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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아까 잠결에 들었던 고성. 그리고 쾅하는 소리. 그건 분명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였으리라.
이 집에, 유미와 나 말고도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원래 이 집에 사는 사람. 학생용 단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 말이다.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면 좋을 텐데. 만약 내가 지금 여기서 고개를 돌린다면.... 어쩌면... 자기 방문을 아주 조금 열고 이쪽을 향해 저주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어떤 암표범과 눈을 마주치고 말리라.
유미는 늘 자기 딸을 고양이라고 표현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그 애가 고양이로 안 보여. 육식동물인 암표범으로 보인다고! 보이지 않아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등 뒤에서 이렇게 파르르 떨려오는 공기의 진동이 나를 무섭게 했다. 바짝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고 있으려니 유미가 재촉했다.
"갑자기 왜 땀을 흘리고 그래? 아까 너무 격렬하게 했나?"
"아니, 유미 씨... 그게 그러니까...."
"두 번째 할 때는 아예 졸면서 하더니... 흐음. 내가 너무 욕심 냈나?"
"그...그러니까 유미 씨. 그런 이야기는 이제 제발 그만...."
"어머. 이제 말 놓기로 했잖아. 볼 거 다 본 사이에..... 갑자기 왜 그런 딱딱한 호칭이야? 호호호호."
저 웃음. 일부러 웃는 게 분명했다. 지금 이쪽을 보면서 적의를 불태우고 있는 자기 딸 보란듯이! 간신히 현관을 나서고 문을 닫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는 고함이 집안에서 터져 나왔다.
암표범이라는 말 취소다. 저건 거의 사자후다.
"고양이가 심하게 우는데? 내가 너무 몰아세웠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중얼거리는 유미를 보면서 기가 막혔다. 그때 그녀와 술집에서 단둘이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유진이를 잘 부탁해요.
- 예. 제 딸이자 선생님을 좋아하는 한 여자. 제 연적.
그녀는 그렇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차에 올라타서 그것에 대해 묻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뭐랄까. 지금은 유진이한테 주기 아깝더라구. 으음. 그래서 내가 먹어버렸어."
엄마가 남매 먹으라고 사다 놓은, 냉장고에 있던 푸딩을 죄다 먼저 먹어버렸다고 이야기하는 아주 얄미운 누나 같은 듯한 말투에 도리어 이쪽이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푸딩이냐!!! 하고 소리치는 건도 어쩐지 한심한 기분이 들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유진이 과외를 갔을 때 어떤 얼굴로 보고, 어떤 화를 감당해야 할지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예 다음부터는 과외를 가지 말고 도망갈까도 싶었다.
운전은 유미가 하기로 했다. 어디냐고 물어도, 그녀는 가보면 안다고만 했다. 서울 근처 위성도시를 향하다가 중간쯤에서 방향을 틀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세워진 카페가 보였다. 주변에 상가나 주택가도 없는 말 그대로의 허허벌판이었다. 여기에 난데없는 카페라니. 좀 당황스러웠다. 손님이 오긴 하나? 그러나 유미는 목적지가 여기라고 말하더니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안에 들어갔다.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어솨요."
어라. 뭔가 말투가 이상한데? 말투도 그렇고 생김새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카페인데 안에는 괴상한 차림의 여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미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하나 씨. 잘 있었어?"
그러자 여자는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노노노농. 아이디로 불러달라니까. 네오. 그렇게 말이야. 안 그러면 자기도 확 본명으로 불러 버릴 거야~!"
어딘가 장난스럽게 말하는 투에서 치기가 잔뜩 묻어났다. 유미는 호호 웃고는 여자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테이블마다 PC가 설치된 이상한 카페였다. 게다가 그 PC들은 전부 켜져 있었고 화면에서 뭔가가 실행되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유미를 따라 하나라는 여자, 아니, 네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네오는 무척이나 조그마한 여자였다. 목소리를 보아 여자인건 알겠는데 마스크를 하고 있는데다가 선글라스 비슷한 것을 끼고 있어서 도저히 나이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대략 20대 정도? 선글라스도 아니고 선글라스 비슷한 거라고 한 이유는 거기에 무슨 케이블 같은 것이 잔뜩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나온 케이블은 그녀의 앞에 놓인 세 대의 컴퓨터로 제각각 연결되어 있었다. 주머니가 주렁주렁 매달린 외투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 몸매도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가 날 가리키며 유미에게 물었다.
