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7 / 0471 ----------------------------------------------
Route 6
웃음이 나왔다. 끝나는 시간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이런 문자를 굳이 보내는 까닭은 재촉의 일환이겠지. 피식거리며 "곧"이라고 답장을 보내놓고 전화를 도로 넣었다. 고개를 들자 유진의 표정이 몹시 언짢아 보였다.
"과외 시간에는 좀 끄면 안 돼요? 드르륵 하는 진동소리 때문에 공부에 집중이 안 되잖아요. 집중이."
"음. 다음부터는 고려해볼게. 근데 아예 꺼버리면 여자 친구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할 것 같아서 좀 곤란한데..."
언짢은 정도였던 유진이 표정이 확 돌변하여 한층 더 사나워졌다. 이 녀석 표정이 내 대답 여하에 따라 단숨에 변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재미있다. 요즘은 그 재미를 하나씩 깨닫고 있었다.
"여,자,친,구?"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무섭다기보다는 귀엽다고, 이 녀석아.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응. 효진이가 남자는 아니잖아? 그럼, 여자 친구 맞지."
"애인이라는 의미는 아니고요?"
"물론 그 의미도 포함이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하자 유진은 입을 딱 벌렸다. 그러더니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
"쳇! 됐어요.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요. 빨리 문제나 풀어주세요."
유진은 몹시 궁시렁거리며 문제집으로 고개를 숙였다. 설명하던 문제를 향해 펜을 다시 갖다 댔다. 전 같으면 유진의 이런 반응에 몹시 당황하고 쩔쩔매었겠지만, 이제는 좀 달랐다. 여유를 가지고 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의 행동 하나하나는 몹시 귀여운 편에 속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남자에 대한 앙탈이라고나 할까. 뭐, 아주 싫지는 않았다. 그게 솔직한 늑대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귀엽다고 그저 다 받아줄 수는 없었다.
유진이 항의할 때마다 어떤 건 받아주고, 또 어떤 건 적당히 선을 그으며 내 태도를 확실히 하니 녀석도 이제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먹힐까 싶었는데... 의외로 유진은 잘 받아들였다.
문제 설명을 끝내고 유진이가 풀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 이름이 문득 생각났다.
"선영이한테는... 연락 자주 와?"
그러자 유진은 입을 삐쭉이며 대답했다.
"쳇. 여친 있다면서요. 왜 딴 여자한테 관심 주죠?"
"물어보는 것도 안 돼?"
"......편지가 가끔 와요. 우리 안부에 대해서 묻고 주로 돌봄의 집 생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말아요. 딱히 다른 이야기는 없구요."
"그렇구나...."
"아, 얼마 전에 세례도 받았다고 했어요. 예비자 교육이 이제 막 끝났다면서.... 세례명은 스텔라라고 하더군요."
스텔라.... 무슨 뜻일까, 그런 이름은 뭔가 의미를 담거나 옛 성인의 이름을 따온다고 하던데... 문득 마리와 리사의 이름도 덩달아 생각났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다시 볼 일이 없는 이들이었기에 생각해보았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선영이는 정말 수녀가 될 생각인가?"
"모르겠어요. 자기도 아직 고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좀 더 기도해보고 답을 구하겠대요."
선영은 예전에 자기 아버지가 몸을 의탁했던 보호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말이 봉사활동이지 지금은 그녀의 삶, 그 자체가 되었다. 자신이 하던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거기에 입소하여 갈 곳 없는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봉사를 매일같이 하고 있다. 유진이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선영이 살던 집도 빼버렸고, 거기 있던 짐도 로즈 아가씨들에게 전부 나누어주었다고 했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근처까지 가봤다는 유진의 이야기에 따르면 선영이 있는 곳은 산속에 있는 조그만 가건물 몇 개에서 의욕 있는 수녀님들이 운영하고 있는 보호시설이라고 했다.
선영은 거기 틀어박혀 아예 서울에 올라오지도 않기에 그 후로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유진에게 주소를 물어 나도 편지를 한 통 보내보았다. 며칠 뒤, 평범한 편선지에 볼펜으로 차분하게 적힌 그녀의 답장이 도착했다.
발송인 주소에는 충남 어딘가의 주소와 함께 단체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성 바오로 돌봄의 집." 거친 종이 질과 모나미 153으로 적은 게 분명한 그 편지에는 선영의 은은한 향취가 묻어있었다.
편지에서 선영은, 어머니의 탈상을 치르면서 내게 받았던 많은 도움들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지금은 자기 길에 대하여 신께 기도하여 묻고 고민하는 중이라고 했다. 결코 순결하지 않은 삶을 살아 온 자신이지만 신께서 허락한다면 앞으로는 수도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나를 위해 언제나 기도하겠다는 그녀의 마지막 인사에서 애잔함을 느꼈지만, 그 이후로 또 편지를 보내진 않았다. 어쩐지 나의 편지는 그녀의 길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소란이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녀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말세교인가 지랄교인가에 들어가 있지만, 선영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효진과 하영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들려오는 그녀의 행동은 어머니라는 사람이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구역질나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끊임없이 주장한다. 성령에 귀의한 자기 딸을 교회로 돌려달라고..... 천하에 둘도 없는 악독한 짓을 자기 딸에게 저지른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옹호를 하는 측 최전방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와 선영을 대비해 보며 생각했다. 대체 종교가 뭘까. 그것은 무엇이기에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걸까.
