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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서 답하는 그녀를 보고 조금 전까지 모락모락 피어나던 고마움이 쑥 들어갔다. 내가 대답이 없자 하영은 고개를 까닥였다. 몹시 건방진 각도였다.
"..........안 내실 생각이었어요?"
난감한 표정으로 효진을 돌아보다가 피식거리고 있는 입가 표정을 확인하고 깨달았다. 바로 그때 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농담입니다. 유머센스가 참 부족하시네요."
이봐! 유머 센스 어쩌고 하기 전에 당신의 그 딱딱한 말투부터 어떻게 해보고 하라고! ..... 라고 외치는 대신 그냥 실없이 웃으며 넘겼다.
하영은 재판이 끝난 후 소란이가 가게 될 요양시설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일부 사법 관계자만 알고, 극비라고 했다. 아버지와 남은 가족들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친엄마가 딸을 데려다가 이상한 곳에 넘기려고 애쓰는 상황이니 아무도 모를 곳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 아이는 아직까지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언제 일상으로 복귀하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착한 사람들이 몰래 숨어 살고, 나쁜 사람들은 세상을 활개치며 다니겠군요."
커피잔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하영과 효진은 잠자코 있었다.
"정말, 신은 없는 걸까요. 하나님이 정말로 있다면 그런 나쁜 짓 하는 놈들에게 벼락 내려주고, 착한 사람들이 아프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나님은..."
하영이 찻숟가락을 들어 자기 잔을 저었다.
"해결사가 아닙니다. 판사도 아니고, 경찰은 더더욱 아닙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 세계의 일부인 인간사에 일일이 개입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에게 부당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오판이에요."
눈을 가늘게 뜨고 하영을 바라보았다.
"하영 씨도 교회 다니는 분이군요."
그러자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교회를 다닌다.....다닌다.... 그것만큼 영혼이 없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저 몸만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길바닥과 교회에 쏟아 부으면 그게 믿음인 줄로 착각하는 인간들이 참 많죠.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아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지."
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결론은,
".....그냥 교회 다닌다고 하시면 되지 참 어렵게 말씀하시네요."
"아, 쫌!"
하영은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일어선 채 말했다.
"제 친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꽁꽁 숨긴 여죄를 찾아 밝혀내고, 더 이상은 피해자가 없도록 밤낮으로 애쓰고 있어요. 저 역시 미력하나마 거기에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나중에 전부 최한석 씨에게 청구할 테니, 그리 아세요."
그녀의 친구가 누군지 떠올랐다. 백 퍼센트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 친구에게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를 방해하는 사람은 이만 물러갑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안경을 고쳐 쓰며 그녀는 나름의 유머를 남기고 돌아갔다. 효진과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씨익 웃다가 저녁식사를 위해 커피숍을 나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효진에게 물어보았다.
"뭐 먹을래? 한식, 일식, 양식."
"한식 말고 한석."
"거참, 어차피 나중에 먹을 후식 말고 본 식사 말야. 메인 디쉬."
효진은 까르르 웃으며 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전 같으면 내가 이럴 때 한석 군이 그냥 우이씨~ 이러고 어쩔 줄 몰라하고 막 그랬는데 이제는 그게 안 먹히네. 어쩐지 서글프다. 다 큰 자식을 보는 기분이야."
"어랍쇼. 그러면 네가 놀리는 거에 여전히 일일이 당황했으면 좋겠어?"
"그것도 그렇지만... 음.... 너무 잘 받아 넘기는 것도 어쩐지 한석 군 답지 않은데?"
"뭐야, 인마?"
우리 둘은 시시덕거리며 한석....이 아니라, 한식을 먹으러 갔다. 그렇다고 아주 고급 식당은 아니고 종로에서 사람들이 잘 가는 소박한 맛집이었다. 하도 유명한 집이라 생선구이 하나 먹는데 30분씩이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효진과 대화를 나누느라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식사 후에는 종로 거리를 쏘다니며 가게 구경도 하고 이런저런 데이트를 즐기다가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둘이서 한바탕 몸을 섞었다. 효진은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침대에서 남자 중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알몸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참 좋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침대 주인에게 맞춰졌다.
"그래서 지혜랑 연락이 되었다고?"
"응. 그렇지만 조금 서운한 게 있어. 예전 같으면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그럴텐데 이번에는 어쩐지 찾아오는 걸 꺼리는 느낌이야."
"그야 남편도 있고 하니까 불편해서 그러겠지. 이제는 처녀가 아니라, 유부녀잖아. 혼자 자취할 때랑 같겠어?"
"것두 그렇지만.... 흐음....."
효진은 뭔가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살짝 달래주었다.
"니가 지혜를 너무 좋아하니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냐? 막상 보면 또 좋아할 거야."
"그러려나?"
효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둘 사이에 있던 고등학교 시절 에피소드를 쏟아놓았다. 지혜를 쫓아다니며 왕가슴이라고 놀려대던 옆학교 남자애들를 효진이 쫓아버렸던 이야기부터 효진이 방에서 두 사람이 자다가 몸을 섞은 이야기까지.
큭큭거리며 듣다가 어느 순간, 우리 둘은 눈을 마주쳤다.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데 맞춰볼래?"
효진이 갑자기 꺼내는 말에, 이제는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지금 갈까?"
"그래, 가자!"
