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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그로부터 보름 정도 흘렀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가장 강렬했던 일은 역시 유진과의 일이었다. 유미와 그러고 난 뒤, 처음으로 과외를 하러 갔다가 유진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안에 있는 게 분명한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인터폰으로 불러보았더니 나보고 꺼지라며 소리 질렀다. 그대로 돌아섰다. 막상 가려고 하니 또 문을 열고 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가란다고 진짜 가냐고 소리를 질렀다. 어이가 없어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이 녀석이 내 팔을 세게 깨물었다.
역시 암표범 맞았다. 선명한 이빨 자국을 보며 내가 어처구니없어 하니까 유진은 대번에 콘돔을 썼냐고 물어보았다. 황당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맞은편 팔도 깨물었다.
"아얏! 인마!!! 넌 날 잡아먹을 셈이냐!"
"흥! 엄마한테 이미 잡아먹혔으면서 뭘 엄살이에요. 엄살은."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거잖아."
"암튼요!"
그러면서 자기 엄마는 아직 수술을 안했으니 만약 동생이 생기면 알아서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유미는 나를 엔조이 상대로 생각한다는 말을 해줄까 싶다가 화만 더 돋우게 될 것 같아 참았다.
사실 그 날 네오의 카페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막상 ROSE에 가면 유미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처럼, 그러니까 관계를 가지기 전처럼 지내고 있었다. 호칭은 부드럽게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몸을 섞진 않았다. 차를 긁어먹은 이야기를 했더니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고 할 뿐이었다. 수리비를 내려고 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몸으로 라도 갚으라는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유진은 과외를 계속 받았다. 녀석은 날 더 이상 잡아먹지 않는 대신 전보다 훨씬 더 본격적으로 수업을 칼같이 진행하는 과외를 시작했다. 학교 진도는 물론이고 어디선가 영어로 된 문제집까지 구해 와서는 그걸 풀겠다고 도와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히 녀석의 목표는 S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외국에 있는 대학으로 바뀌었다.
이유를 묻자 녀석은 날 힐끔 보더니,
"꼴 뵈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아예 한국을 뜨려구요."
라고 답했다. 계집애가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다.....
나중에 효진이 내 양쪽 팔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빨 자국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나는 암표범이 그랬다는 대답 외에는 하지 않았다. 효진은 날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나에게 신경을 덜 쓰고 있었다.
하영에게 규호의 일을 들었다. 그는 지혜가 그동안 필복과의 부정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이유로 이혼을 요구했다고 했다. 지혜는, 위자료는 물론 재산 분할도 엄두를 못 내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그렇지만 지혜는 남편에게 도리어 사과를 하며 순순히 이혼을 받아들였다. 이혼 협의 과정은 하영이 맡아서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규호를 박 회장에게도 선보였다. 규호가 박 회장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박 회장은 규호를 높이 평가했다고 했다.
지혜는 춘천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효진은 거기에 출퇴근 도장을 찍느라 우리 집에 발걸음이 뜸해졌다. 여자 친구의 원래 애인이 납셨으니 나한테 뜸한 거야 이해를 하지만 어쩐지 섭섭하기도 했다.
춘천에 가볼까 싶기도 하다가 두 남자에게 거듭 상처를 입은 지혜가 남자라면 꼴도 보기 싫을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간만에 하영의 사무실에 찾아가 규호의 처리를 물었다.
"그래서 규호 그 자식은요?"
하영은 박 회장의 눈썰미를 믿는다고 했다. 박 회장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가 규호를 박살내주지 않았을까? 이런 기대감이 막연하게 있었다.
그러나 하영이 전한 소식은 정말 뜬금없었다.
"그는 K자동차 회사의 영업이사로 승진했습니다."
".............네?"
내 귀를 의심했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녀석이었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저째? 내가 기가 막혀서 하영을 쳐다보니 그녀는 그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고 똑똑하게 대답했다.
"제가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박 회장님이 힘을 좀 써주셨죠."
"이봐요. 하영 씨. 당신은 대체..."
기가 막혀서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틈을 기다리지 않고 하영은 지 할 말을 했다.
"아직 일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괜히 끼어 들어서 일 망치지 말아 주세요."
망쳐? 누가 뭘 어떻게 망친다는 거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외쳤다.
"아니. 그래요. 그놈에게 뭔가 미끼를 주어서 지혜를 떼어놓게 하겠다는 거, 그것까지는 동의를 했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가 있죠. 규호 그 자식이 여태 무슨 짓을 해온 지 몰라요? 모르지 않잖아요! 뻔히 알면서 그렇게 해준다고요? 정말로?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제가 한석 씨 놀려서 뭐하겠습니까?"
"저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요. 대신 제가 바라는 건 그놈을 작살내는 거라구요!"
아무리 소리쳐도 하영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신의는 있는 놈입니다. 약속대로 이혼을 해주었잖아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난리를 치며 하영에게 대들려고 하자 그녀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을 불러다 나를 쫓아냈다. 그녀의 사무실 앞에서 욕을 한바탕 해주고 돌아섰다.