물론 선영이 있는 곳이 종교적인 시설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온종일 너무 바빠 기도할 시간도, 교리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여 교리시험에 통과하기가 너무 힘들다던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었다. 처음에는 선영이 간 곳도 말세교 같이 사이비 종교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선영의 생활 태도를 들어보니 전혀 그런 의심을 품을 수 없었다.
종교도 종교지만 그녀는 결코 절대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귀의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기 길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도하며, 또 그러면서 행동을 통해 답을 구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소란의 엄마라는 사람은 재물을 바치고, 가족을 바치면서 종교 그 자체에 매몰되어 가고 있었다. 종로 바닥에서 우렁차게 외치던 그 미친 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말세의 그때에 오히려 불쌍한 너희들의 구원을 기도하겠다."
대체 누가 누굴 구원하겠다는 걸까.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도 벅찬 법인데..... 몹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 풀었어요."
"어, 그래. 어디 보자. 음... 맞았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예전에는 유진 혼자 공부하는 것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지만, 근래에는 유진이가 가져온 어려운 문제를 함께 푸는 것으로 과외 내용이 바뀌었다. 이쪽이 당연히 정상적인 과외 모습이지만 유진의 태도를 보면 가끔 의심이 들었다.
문제를 풀 때 몸을 너무 바짝 들이댄다거나 자기 사이즈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헐렁한 티셔츠를 입어서 속옷이 훤히 보이는 채로 상체를 숙이거나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행동이 너무 빤히 읽혀 가끔은 헛웃음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눈은 팔지 않고 제대로 문제에 맞는 답과 풀이를 해주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나갈 시간이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난 이제 가볼게."
"밥 같이 안 먹어요?"
"효진이가 기다릴 거야."
"쳇. 진짜.... 맘에 안 들어."
유진은 툴툴거리며 현관까지 날 배웅했다. 구두를 찾아 신고 있는데 등 뒤에서 유진이가 중얼거렸다.
"연상이라고 했죠? 한 살 연상."
"응. 그런데?"
"치이. 그럼 완전 아줌마잖아."
"아줌마라니.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정말 처녀겠어요?"
"뭐??"
신발을 다 신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몰라서 물어요? 그야 당연히..."
".....너랑 이런 종류의 대화는 나누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깜빡했어. 나 간다."
"안녕히 가지 마세요."
혀를 쑥 내미는 녀석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곤 현관을 나섰다.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지금 끝났다고 알리곤 약속장소인 종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전철을 타고 이동하면서도 문자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키패드를 눌러 문자를 주고받는 일에 익숙해지기 퍽 힘들었는데 요새는 꽤 요령이 붙어서 효진만큼이나 빠르고 긴 문장도 가끔 쳐내곤 했다. 덕분에 도착해서 만났을 때쯤에는 이미 많은 부분이 이야기되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녀가 혼자 나온 게 아니라는 것도 이미 전해 들었다.
효진은 하영과 함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하영 씨."
"잘 지내셨나요."
사무적인 어조에 담긴 인사를 들으며 카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효진은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손을 가만히 쥐었다. 하영은 서류철을 꺼내어 내밀었다.
"내일이 선고공판입니다. 공판이라지만 피의자 중에 미성년자가 있고, 민감한 사건이라 비공개로 진행됩니다. 이미 구형과 심리에서도 검찰 측과 이야기는 거의 다 맞추어 놓았습니다. 남은 건 요식행위 수준이구요. 3개월 이내의 형량과 집행유예를 받게 될 겁니다."
서류를 들여다봐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형량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형량이라뇨. 소란이는 잘못이 없는데요. 잘 풀려나게 해준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하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러니까 집행유예라고 했잖아요. 그런 것도 몰라요? 공돌이에게는 역시 다 설명해줘야 하는 건지 제가 깜짝했군요."
그저 법률용어 하나 잘 모른다고 이 땅의 일만이천 공돌이들까지 전부 일자무식으로 몰아버리는 저 대담함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뒤이어 나오는 집행유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
"그러니까 거의 무죄나 다름없다, 이 말이죠? 바로 풀려난다고요?"
"가능한 한 기소유예를 시키고자 애를 썼습니다만 그쪽도 그만한 사정이 있기에 기소를 안 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사람도 아닌 꽃송이한테 알랑방귀 뀌는 것도 참 못할 짓이다 싶어서 그 정도로 합의했습니다."
꽃송이라.... 하영은 그 검사를 한사코 이렇게 불렀다. 그러고 보니 그 채 검사인가 최 검사인가 하는 여자도 하영을 결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밖에도 전문 용여가 섞인 뭔가 모르는 이야기가 많이 오갔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이제 소란이에 대한 처리가 슬슬 끝나간다는 것.
"정말 고마워요. 하영 씨. 이 은혜는...."
뜨거운 마음을 담아 감사를 표하고 있었지만, 하영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돈으로 갚으시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