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36화 (43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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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정체 모를 카페를 뛰쳐나와 곧장 세워 둔 차에 올라탔다. 차를 출발시키면서 휴대폰을 꺼내 단축키 1번을 꾹 눌렀다. 그렇게 몇 번이나 효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녀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질러보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안 받는 전화가 연결될 리 없었다. 한 손은 핸들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 단축번호를 누른다. 속도를 좀 줄여야 하지만 마음이 급해 그러질 못했다. 넓은 도로에 비해 오가는 차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형 트럭이 많이 오가고 있어 조금 아찔했다.

"받아, 받으라고!!!"

효진에게 몇 번을 걸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진동으로 해놓고 백 속에 넣어둔 걸까. 그게 아니면 잠깐 두고 어디 간 걸까.

시계를 보았다. 저녁 7시 반. 집으로도 해보지만, 거긴 없었다. 대신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선미였다. 선미에게 태근이 형이 있냐고 묻자 바꿔주었다. 태근이 형은 효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혹시나 싶어 형에게 하영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형에게 대충 둘러대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이내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의 그녀. 그러나 난 마음이 급했다.

"여보세요? 하영 씨! 접니다! 한석!"

"소리 지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시죠? 밀린 수임료를 내시려...."

"죄송하지만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에요! 효진이! 효진이 어디 있나요!?"

"저한테 맡겨 두셨어요?"

아, 진짜... 이 여자가 정말 끝까지...

"오늘 낮에 하영 씨 만나러 간 거 알고 있습니다. 지금 효진이 어디 있죠? 같이 있나요?"

"....아까 나갔습니다만."

"같이 있다가?"

"예."

아까 들었던 의문을 떠올렸다. 유미가 처음에 네오에게 자료를 요청했을 때, 또 다른 쪽에서도 같은 요청이 들어왔다고 했었다.

"혹시 하영 씨가 그랬어요? 네오라는 사람한테 양규호랑 임필복에 대해서 자료 요청한 게?"

그러자 하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조금 뒤, 수화기 너머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안 그래도 그것에 대해 당신에게 물어보려고...."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해줄게요! 지금은... 으아아악!!!"

갑자기 눈앞이 번쩍였다. 나도 모르게 차선을 이탈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맞은편 차에서 번뜩이는 상향 라이트에 황급히 핸들을 꺾었다. 중앙선을 넘어 달리던 차가 오른쪽으로 급선회했다. 순식간에 우측 가드레일이 시야에 들어왔다. 핸들을 바로 함과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바퀴에 급격한 제동이 걸리고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끼이이이익--

달리던 기세로 인해 후방부가 우측으로 틀어진 차는 그대로 우측 가드레일에 차량 우측면을 긁으면서 더 나아갔다. 가르르릉- 하고 쇠 긁는 소리가 한참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차가 멈추고 나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놀랐다. 조수석 쪽 문이랑 그쪽 바디는 가드레일에 아주 그냥 대고 갈아버린 꼴이 되었다. 남의 차 가지고 참 잘하는 짓이다.... 그 와중에 바닥에 떨어트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뭔가 쨍알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귀에 갖다 대자 하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여자가 이렇게 당황한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이봐요! 이봐요!"

".......소리 지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살아있어요."

아까 그녀가 한 대답을 고대로 돌려주는 소심한 복수를 해주었다. 애써 태연한 척 대답해 보지만, 지금 내 가슴은 굉장히 벌렁벌렁하고 있었다.

"운전 중이었어요?"

"네."

"그러게 누가 운전 중에 전화를 하고.... 참나. 십 년 감수했잖아요. 나 때문에 죽었다고 할까 봐."

날 힐난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죽는다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네? 그게 무슨...."

"이꼴저꼴... 더러운 꼴 안 보도록....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구요....."

큰 사고가 날 뻔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아까 들은 이야기에 따른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거듭 괜찮냐고 묻는 하영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래. 차라리 지금 죽었다면 지혜의 그 고통을 더는 안 봐도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더럽고 추잡한 거래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이 현실을 더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영이 전해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효진이는 양규호랑 담판을 지으러 간다고 했어요.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필요 없다고 혼자 가겠다고 하더군요."

"아, 안 돼!"

"안된다뇨? 왜 그러죠?"

"그 자식은 이미.... 크윽...."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가 갑자기 뒷골이 띵- 했다. 아주 들이받은 건 아니었지만, 차가 급하게 정지하고 반쯤 돌면서 몸이 운전석 문 쪽으로 처박히긴 했다. 그때 목을 좀 다친 모양이었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몸을 바로 했다.

다시 시동을 걸었다. 주행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휴대폰을 들고 하영에게 말했다.

"어디로 간다고 했죠?"

"양규호가 일하는 영업점에..."

"수원 팔달구죠? 맞죠?"

