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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평소에는 그렇게 활달하고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그녀였는데 이런 일이 닥치고 나니 패닉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연신 말로 위로해줘도 소용이 없었다.
침울한 효진, 흥분한 나와 달리 차분한 사람은 하영 한 사람뿐이었다. 하영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좋을지 다소 주저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내심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하영은 날 유심히 바라보다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 옷 메이커가 어디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네에?"
이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정도가 아니라 핥아 먹는 소리냐. 우리 둘은 지금 심각해 죽겠는데 한가롭게 옷 메이커는 왜 물어보는 거야? 답할 기분이 아닌 나는 좀 모질게 쏘아붙였다.
"왜요? 남자친구에게 사다 주기라도 하시게요? 지금 여기서 그런 질문이 왜 나옵니까?"
그러나 하영은 여전히 차분했다.
"남자친구는 없고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비싼 옷은 사줄 능력이 안돼서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대체 한석 씨가 그런 고급 옷을 어디서 주워 입고 다니는 건지..."
대체 남을 뭐로 보고 주워 입니 마니 하는 걸까. 나는 뭐 고급 옷 입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 짜증도 나고 대답하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수긍했다.
"마음씨 착한 분이 길거리에서 주셨습니다. 됐어요?"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자선가거나 그 메이커의 가격을 모르는 바보, 둘 중 하나겠네요."
참나. 어이가 없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옷은 유미가 나한테 그냥 준 옷인데... 이게 그렇게까지 비싼 옷이라고?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러나 하영은 그 말을 끝으로 내게서 관심을 끊고 효진을 향했다.
"좋아. 효진. 내 말 잘 들어."
효진은 울음을 그치고 자세를 바로 했다. 하영의 목소리는 상당히 엄했기에, 진정 효과가 상당했다. 그러나 하영이 꺼낸 이야기는 정말 상상 밖이었다.
"내가 볼 때 규호의 말대로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언니! 진심이야?"
하영이 뭔가 법률적으로 이용 가능한 조언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어 찾아온 우리였다. 그러나 하영은 예상치도 못한 결론을 내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해주기로 약정했다면서? 그래야 지혜를 놓아준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한테....."
"네가 박 회장님이 하시는 일을 싫어하고 그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박 회장님의 눈을 믿어봐.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 한 번 보게 한다고 흠될 일이 생길 분이 아니니까."
"언니...."
하영이 말하는 "박 회장님"이라는 단어에는 굉장한 신뢰와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늘 차갑게 이야기하고 빠르고 건조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그녀였는데, 거의 유일하게 감정이 들어간 단어가 아닐까 싶었다.
잠깐, 이 아가씨 설마... 설마 그 미중년 아저씨에게 반해있는 건 아니겠지?
"네가 직접 하기 싫다면 내가 대신 해줄 수 있어. 그거야말로 네가 시키는 잔심부름이나 뒷조사 같은 것보단 훨씬 고문다운 일이니까."
"하아.. 모르겠어요. 알았어요. 언니한테 일임할게요. 부탁해요."
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리려는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요. 이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네?"
금테 안경을 들어 올리며 반문하는 하영에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을 이야기했다.
"양규호는 그렇다 치고... 임필복은 어떻게 할 겁니까? 그 자식은 처단하지 않을 건가요?"
그러자 하영이 한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한석 씨. 효진이도 그렇지만 당신도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난 변호사예요. 해결사가 아니라고요."
"그거나 그거나...."
"뭐가 그거나입니까. 저는 법적으로 문제되는 일만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임필복이 한 짓에 어디가 법적인 하자가 있죠?"
그놈의 법적, 법적. 전생에 무슨 법 공부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그럼 그 자식이 합법적인 짓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남의 아내를... 그렇게.... 했는데?"
"임필복이 하고 있는 짓은 간통이죠. 간통은 친고죄예요. 아내의 부정은 남편만 신고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양규호가 임 전무를 간통죄로 고소라도 하겠어요?"
"아...."
그럴 리가 없지. 그 새끼가... 일부러 자기 아내를 바친 놈인데....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으려니 변호사가 던지는 폭풍 같은 말이 쏟아졌다.