그리고 저녁에 ROSE에 가서 일하는 동안은 유미에게서 필복의 처리 방법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녀는 필복의 딸이 여기서 일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통해서 그놈에게 엿 먹일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의 간절한 기대는 유미의 무심한 말투에 산산이 무너졌다.
"K자동차 회사가 대물물산에 투자하도록 좀 도와주었어."
"........유미가?"
"뭐, 내가 했다기보단.... 네오의 도움을 좀 받기도 했고 이래저래 아는 사람 통해서 하게 해줬지. 조만간 대규모 투자단이 꾸려지고 거기 단장으로 임 전무가 취임할 거야. 부사장 대우로."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까 하영도 그렇고, 다들 왜 이러지?
"그건 좌천이 아니라 영전이잖아! 뭐야, 유미.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음... 내가 자길 왜 놀리겠어. 이렇게 귀여운데."
내 턱을 잡고 키스를 하려기에 고개를 홱 돌려서 뿌리쳤다. 더 이상의 관계는 없지만, 그녀는 날 보고 여전히 자기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K자동차 회사면 우리나라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회사잖아. 그런 회사가 기껏해야 중견 기업인 대물물산 정도에 투자를 한다고... 그게 가능해?"
"사업이라는 건 참 신비해서 말이야.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많이 있더라고. 일이 잘 되면 대물물산이 K자동차 그룹에 편입될 수도 있겠지. 아주 성대하게 나팔 불면서 말이야. 주식도 대번에 몇 배가 되겠지. 혹시 주식해?"
기가 막혔다. 이 여자는 일개 술집 여사장 아니었나? 발이 좀 넓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K자동차 회사의 투자여부를 결정하게 하는데 자신이 도움을 줬다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지만, 문제는 어째 그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유미는 별로 자랑하는 투로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일을 말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늘 그렇듯이 생긋 웃으면서 가볍게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녀를 어느 정도 겪어보고 느낀 거지만....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돌려서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이 있을 뿐.
그나저나 임 전무... 아니, 임 부사장? 유미로서는 그 자식이 한 짓을 모르는 게 아닐 텐데도 그런 도움을 주었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씨발."
입에서는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러자 유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그런 터프한 모습 보여줄 때마다 내가 설렌다는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 손 치워."
"어머,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새초롬하게 눈을 뜬 유미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에게 이렇게 대하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기분이 너무 더러웠다.
"당분간... 여기 오지 않겠어."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유미는 나를 잡지 않았다. 사실 예전부터 나 없어도 잘 돌아갈 가게였다. 내가 없다고 해서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대로 ROSE를 나왔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택시를 하나 잡았다. 조수석에 앉아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판교로 가주세요."
"시외라서... 제법 나올 텐데요, 손님."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운전수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빨리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했고 미터기의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서울을 벗어나 한참을 더 달리면서 기사가 물었다.
"판교에는 어쩐 일로 가시나요? 거긴 아무것도 없이 허허벌판만 있는 동네인데."
"판교로 들어가는 도로 옆에 카페 하나가 있어요."
"들어가는 도로 옆에 카페라구요? 글쎄요. 거기에 그런 게 있던가?"
"한 달 전쯤에 갔었어요. 대략 위치가...."
이정표를 올려다보며 방향을 지시했다. 택시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를 몰았다. 가로등도 별로 없어 어두운 도로를 한참 달렸지만, 내가 바라는 표식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
"손님. 여기 맞나요? 여긴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요?"
"아니요. 분명 여기에 카페가...."
한 달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에 나와 택시가 서 있었다.
"저기, 혹시 요금 낼 돈은 가지고 계신 거죠? 여기까지 꽤 나왔습니다만... 일단은 시외 요금을 주셔야..."
기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일단 여기까지 나온 요금을 지불하자 군소리가 쏙 들어갔다. 기사에게 기다려달라고 부탁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 시간이면 불을 켜고 있을 텐데... 아!"
한참을 둘러보던 나는 가까스로 카페를 발견했다. 해가 지고 어두운 이 시간에, 당연히 불을 환하게 켜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러질 않아 눈에 띄지 않았다.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살피니 아주 저 멀리 도로 옆에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건물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기사를 재촉하여 한참을 더 달려 그곳으로 향했다.
"아, 여기 이런 게 있었군요."
기사도 감탄했다. 그러나 카페 앞에 도착한 나는 당황했다. 불이 꺼져 있는 그곳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해가 졌다고는 하나 이제 막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벌써 문을 닫았단 말인가? 택시에서 내려 카페 문 앞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컴퓨터로 가득했던 테이블도, 그 이상한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쇠사슬로 꽁꽁 묶인 문손잡이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비어있는지 꽤 된 것 같았다.
택시기사가 뒤에서 날 불렀다.
"손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그냥 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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