"네."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차를 다시 몰고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여긴 수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정표를 보고 고속도로 진입로를 찾았다. 남의 차를 이렇게 험하게 굴리고 긁어먹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곧 고속도로가 나타나고 그 길을 통하니 수원까지 30분도 채 안 되어 도착했다. 막상 도착을 하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다시 하영에게 전화를 걸어 영업점의 위치를 물었다. 그녀가 주소를 알려주어 길을 물어 찾아갔다.

때마침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많이 내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가 와서 시야가 많이 제한되어 더 고생했다.

근처까지 왔다고 생각했을 때, 더 이상 영업점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영업점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 발견했다. 길가에 낯익은 차가 세워져 있었다. 비상등을 켜고 뒤에 차를 세운 다음 조수석 쪽으로 다가갔다. 안쪽을 살피고 유리창을 살짝 두드렸다.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효진이 이쪽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문이 열렸다. 조수석에 올라타자 효진이가 이쪽을 향해 몸을 던져왔다. 자리가 협소했기 때문에 효진은 상체만 나한테 기댈 수 있었다. 이내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석아.. 한석아... 어떻게...해... 지혜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구..."

무어라 해줄 말이 없었다. 착잡했다. 효진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태까지 참아온 효진의 울음은 쉬이 그칠 줄 몰랐다. 밖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비처럼, 효진의 마음도, 내 마음도 그렇게 젖어 들어간다.

효진과 나는 수원에서 서울로 돌아와 하영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규호와 만나고 돌아온 효진은 하영을 만나 상담하길 원했고 연락을 받은 하영은 알았다면서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하영을 앞에 두고 효진은 규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효진이 몇 번 주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끝냈다. 네오의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충격적인 건 변함없었다.

필복만 죽여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건.....

내가 한 처참한 짐작은 불행히도 맞았다. 효진은 그 사실을 규호에게 직접 듣고 돌아왔다. 효진은 그걸 마지막 해결책이라고 믿었는데, 그녀가 만난 건 밝은 빛이 아니라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깊고 깊은 어둠이었다.

제아무리 승진과 돈이 걸려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자기 부인은 다른 남자에게 내줄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안 갈 일이었다.

게다가 효진은 규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했고 그건 나를 더욱더 격분하게 했다.

"그래서 그 자식 말대로 해주기로 했다고? 그런 소리를 듣고도?!"

"소리 지르지 마. 나도 지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그렇게만 해주면 지혜를 놓아주겠다잖아."

"그런 새끼 말을 믿어? 그래서 그 말대로 하자고? 너 정말 진심이야?"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봐. 누굴 죽이겠다느니 그런 허황된 소리 말고."

"....맘 같아선 둘 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필복이든 규호든...."

벌떡 일어났던 나는 소파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효진에게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수원에서 서울까지 돌아오면서 효진은 끊임없이 자책을 하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효진은, 지혜가 좋은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그런 놈을 만난 게 자기 탓이라고 했다. 슬퍼하는 효진에게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이라는 게 어찌 그녀의 잘못이겠는가.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인데...

다시 그 일이 생각났다.

- 사람이 말이야.. 가진 게 많아지면 뭐가 제일 좆같은지 아니?

그 날, 술집에서 형이 내게 물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넣은 투서를 손에 들고, 형은 그렇게 말했다.

- 내가 다가가는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은 일단 싫어진다. 이게 날 좋아해서 다가오는 건지 아니면 내가 가진 것을 좋아해서 다가오는 건지 몹시 헷갈리거든.

효진의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이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두고 살아온 태근이 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하는 게 기본인 삶을 살아왔다. 모르긴 몰라도 효진의 지나치게 쿨한 태도도 그와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쿨하다는 건, 기대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쿨한 것만으로 살 수 없었다. 한쪽이 쿨하다면 그 이면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지혜를 향한 효진의 애정은 내 짐작보다도 더 크고 깊었다. 그렇기에 지혜에게 가해진 이 괴로움이 효진을 쥐고 흔드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내가... 내가 나빠."

"효진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지혜가 그렇게...."

얼굴을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효진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찢어졌다. 나라고 지혜가 힘든 게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지혜 때문에 힘들어하는 효진의 모습이 날 더욱더 힘들게 했다. 예전에 소란이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 하던 내 모습을 보던 효진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제야 짐작이 됐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넌 충분히 괴로워했어."

그녀가 내게 들려주었던 위로를, 이젠 내가 그녀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효진의 곁에 앉아 어깨를 당겨 끌어안아 주었다. 효진의 등을 토닥이다 이쪽을 빤히 보는 하영과 눈이 마주쳤다. 결코 눈을 피하지 않는 그녀와의 눈싸움은 참 힘들었다.

내가 눈을 깔았다.

내 품안에서, 효진은 계속 중얼거렸다.

"그것뿐만 아니야. 난 우리 아버지가 하는 일을 그렇게 싫어하고... 경멸했으면서... 이럴 때는 아버지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어... 이런 내가 규호 그 새끼랑 다를 바가 뭐야."

"그게 어떻게 같아."

"모르겠어.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책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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