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29화 (42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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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그런데?"

"내가 처음에 지혜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했었지?"

"응. 소개팅하려다가 잘못되어서 만났다면서?"

"그리고 지혜가 그때 누굴 만나고 있는지도 들었지? 본인한테...."

"......그래. 무슨 직장 상사랑 불륜 중이었다고.....그런 이야기를 왜 지금....."

효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 머릿속에서 돌고 있는 이 미친 가설은, 그녀에게도 전염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 표정도 저렇게 일그러져 있겠지.

"나 말이야. 너한테 한 번도 이야기는 안 했지만, 사실은 그 상사를 직접 본 적이 있어. 술집이었지. 그놈은 지혜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했었어. 그래서 내가 그놈을 때려눕힌 다음, 지혜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떴었지. 그다음에 지혜는 그놈과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고 했었어. 그런데 그게 끝이 아냐. 나 말이야. 지혜 결혼식 날..... 이 차를 본 것 같아. 그리고 이 차에서 내리는 그 사람도....."

"뭐라고?!"

효진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황급히 그녀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는 확실하지 않았어. 길 건너편에서 언뜻 본 거였거든. 그래서 놈을 찾아보려고 결혼식장에 되돌아가기도 했어. 그러다가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네가 재촉해서 그냥 돌아왔지만..."

효진은 손톱을 깨물었다. 녀석이 초조한 표정을 짓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대체 모든 관계가 끝난 이놈이 지혜를 왜 찾아올까. 찾아왔다면 대체 무슨 이유일까. 게다가 지금은 여기에 왜 있을까..... 아, 아니.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지금 주저하는 거야. 괜히 엄한 생각인지 아닌지.... 그런데 그때 분명 춘천에서...."

효진은 내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급히 대문으로 달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띵똥- 띵똥- 띵똥- 급하게 여러 번 눌러도 대답이 없자 곧바로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혜야! 지혜야! 나야, 효진이! 문 열어!"

그러나 회신은 바로 오지 않았다. 효진은 열리지 않는 대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대문 너머, 그리고 저 집 안에서는 지금 누가 있을 것인가. 대체 누가 지혜와 있는 것일까.

달칵-

한참 만에 인터폰에서 소리가 났다.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혹시..."

지혜 목소리였다. 효진은 인터폰을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어 외쳤다.

"나야. 효진이. 그리고...."

효진은 날 힐끔 돌아보았다. 어쩐지 눈초리가 사나웠다. 나를 맹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저 눈빛에 가득 담겨 있었다.

"나 혼자 왔어. 늦은 시간이지만... 그냥 놀러 왔어."

"어? 어.....어...."

지혜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목소리에서도 묻어났다. 효진이 재촉했다.

"뭐해. 문 안 열어? 이 언니가 왔잖아."

"그게... 지금 손님이 계셔서....."

"손님, 누구?"

"남편 만나러 오신 분인데.... 지금 좀 그렇다. 효진아, 내일 내가 연락할게. 오늘은.... 돌아가 줘."

효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게 보였다. 그녀는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젖어들었다.

"너... 너 정말... 나 안 볼 거야? 좀 뜬금없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왔잖아.. 놀러 왔다잖아..."

"미안해. 효진아. 나한테...나한테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 제발.... 부탁할게."

"지혜야....."

대문을 붙잡고 흐느끼는 효진을 달래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걷고 있던 효진은 차에 이르자 내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효진아..."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내게 소리쳤다.

"너!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지혜가... 지혜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왜 여태까지 나한테 말 안 한 거야!"

"굳이 말해야 할 지 몰랐어. 내가 잘못 보았나 싶기도 했고..."

"그래도!"

그녀는 차 보닛을 쾅하고 내리쳤다.

"지혜에게... 지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분명해. 지금, 봐봐. 걔가 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이 멀리까지 보러 왔는데, 얼굴조차 안 보려고 한다고! 그게 지금 보통 일인 줄 알아?! 여태까지 나한테 자기 집에 오지 말라고 했던 것도! 그게 전부!!!"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내가 알았다면..."

"알았다면! 알았다면 어떻게 할 건데!"

"나도 내가 본 걸 확인하려고 다시 올라가 확인하려고 했었어. 근데 네가 빨리 서울로 가자고 해서..."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말했는데 그게 효진의 성질을 더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대번에 높아졌다.

"그래서, 그게 지금 나 때문이라는 거야? 네가 본 것을 확인 안 한 탓을! 지금 나한테 하려고?!"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아니면! 아니면 뭔데!"

서로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 같은 것을 그녀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불안감은 싫었다. 차라리 눈으로 확인하고 말 테다.

그렇게 결정하고 몸을 돌려 지혜 집 쪽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효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보고 올게."

"뭘?"

".....어쨌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따라오지 마."

지혜네 집은 단층짜리 양옥이었는데 좁은 마당이 딸려있었다. 주위를 확인하고 뒷담을 넘어갔다. 학교 다닐 때 월담 몇 번 한 적은 있지만, 이 나이 먹고는 거의 처음이었다. 간신히 매달려서 겨우 넘었다.

자세를 낮추고 집으로 다가갔다. 커튼이 쳐진 창 가까이 붙었다. 몸이 많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창 안의 동정을 살폈다. 거실인 모양이었다. 누군가 소파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위치가 좋지 않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내부의 소리를 들어 보기로 했다. 몸을 옮겨 환기구 쪽에 귀를 바짝 대고 있자니 희미하게나마 안의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에 있는 사람이 부엌 쪽을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응? 허허허."