"이쪽은 누구? 새 애인?"
외모는 보이지 않지만, 분위기상 유미랑 나이 차가 꽤 되어 보이는데도 서슴없이 말을 놓았다. 원래 친한 사이인가? 무심하게 대답하는 유미의 말투로 보아 네오의 반말에 별로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엔조이."
"흐음. 엔조이라...."
나를 가리켜 엔조이라고 칭해버리는 유미의 지나친 시크함에 살짝 상처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에 할 말을 잃었다. 네오가 날 바라보자 그 순간 그녀의 선글라스에서 뭔가 붉은 빛 같은 게 나와 내 얼굴과 상반신을 스캔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깜짝 놀라 굳어있자니 네오가 웃으며 말했다.
"에헤이. 그렇게 쫄꺼 없어. 몸에 해되는 건 아니니까. 어디 보자.... 전과도 없고, 깨끗하네? 면허는 있고... 음.... 학생?"
어라. 나한테도 반말인가...? 그나저나 저런 걸 어떻게 안 거야?
"그런데도 유미가 마음에 들어 했단 말이야? 희한하네. 자네도 미래가 탄탄한가 보지? 유미가 따먹을 정도면?"
"에에엑?"
깜짝 놀라 유미 쪽을 돌아보지만, 그녀는 어느 샌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쪽에 있는 바에 가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보고 외쳤다.
"커피 마실 건데 자기도 한잔 할래?"
"주세요."
"네오는?"
"알잖아."
네오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대답하자 유미는 웃으며 뭔가를 준비했다. 여긴 카페인 동시에 셀프바인 모양이다. 주인으로 보이는, 그러니까 카페에 손님 하나 없이 이 사람 혼자 있으면 주인 맞겠지?
암튼,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쉴 새 없이 세 대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쟁반을 받쳐 든 유미가 이쪽으로 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내 앞에 놓았다. 유미는 자기 자리에도 커피 잔을 하나 내려놓고 네오 옆에는 기다란 잔을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물...인가? 네오는 잔에 손도 대지 않고 툴툴거렸다.
"전화로 알려준 걸로는 불충분한가 보지? 그러게 유미 너도 팩스를 하나 놓으라고 했잖아."
"기계는 귀찮아."
"헤유. 나 같으면 차 몰고 여기까지 오는 게 더 귀찮겠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좋지. 일원이는 나간 거야?"
"엉. 조사. 아까 말했잖아. 니가 말한 양규호와 임필복에 대한 조사 의뢰가 들어온 게 또 있다고. 그거 오프라인 자료 따러 갔어. 발로 뛰는 건 걔 몫이니까."
양규호와 임필복에 대한 의뢰가 또 들어왔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그들에 대한 걸 궁금해 하는 사람은 나 말고 한 명 더 있다. 내심 짐작이 갔다. 유미에게 효진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마디 했다.
"효진이란 애가 자기 애인이라 이거지? 나보다 이뻐?"
"........앞의 설명은 알아들은 거야?"
"에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뭘."
하아. 유미에게 뭔가를 설명하려 한다는 건 참 부질없는 일인 것 같았다....
내가 한숨을 내쉬고 있는 동안 유미는 네오에게 설명했다. 지금 임필복이 양규호 부인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고 있으니 그를 떼어내고 싶다고. 그 말을 한마디 했을 뿐인데 네오는 뭔가 후다다닥 쳐 넣더니 잠시 후, "짠!"이라고 외치며 팔을 뻗어 모니터 하나를 이쪽으로 돌려 세웠다.
