생각했다. 대체 어느 타이밍에 허리를 바로 펴고 자리로 가서 앉아야 할까. 정말정말 궁금했다. 누가 안 알려주나? 대체 어느 타이밍에 그리해야 인사가 무시당한 뻘쭘함을 조금이나마 상쇄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효진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한석 군이 인사하잖아. 왜 그래?"

"굳이 내가 답인사라도 해야 되는 정도의 사람이냐?"

"아니, 뭐, 그야...."

"그럼 됐다."

효진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데리고 가 자기 옆에 앉혔다. 그리고 속삭였다.

"우리 아빠는 돈 되는 일 아니면 절대 안 하는 사람이야. 인사도 그렇지. 자기한테 돈을 주거나 벌어다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서 넙죽 엎드려 발가락이라도 핥을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쳐다도 안 봐."

.....속삭이는 것치고는 너무 크지 않을까? 옆자리의 네 아버지나 맞은편의 태근이 형은 물론 지금 카트에 음식을 실어 나르고 있는 메이드들에게도 다 들릴만한 정도의 크기인데?

그러나 효진의 아버지는 이런 소리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당신의 딸이 나와 어젯밤 대체 무엇을 하며 보냈는가는, 아침에 같은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고도 남을 텐데 그런 것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내 쪽으로 딱히 눈길을 주지도 않았고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렇게 체할 것 같은 식사가 죽 이어졌다.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은 정말 맛있어 보이는 것 잔뜩이었는데도, 맛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어색한 식사를 마치고, 후식이 준비되는 동안 박 회장은 딸에게 말을 걸었다.

"패러독스 그룹에서 연락이 왔다. 둘째 아들 진광이가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한다던데, 어떻게 된 거냐. 둘이 잘 되고 있던 거 아니었냐?"

효진은 대답 대신 커피를 마셨다. 패러독스 그룹?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아, 취업준비실 앞에서 공고가 붙었다 하면 다들 취업원서 쓰느라 난리도 아니었던 대기업 이름인 거 같은데.... 그렇다면 거기 둘째 아들이라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진광? 이것 역시 들어본 이름이었다. 내가 대체 어디서 들었더라.... 효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박 회장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애비가 묻잖냐."

그의 질책은 낮으면서도 힘이 있었다. 그러자 효진은 갖은 인상을 찌푸리며 두 팔을 쭉 뻗었다.

"에휴우. 아니, 무슨 사내새끼가 그렇게 패기가 없어? 내가 앞에서 그만한 쪽을 줬으면 곱게 물러났어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보고 싶거나 그러면 찾아오거나 직접 연락할 것이지 어떻게 제삼자를 통해 메시지를 넣냐구요. 아, 난 그 자식에게 정 떨어져서 더는 싫어요."

"앞에서 쪽을 줬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자 효진은 내 팔을 확 끌어당겨 가슴에 품었다. 엉겁결에 그녀 쪽으로 몸이 확 기울어졌다.

"진광 씨 앞에서요, 똑바로 이야기했어요. 전 이미 이 남자에게 몸도 마음도 다 빼앗겼다고. 그랬더니 순순히 물러나던데요?"

........으악! 생각났다! 그때 갑자기 하영이 나타나 퇴근하는 날 납치해서 고급 음식점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효진 앞에서 난데없는 연인 연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설마, 그게 그 사람 이야기였냐? 뿐만 아니라, 효진, 너 지금 니 아버지 앞에서 나 가지고 무슨 짓을 하는 거야?

──────────────────────────

*

태근이를 담당하는 메이드는 여섯 명, 효진은 네 명입니다.

청소와 식단 관리, 옷 입혀주기와 목욕 시중 등 일상생활 서포트와 밤시중이 주요 업무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어 태근이가 저택에서 메이드와 함께 보내는 일상을 써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