이제는 말하지 않고 눈빛으로 뜻이 통하는 사이가 된 것일까. 우리 둘은 각자 상대방 속옷을 찾아 던져주고 황급히 옷을 꿰어 입었다. 머리가 조금 뻗쳐 있지만, 그대로 집을 나섰다. 빌라 앞에 세워둔 효진의 차에 올라탔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효진은 액정 화면을 눌러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역시 좋은 차는 좋은 차구나... 싶었다. 이런 최첨단 시스템이라니.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걱정이 조금 들었다.
"너무 막무가내 아닐까?"
그러자 효진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며 대답했다.
"거 왜 있잖아. 남자들은 술 먹다가 자기 친구들 끌고 집에도 오고 막 그러잖아. 여자는 왜 그러면 안 돼?"
"그게 또 그렇게 되나. 그럼 우리도 일단 술 한잔 하고 들어갈까?"
"봐서."
곧 서울을 빠져나와 외곽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는 점점 올랐고, 라디오 DJ가 다음에 나올 곡의 제목을 말해주었다.
"비틀즈의 명곡을 장국영이 부릅니다. Twist & shout!"
인기절정 청춘스타. 장국영의 맑고 청명한 목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신 나는 음악 소리에 맞추어 효진이 환호성을 질렀다.
"예에! Well work it on out, honey!! 지혜야! 기다려! 언니가 간다!"
그러면서 내 쪽을 보며 외쳤다.
"오빠, 달려~!"
뭐..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다.
"난 너보다 연하인데?"
"......아, 진짜. 한석 군은 증말."
궁시렁거리는 효진과 눈을 마주쳤다. 와하고 웃어버리고 이내 나도 제창에 동참했다.
"Come on, come on, come on, come on, baby, now!"
안전운전을 위해 좀 자제하긴 했지만, 나 역시 들뜨긴 마찬가지였다.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도심을 벗어나 한참을 달렸다. 외곽지역으로 접어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마을의 한적한 주택가에 도착했다. 네비게이션이 골목길까지 아주 세세하게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복잡한 동네가 아니어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데 왜 진작 찾아오지 못했나 아쉬울 정도였다. 효진은 메모지를 들여다보며 주변 지번을 살폈다.
"번지수를 보건데, 저기가 맞을 것 같아."
내가 달려가서 대문 앞에 붙은 우편함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 단독주택 앞에서 찾던 이름을 발견했다. "양규호"라고 적혀있었다. 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다."
난 벌써 까맣게 잊고 있는데 효진은 지혜 남편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굳이 따지자면 "자기 여자"를 앗아간 놈이니 이름을 기억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집 앞에는 고급 중형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걸 보고 효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니, 뭔가 이상해서..."
"이상하다니. 뭐가?"
말은 자기가 꺼내놓고도 효진은 뭔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며 되려 물었다.
"그러게, 뭐가 이상하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아까는 대답 잘 해놓고...."
"이렇게 뜬금없는 질문은 아니었잖아. 그나저나 이렇게 그냥 와도 되나. 저기 동네 입구에 슈퍼 있던데 거기서 주스라도 사와야 되는 거 아닐까?"
무작정 쳐들어가기는 여전히 애매했다. 두 손도 비어있고.... 어쩔까 싶어서 주저하고 있는데 효진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탁 쳤다.
"아! 그래. 이제 생각났다. 음.... 내 기억이 맞다면 지혜 남편이 아마 K 자동차회사 영업사원인가 그랬거든. 나한테 명함도 준 기억이 나. 근데 이 차는 K회사 자동차가 아니잖아."
그게 어디가 어떠냐고 물어보려다가 나 역시 의아함을 느꼈다. 영업사원이 남의 회사 차를 타고 다닐 리는 없고.... 그 순간, 뭔가 불분명한 기억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형체도 갖추어지지 않은 기억인데도 뇌리에 떠오른 순간 몹시 불쾌한 기분이 온몸을 내리훑는 게 마치 전기가 찌릿하고 통하는 것 같았다.
이 차를, 나는 분명히 본 적 있었다.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이라도 온 건가?"
하고 중얼거리는 효진의 말에서 무언가 느꼈다. 아...아니, 이건 미친 생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을 수 있지? 말이 안 되잖아? 그러나 내 머릿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기억이라는 뱀은 서서히 몸을 풀고 어디론가 그 대가리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를 그곳은 어둡고 깊은 곳이었다.
약 1년 전, 그러니까 지혜를 두 번째로 만난 날 보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혜의 결혼식 말미에 찾아온 한 자동차. 거기서 내리던 놈의 모습...... 어떤 얼굴과 어떤 차의 조합이 머릿속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톱니바퀴 맞은편에는 작은 추가 있었다. 그 추에 물린 어떤 가설 하나가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미친 생각과 슬픈 예감은 불길한 소리로 비극적인 운율을 연주했다.
"한석 군.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
"응. 멀미라도 했어? 직접 운전하면서 멀미하는 건 좀 웃기잖아."
그러나 난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실없이 웃던 효진도 내 얼굴을 보고 뭔가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 안에 담긴 이 미친 생각을 한시라도 빨리 쏟아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효진아."
"응?"
"난 말야... 평상시에 생각 없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듣거든? 그리고 기억력도 별로 안 좋고... 그래서 어떤 일이 있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천천히 생각하고 오랫동안 곱씹어 보는 버릇이 있어."
그렇게, 그녀에게, 내가 품고 있는 어떤 가정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에도, 제발, 틀리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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