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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434화 (43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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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다소 욱한 마음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유미에게 와서 그건 정말 현실이 되고 말았다. 어찌 보면 살짝 무섭기도 하지만 밤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녀 입장에서 보면 또 당연한 소리일지도 몰랐다. 늘 웃고 있다고, 그녀를 너무 얕본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웃음은 그저 단순히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보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보내는 일종의 조소 같은 것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어느 정도 털어놔도 괜찮지 싶었다.

"친구의 남편 이름은 양규호... 그리고 친구에게 치근덕거리는 놈의 이름은 임필복이야. 양규호는 K자동차회사 영업사원이고 임필복은 무슨 전무라고 하던데 회사는 어딘지 모르겠어."

그러자 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나라에 몇 개의 회사가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전무가 있다고 생각해? 자료가 너무 빈약한데?"

"양규호가 집중적으로 거래하고 있다고 했어. 아마 규호 쪽을 파고 들어가면 필복에 대해서도...."

"잠깐!"

유미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뭔가 생각에 잠겼다.

"필복... 필복.....? 임필복?"

그 이름을 거듭 중얼거리는 걸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ROSE 단골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는 이름이야?"

"아니. 모르는 이름인데 어쩐지 귀에 익어. 어디서 본 것 같아."

모르는 이름인데 귀에 익다니. 그건 또 무슨 귀신이 몰래 숨어 씨나락 까먹고 있는 소리인가. 최소한 ROSE 단골은 아닌 모양이었다.

"보다니. 무슨 소리야?"

"잠깐만."

그녀는 침대에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화장대 옆에 있는 벽장을 열었다. 알몸으로 왔다 갔다 하며 뭔가를 열심히 찾더니 이내 어떤 파일 하나를 들고 왔다.

"임... 임 씨란 말이지?"

"그게 왜?"

"애들 뽑을 때는 애들 등본도 함께 받아두거든. 이런저런 이유로. 그리고 한 번씩 훑어보기도 하고... 그런데 거기서 그 이름을 본 것 같아. 내 기억이 맞다면."

"뭐라고?"

깜짝 놀라 나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녀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넘기고 있는 파일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찾았다. 여기 있네."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부분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임필복. 세 글자가 선명하게 찍힌 등본이 거기에 있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여기 딸자식에 임승현이라고 보이지? S대학교 영문학과였던가? 암튼 거기 다니는 앤데 작년 여름방학 때 우리 가게에서 두 달 정도 일했었어. 명문대에 다니는 애가 가게에서 일한다고 하니까 좀 특이해서 기억을 하고 있었지. 그때 이걸 훑어보면서 아빠 이름이 참 웃기다 싶었거든."

문득 몇 달 전 유진과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일이 떠올랐다. 그때 유진이가 갖고 있던 학생증. 거기에 찍혀 있던 이름도 바로 임승현이었다. 그녀가 필복의 딸이었다니....

이 기막힌 우연에 놀랍기도 했지만,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유미의 기억력이다.

"아무리 그래도... 작년에 한번 훑어본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단 말야?"

"어머.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내가 기억력이 좋으면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아니. 이상하다기보단.... 신기할 정도라서. 내가 장부 정리하는 법이랑 프로그램 쓰는 법 알려줄 때는 그렇게 못 알아듣더니...."

그러자 유미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호호호. 선생님도 차암. 그건 저한테 너무 어렵다구요. 호호호."

......그걸 보고 확신했다. 유진이가 그토록 머리가 좋은 이유와 그 자기 본위의 태도가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실히 알았다. 전부 유전이었다!

유미, 이 인간은 다 할 줄 알면서도 자기가 하기 귀찮아서 떠넘기고 있었구나!! 으아아악!! 그러나 유미는 내가 입을 떡 벌리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일단 확인을 해볼게. 동명이인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 부탁 좀 할게."

"말로만?"

그러면서 입술을 살짝 내미는 유미를 향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호호 웃으면서 파일을 들고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매력적인 뒤태를 보며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는 차 안에서 밤을 새웠고 조금 전에는 격렬한 행위를 치른 후였다.

게다가 임필복에 관한 일이 이렇게 뜻하지 않는 행운을 맞이해서 술술 풀려 가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저절로 긴장이 풀렸다. 온몸이 노곤노곤했다.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 전화를 거는 유미의 옆모습을 보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베개에 뒤통수를 기대고.......

잠시 후, 매끈한 알몸이 내 몸 위로 드리워졌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졸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 위에 올라타며 허벅지로 자지를 슬슬 문질렀다.

"혼자서도 잘 하기는 하지만... 같이 하고 싶어."

다시 기운을 찾은 자지를 희롱하는 그녀와 다시 어울렸다. 두 번째의 행위는 말 그대로 꿈결 같았다. 비몽사몽간에 그녀의 안으로 두 번째 사정을 마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무슨 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잠결이라 잘 모르겠지만... 누가 싸우는 소리 비슷하게.... 그리고 이내 쾅- 하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데 안방 문을 통해 목욕 가운을 걸친 유미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 깼어? 더 자지그래."

"아뇨. 아, 아니. 잘 만큼 잔 거 같은데... 방금 무슨 소리야?"

"흐음. 뭐랄까. 싸움에서 진 고양이가 짖는 소리?"

"에? 그게 무슨...."