"자, 봅시다! 이걸 봐. 대물물산의 회계DB에 올라온 최근 거래내역이야. 이걸 보면 올해 5월부터 관용차 및 하청업체 사용 차량 구매 계약이 전부 양규호를 통해 이뤄지고 있어. 이 정도 물량이면 웬만한 영업사원이 일 년에 팔아치울 양을 양규호는 일주일 실적으로 올리고 있는 거라구. 이만한 거래를 주고받을 정도면 도저히 보통 사이가 아닌데? 제아무리 전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결정할 정도면 보통 밀어붙인 게 아니야. 그러니 그게 단순히 임필복인가 뭔가 하는 놈을 떼어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게 정보전문가인 나의 결론. 영어로는 인포메이션 스페샬리스트. 에헴."
단숨에 쏟아내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해결되지 않다뇨. 그게 무슨 소리죠?"
"음... 유미는 힘깨나 쓰는 아저씨들 불러다가 필복을 조질 생각인가 본데, 그건 근본 대책이 못 돼. 그렇게 되면 필복은 규호와 거래를 끊을 거고 그러면 규호는 기분이 몹시 안 좋겠지. 지금 그 규호의 마누라, 그러니까 김지혜라는 사람을 위해 이런 일을 하려는 거 아냐?"
"그...그렇죠."
"규호가 그러면 과연 지혜를 곱게 볼까?"
"그...그게 무슨 소리죠? 남편이 아내를 곱게 보지 않다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네오가 책상을 팡팡 내려치며 역정을 냈다.
"하아. 이 친구 이거 못 쓰겠네. 너무 순진해! 설마 이래서 유미가 따먹고 있었나?"
유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웃음을 지우고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카페에 들어와서 날 네오 앞에 앉힌 이후, 그녀는 말이 없었다. 네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누님이 알아듣기 쉽게 자~알 설명해줄께? 동생. 오해하지 말고, 똑똑히 들어. 응? 알았지?"
아무리 봐도 누님이라고 불릴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거래가 끊긴다. 규호는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 보아하니 조만간 판매왕 후보도 될 모양인데 그게 문턱에서 좌절된다. 규호가 원인을 찾는다. 필복을 찾아가 따진다. 봐봐. 이정도 거래가 오가려면 그게 어디 맨입으로 되었겠어? 뭔가 규호가 필복에게 줬을 거라고. 그러니 필복도 이 정도의 물량으로 보답을 했겠지. 두 남자 사이에 뭐가 오갔을까. 돈일까? 다른 무언가 일까? 모르긴 몰라도 규호가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고. 그렇다면 대체 그게 뭘까. 그게 뭔데 대체 필복이 규호에게 이만큼 해줄까? 뭘까, 뭘까, 뭘까. 궁금하잖아! 너무 궁금하다고! 그래서 나도 한번 디벼봤지. 찾아봤지. 그래야 정보전문가 타이틀 달고 먹고 살지 않겠어? 결론은 너무 쉽게 나와. 원래 사내새끼들의 문제는 별거 없어. 둘 중 하나야."
말을 딱 멈춘 네오는 날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작은 손이다. 엄지와 검지를 벌려 ㄴ자를 그려보인다. 그녀가 꼽은 두 개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걸 보면서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친다. 설마.. 설마.... 설마......
"돈."
네오가 엄지를 접었다. 그리고.
"아니면 여자."
남은 손가락이 마저 접혔다.
여자?
여자라고?
임필복과 양규호 사이에 있는 여자라고 하면 단 한 명뿐이다.
안돼. 이럴 수는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미친 소리야. 더 이상 듣고 있을 가치가 없어. 뭐가 정보전문가고 뭐가 어쩌고 저째. 저 미친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 유미는 날 이리로 데려온건가? 그런 거야?"
따져 묻기 위해 유미를 돌아보자 그녀는 말없이 차키를 내밀었다. 거칠게 그것을 낚아채고 카페를 뛰쳐나왔다. 이런 미친 소리나 지껄이는 곳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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