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30화 (43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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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임 전무 회사에서 사용하는 노후 차량 교체가 앞으로 대대적으로 있을 예정인데 ,거기에 규호를 참여시킬 모양이었다. 거들먹거리며 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놈 앞에서 규호는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물장수라도 만난 모양으로 크게 기뻐하며 꺼뻑 죽는 시늉까지 했다.

임 전무는 처음에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겸양을 떨었지만, 술이 한참 들어가고 나니 거들먹거리는 모양새가 심히 눈꼴시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혜에게 술 좀 따라보라고 권하면서 옆자리에 앉혀 허벅지를 탕탕 내리치기까지 했다. 남편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콱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더 가관은 그다음이었다. 어느 순간 규호는 술이 꽤 올랐는지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어버렸고 임 전무는 노골적으로 지혜를 더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혜가 모르는 척 몸을 빼거나 손을 쳐내는 식으로 그놈을 거부했지만, 규호가 코를 골기 시작하자 숫제 옷이라도 벗길 요량으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왜 이래!"

지혜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그놈을 밀어내었지만, 그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이리 와봐!"

"놔, 놓으라구!"

두 사람은 식탁에서 물러나 소파에서 악다구니판을 펼쳤다. 그러나 지혜가 녀석의 힘에 눌리어 치마는 반쯤 벗겨지고 윗도리는 목 부분이 늘어나 덜렁거렸다. 지혜는 사색이 되었다.

"미쳤어? 이러다 남편이 깨면 어쩌려고?"

"씨발. 깨보라지. 내가 꿀릴 게 있을 것 같아?"

"뭐?"

"말마따나 내 한마디면 니 남편 연봉의 자릿수가 달라지는데.... 게다가 좀 있으면 승진심사라며? 응? 네 남편이 날 어쩔 것 같냐? 엉?"

지혜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더러운 새끼."

그러나 지혜의 손에서 밀어내는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놈은 지혜를 거의 올라타다시피 했다.

"씨발년아. 진작 이렇게 고분고분 나오면 니나 나나 편하잖아. 왜 이렇게 앙탈이야?"

놈은 지혜 셔츠를 걷어 올렸다. 탐스러운, 아니, 탐스럽다는 말로도 모자란 그녀의 거대한 가슴이 갈색 브래지어에 감싸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놈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흐흐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래서 니년을 못 놓겠다니까. 이거 봐라. 존나 먹음직스럽잖아."

녀석의 손아래 지혜의 유방이 짓뭉개졌다. 지혜는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어때? 남편이 잘 해주냐? 응? 응? 말해봐. 이 걸레 같은 년아."

녀석의 손이 지혜의 치마 속으로 들어갔다. 지혜는 다리를 꼬아가며 저항해보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박아주는 게 모자라면 나한테 말하라니까. 니년 보지 맛을 아는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어. 크흐흐."

지혜가 겪는 수난을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긴 지혜가 사는 집이다. 만약 내가 난입하여 그놈을 때려눕힌다 한들 그 여파는 반드시 지혜에게 미칠 것이다.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남편이라도 깨면 그 감당을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고 저 욕지기나는 광경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주변을 살피던 나는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일단 뒷담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지혜 집 대문 앞으로 간 다음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그놈의 차로 다가갔다. 고급 중형차니 분명 그 장치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주변을 확인하고 손에 든 돌멩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운전석 쪽 유리창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창에 선명하게 금이 갔고, 차에 장착된 경보장치가 동작했다.

삐익- 삐익- 삐익-

한 밤의 정적을 깨는 요란한 알람 소리. 역시 이런 차에는 도난 방지 장치가 있었다. 제대로 먹혔다. 깨져 나간 창을 두고 그대로 몸을 빼내어 골목 어귀로 숨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헐레벌떡 밖으로 나온 그놈은 자기 차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어떤 새끼가!!!!"

사방을 둘러보지만, 그렇다고 내가 보이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녀석이 안달복달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녀석은 있는 대로 화를 내며 열 받아 하다가 결국은 차를 끌고 가버렸다.

한 고비를 넘겼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혜의 집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주차해놓은 효진의 차로 돌아갔다. 차 안에 있던 효진이 불안한 표정으로 날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응?"

"들어가자. 들어가서 이야기해."

차에 올라탄다.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주저하고 있자니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내 손을 효진이 가만히 잡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 널 비난한 건 본심이 아냐."

"효진아..."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래. 이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널 비난하지 않을 테니 말해줘. 부탁이야. 이 손... 놓지 않을게."

아아. 효진의 눈망울을 보며 난 더 이상 숨길 게 없었다. 작년, 지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금씩 이야기를 시작했다. 엉겁결에 지혜를 만나고 그리고 우연히 다시 만나고.... 거기서 만난 그놈의 모습과 그 녀석과 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녀석을 얼핏 보았던 일. 조금 전 들은 대화를 통해 유추한 사실들을 이야기했다.