고양이가 짖기도 하나? 우는 게 아니라? 유미의 표현은 좀 이상했다. 기지개를 켜보았다. 어젯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있다가 푹신한 침대에서 잘 자고 났더니 한결 개운했다.

"자기 옷은 빨았어. 먼지 같은 게 좀 많이 묻어있길래."

"아, 그래?"

남의 담장을 기어 올라가고 마당에 숨어들고 했으니 옷이 지저분해졌을 게 분명했다. 그럼 뭘 입어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유미가 옷장에서 남자 옷을 꺼내는 게 보였다.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검은색 정장이었다. 저런 게 왜 있지? 유미는 그것을 침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일단 샤워하고 와. 땀도 많이 흘렸으니까. 그리고 나랑 같이 나가. 조사 자료를 직접 만나서 받기로 했으니까."

"으응. 알았어."

안방에 딸려있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대개 안방에 딸린 욕실은 크기가 작은 게 보통인데 여긴 오히려 거실 쪽에 붙어있는 욕실보다 더 넓었고 거기다 큰 욕조까지 딸려있었다. 두 사람은 너끈히 들어가고도 남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로드킬 당한 강아지를 안고 오는 바람에 옷이 엉망이 되어서 거실 쪽 욕실에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 그래. 그때도 유진이가 남자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게 이 안방에 있던 것이었나? 게다가 그 이후 돌려주지 않았는데 또 있다니. 설마 안방에 남자 옷이 몇 벌씩 있다는 걸까? 대체 무슨 이유로? 아무래도 궁금해졌다.

"저기. 유미."

"응?"

"이 옷이 웬 거냐고 물어봐도 돼?"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아니나 다를까. 이제 갓 포장에서 꺼낸 새 속옷까지 준비가 되어있었다. 샤워를 하고 입던 옷을 다시 입는 것만큼 찜찜한 건 없으니까 이런 준비가 퍽 고맙기는 한데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옷을 입으면서 화장대에 앉아 눈썹을 그리고 있는 유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유미가 답했다.

"후후후. 왜? 여자 둘만 사는 집에 남자 옷이 있는 게 신경 쓰여?"

"아니, 뭐. 그냥...."

화장대 거울을 통해 보이는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장난기가 실린 말투로 답했다.

"설마 나랑 한번 그랬다고 내 사생활에 태클 걸려는 건 아니겠지?"

"어? 아니, 그런 의도라기보다는...."

"남자들은 그게 문제야. 한번 올라타면 그 여자가 자기 여자가 되는 줄 안다니까. 자기는 여자 친구 따로 있는 거 아니었어?"

효진을 말하는 거라면 맞다. 그러고 보니 난 지금 여자 친구를 두고 바람을 피우고 있던 거네. 하아...

"그거야 그렇지만..."

"나도 남자 친구가 있어. 그런 분들을 위한 준비는 해두는 편이야. 그렇게만 알아둬."

참 쉽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를 저리도 쉽고 간략하게 이야기해버리니 이쪽에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도 유미 남자 친구(?)의 덩치는 나랑 비슷한 모양이었다. 옷이 잘 맞았다. 하긴 지난번에 유진이가 옷을 주었을 때도 잘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리사는 그 옷에 대해 좀 노티나 보이는 옛날식 정장이라고 평했지만, 입기에 나쁘지 않았다. 원래 정장은 좀 무겁고 움직이기 불편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 옷은 중후한 느낌의 겉모습과는 달리 굉장히 가볍고 활동성이 좋았다. 재킷까지 걸치고 있는 동안 유미도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모양이다.

"다 입었으면 나가자."

"응."

그대로 나가려는데 유미가 날 제지했다.

"아, 잠깐만. 타이는 왜 안 매는 거야?"

"꼭 넥타이까지 해야 돼?"

"남자의 패션은 타이로 완성된다는 말, 몰라?"

"불편해서...."

"어휴. 애도 아니고. 이리 와봐."

유미의 앞에 서자 그녀가 넥타이를 직접 매주었다. 남의 목에 타이를 매주는 손길이 어쩐지 능숙했다. 원래 나이로 안 보이고 심지어 교복이 무리 없이 어울릴 정도로 동안이고 철없이 구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지 그녀는 유진이라고 하는 딸이 있다.

그렇다면 그녀도 언젠가 누군가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고 키웠다는 건데... 그게 누구일까. 결혼 생활이라도 했던 걸까. 그 사람에게도 이렇게 넥타이를 매주었을까. 난 유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녀에게는 과거에 대해 묻는 게 쉽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묻는다고 해도 늘 그렇듯이 활짝 웃으면서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넘겨버릴 것만 같았다.

"자, 다 됐어. 나가자."

그녀 역시 나와 색깔을 맞춘 듯한 검은색 H라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평상시 가게에서 일할 때 입는 옷만 보다가 또 이렇게 차려 입은 것을 보니 어느 부잣집의 마나님 못지않다. 아니, 외모만 두고 보면 아가씨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았다.

"이걸 신도록 해."

현관에서 운동화를 다시 신어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는 구두까지 꺼내줬다. 이런 정장에 속옷까지 준비하고 있으니 구두가 있어도 놀랄 게 없으려나..... 그러나 내가 놀랄 부분은 따로 있었다.

"왜 그래? 얼른 신어."

"아니, 그게 저....."

현관에 놓인 작은 학생용 단화를 보면서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아까 들은 그 고함 소리는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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