너털웃음.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기억 속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이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리 좀 와서 앉지? 간만에 보는 건데 와서 서비스도 좀 해주고."

서비스라니... 저건 대체 무슨 소리지? 설마....

"아직 규호 오려면 시간 좀 있는데 한 판 뒹굴고 있을까? 응? 어때?"

느글거리는 저 목소리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규호라니.... 아까 보았던 지혜네 집 문패에 있던 이름이었다.

지금 지혜 집에 있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는 소리다. 게다가 지혜 남편의 이름을 저렇게 막 부르는 사람이라니... 어쩐지 불안했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옮겨 거실 창문을 벗어나 부엌 쪽 창으로 다가갔다. 작은 창이라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각도가 좋지 않았다. 간신히 자세를 바꿔보니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옆모습이 보였다.

실루엣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 풍만한 몸매. 바로 지혜였다. 들리지 않겠지만, 그녀에게 내 말을 전하고 싶었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건 순전히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도 사정이 있었기에 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받아들여 하룻밤을 함께 보냈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너와 나는 바로 다음 날 다시 만났다. 약속도 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들어간 술집 화장실에서 그렇게 마주치고 다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는 생각에 너는 자기 치부까지 이야기해 버렸다.

그리고 너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바로 내 옆집에 이사 오면서 말이다. 우연으로 맺어진 두 번의 만남과 두 번의 헤어짐 끝에 세 번째로 만났을 때, 그건 운명이라고 믿고 싶었다.

거기서 결코 잊지 못한 관계를 가졌지만, 너는 다시 내 곁을 떠났다.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난 그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났다.

나의 첫 여자. 내가 처음으로 고백했다가 차인 여자. 내가 처음으로 결혼식에 직접 가서 내 이름으로 축의금을 낸 여자.

그녀가 거기에 있지만, 난 나를 드러낼 수 없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왜 이렇게 대답이 없어? 서방님이 부르는데 말이야."

거실에 있던 이가 부엌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지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싱크대에 서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젠장.

이젠 그 자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설마설마하며 한 가닥 희망을 기대고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내가 잘못 보았기를 바랐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를 바랐다. 내가 하는 그 미친 추정이 사실이 아니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그날 술집에서 보았던 그 자식은 지금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지혜의 뒤로 바싹 붙었다.

"또 구멍을 열심히 쑤셔주어야 말을 잘 들을라나? 응? 응?"

녀석의 뱀 같은 혀가 지혜의 목을 핥았다. 녀석의 음탕한 하반신이 지혜의 뒤에 바짝 닿아있었다. 녀석의 두꺼비 같은 손이 지혜의 가슴을 주물렀다. 그 터무니없는 장면을 보면서 급격하게 열 받아버린 나는 지금 내 입장을 잊고 창문을 부셔버릴 뻔했다.

"놔."

"어허, 이거 요새 또 안 눌러줬더니 앙탈인감? 응?"

지혜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능구렁이 짓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지혜의 긴 치마를 슬금슬금 걷어 올리기까지 했다. 그녀의 육덕진 허벅지가 드러나고 팬티까지 그놈의 손이 닿자 지혜는 신경질적으로 놈의 팔을 쳐내며 몸을 홱 돌렸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좀 있으면 남편이 올 거야!"

"그래서, 뭐? 니년 남편 오기 전에 빨리 한번 대주겠다고?"

"저리 꺼져. 소리 지르기 전에."

"질러 봐, 씨발년아."

그놈은 자기 속내를 전혀 감추지 않고 오히려 지혜를 안을 듯이 팔을 벌리며 다가갔다.

"소리 질러 보라고. 여기 날 따먹으려는 놈이 있어요. 남편이 있는데도 존나 따먹으려는 놈이 있어요, 하고 말이야. 음? 니가 정말 소리를 지를 거면 아까 찾아온 친구에게 들어오라고 말을 했겠지. 안 그래? 응? 친구 년한테 돌아가라고 이야기한 건, 나한테 이미 대줄 준비를 하고 있었단 생각 아닌가?"

바들바들 떨리는 지혜의 고통이 나한테까지 전염되었다. 울컥해졌다.

지난 시간... 내가 못 보는 곳에서, 내가 없는 시간에서 지혜는 그놈에게 대체 무슨 짓을 당해왔을까. 보고 있는 이 장면만으로도 피를 토할 것 같은데 상상이 닿는 그 어렴풋한 무언가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더는 못 참겠다고 생각하여 입구를 찾으려고 하는데 차 한 대가 집 앞에 서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놈도 황급히 지혜에게서 떨어져 거실로 돌아갔다. 누군가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형님. 벌써 오셨습니까?"

"허허, 난 시간 맞추어 온다고 왔는데 말이야."

"하하하, 제가 좀 늦었죠? 자기야. 음식 준비 다 됐어?"

지혜의 남편, 규호는 그놈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부엌으로 들어와 지혜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지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을 맞이한다.

"으응... 거의 다 되었어."

"중요한 분이니까 맛있게 좀 부탁할게."

"..........알았어."

고개를 떨어뜨리는 지혜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규호는 거실로 돌아가 그놈과 환담을 나누었다. 곧이어 지혜가 차린 상이 차려지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이 식사를 시작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몸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대략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지혜의 남편, 규호는 그놈을 임 전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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