지혜를 압박하는 지금의 상황. 이 모든 것들을 쏟아놓았다. 효진은 눈물을 쏟았고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잡고 있는 손 때문에 그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혜가 겪었을 고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차 안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몸을 웅크리고 의자에 누워있는 효진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멀리 있을 사람을 그리워하며 각자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시뻘게진 눈을 하고 지혜의 집 앞을 쏘아보았다. 남편이 나와 출근하는 걸 확인한 후, 옆에서 자고 있는 효진을 흔들어 깨웠다. 울다 지쳐 새벽녘에 간신히 잠든 효진은 퉁퉁 부운 눈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시계를 보니 대략 일곱 시 정도 되었다. 오가는 사람을 보고 있다가 사람이 뜸해졌을 무렵 지혜의 집으로 다가갔다. 대문 앞에 달린 인터폰을 눌렀다. 전자음으로 된 짧은 시그널이 흐르고 곧이어 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나야. 효진이."

효진이 대답했다. 다소 지지직거리는, 소리 품질이 영 좋지 않은 인터폰 너머로 지혜의 침묵이 느껴졌다. 한참 만에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이런 아침에 어쩐.... 일이야?"

"할 말이 있어. 어제 니가 다시 오라면서."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지혜로서는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나 남의 집에 찾아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너네 집에 있던.... 임 전무인가 뭔가 하는 놈, 그놈에 관해서야."

"....한석이?"

"그래. 나도 같이 있어."

지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찌잉- 소리는 분명 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에 이르자 지혜가 문을 열고 나왔다. 전에 비해 핼쑥해진 얼굴이 몹시 안쓰럽다.

"어떻게.... 알고 있지?"

그러자 효진이 볼멘소리를 냈다.

"우리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맞다. 내 정신 좀 봐. 들어와."

지혜를 따라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한편에 걸린 웨딩사진이 이곳이 신혼부부의 집임을 새삼 상기시켰다. 거실을 지나가다가 소파를 보았다. 어제 그놈이 벌이던 추잡스러운 짓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다.

"커피 줄까?"

"응."

부엌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타고 있는 지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예전 자취방 맞은편 그녀의 방이 생각났다. 거기서도 테이블에 앉아 그녀가 끓여주는 커피를 맛보곤 했었다.

커피물이 끓는 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혜가 타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 향이 조금 식을 때가 되어서 효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어제 왜 그랬어?"

자신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문조차 열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겠지. 지혜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냐?"

가슴이 메어졌다. 체념이 가득한 그 대답은 지혜의 현재 상태를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내고, 또 보여주고 있었다. 지혜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내가 언급한 임 전무를 말하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그 사람을 본 적이 있겠구나. 그때 술집에서 내가 그 사람을......."

"아니. 그때가 전부가 아냐."

"뭐?"

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게 몹시 안쓰러웠다.

"하아.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지혜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네 결혼식 날, 그 날 아주 잠깐이지만 그 자식을 보았어."

"그 날.....?"

지혜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날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러나 내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리고 어제는... 저기 저 창문 밖에서 그 새끼가 너네 집에서 벌이는 일을 보고 있었어."

"뭐?!"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입을 가린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그녀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난 최대한 차분하게, 그리고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억누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 들어가 놈을 작살내고 싶었지만... 네 남편도 있고... 그래서 겨우 생각해낸 일이 그 자식의 차를 부숴놓은 거야."

"그렇다면,"

지혜는 테이블에 놓인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뜨문뜨문 말을 꺼냈다.

"다..... 봐...봤어? 그....그걸?"

그녀가 말하는 그것이란 놈이 부린 추태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 추태가 이뤄질 수 있는 이면까지도. 난 시선을 떨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혜는 한참 동안 얼굴을 싸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울음을 터트린 것은 효진이었다. 그녀는 엉엉 울면서 지혜를 끌어안았다.

"왜...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없었어! 왜! 왜냐구!"

"효진아...."

"난 슬퍼. 니가 그런 일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슬프고... 니가 그런 일을 당하고 있으면서 나한테 내색조차 하지 않았던 게 더 슬퍼.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니!"

"그렇다고...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혜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그녀 역시 효진을 끌어안고 둘이서 펑펑 울고 말았다. 두 여자의 울음을 지켜보며 나 역시 울고 싶었지만, 어쩐지 나까지 울었다가는 상황을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겨우 참아냈다.

한참 만에, 정말정말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두 사람은 겨우 진정이 되었다. 효진은 여전히 물기가 남아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 내가 알았더라면 반드시 그냥 한 번 더지는 않았을 텐데."

"왜 니가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지혜야..."

다시 또 울음을 터트리려는 효진을 간신히 달랜다. 이 녀석이 이 정도로 울보인 줄 몰랐는데.. 정말이지 지혜 일만 연관이 되면 애가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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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429편에 전혀 엉뚱한 회차를 올리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429편이 이상했다고 지적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시 제대로 된 편을 올려두었으니 다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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