"당신들 친구 일이기 전에 남의 부부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굳이 따지고 파고 들어가면 약취 정도겠네요. 그렇지만 그 경우에는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어야 해요. 그때에 규호와 필복이 지들끼리 합의된 사항이라고 우기고 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당신들이 보호하려 하는 김지혜라는 사람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한다구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임필복을 처리하고 싶으세요?"
뭐가 이렇게 어렵나. 듣는 것만으로도 대가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젠장...."
"참고로 그만한 고생을 하고 법정에 세운다고 해도 저쪽이 좋은 변호사 하나 선임하면 벌금형이나 기소유예 감이에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깜빵 넣기가 어디 쉬운지 알아요?"
하영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 때문에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애꿎은 테이블만 내리쳤다. 차라리 이게 필복의 면상이라면... 아니면 규호의 싸대기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후려치고 싶었다.
그래도 직성이 안 풀릴 성 싶었지만....
"젠장! 젠장!! 법이라는 게 나쁜 새끼 잡아넣으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뭐가 그리 복잡하고... 또 뭐가 그리 어렵냐구요!"
하영의 차가운 눈초리를 한 번 더 받았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요. 법은 정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동물이 이룬 사회에서 스스로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강제라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규범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도덕률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요."
하도 기가 막히니까 이젠 웃음이 나왔다. 머리가 살짝 돈 사람들이 왜 머리에 꽃을 꽂고 헤벌레 웃고 다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도 지금 당장 내 머리에 꽃을 꽂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발악을 하며 괴성을 질렀다. 내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효진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구나.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잊고 있었다. 내가 위로하고 안아주어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엉뚱한 곳에 분노를 쏟고 있었다. 하영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효진과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둔 효진의 차로 돌아갔다. 유미의 차는 수원에 있는 수리점에 입고시켰기에 이 차를 타고 우리 둘이 이곳에 왔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효진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안전벨트를 맬 생각도 안 하고 있기에 내가 대신 벨트를 당겨 채워주었다. 효진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자기 방에 갈래."
늘 활기찬 그녀였기에 이런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래. 가자."
효진의 심정을 이해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자마자 그녀는 나를 찾았다. 나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어 했다. 그녀를 벗기고 지혜의 침대에 눕히면서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여 주었다. 다 잘 될 거라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이다.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할 소리였기에 얼마나 신뢰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절절한 몸짓으로 내 몸을 받아들였다.
"하악...하아....하악... 자기야... 더... 더....."
효진은 자꾸자꾸 날 요구했다.
지혜가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는 여기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서로 묻지 않았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했고 서로가 필요했다. 효진의 땀에 흠뻑 젖은 얼굴에는 쾌감도 있었지만, 슬픔도 혼재되어 있었다. 친구의 불행을 보고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다는 자괴감, 아무것도 자기 손으로 해줄 게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혜에 대한 감정을 많이 접었다고는 하나 그녀는 내 첫 여자였고 내 애인의 애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악....하아...하악...좋아...정말 좋아해...정말로...오....하악....."
엎드린 효진의 뒤에서 박아 넣으면서, 탄력 있는 효진의 엉덩이와 잘록한 허리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렇듯 서로의 사랑과 애정을 확인하고 서로의 아픔을 녹여낼 수 있는 게 섹스라는 행위인데.... 그것이 그렇게 비열하고 더러운 수단이 되어 한 사람에게 고통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아아아아아...악...항.....자기야...나...하악....하앙....."
오늘따라 효진의 신음소리가 더 컸다. 일부러 더 그러는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저건 신음이 맞다. 쾌감의 신음이기도 한 동시에 절절한 슬픔이 배어 나오는 그런 신음이 맞았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효진아...."
"안에다...해줘...그대로....빼지마...."
"으으윽!"
효진의 안으로 내 정액을 쏟아 부으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쳤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지쳤다. 교통사고로 인해 삐걱거리는 몸보다도 마음이 삐걱거려서 견디기 힘들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효진의 몸 위에 엎드린 채로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이내 옆으로 드러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효진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밥 먹으러 가자는 그녀를 보고 참 애 많이 쓴다고 생각했다. 늘 가던 기사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에 효진이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정말... 잘 되겠지? 그지?"
대답 대신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고 내 쪽으로 당겼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서로를 향한 위로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기다리며 함께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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