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39화 (43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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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아, 아뇨. 좀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미터기 꺾고 기다리셔도 됩니다."

기사는 또 눈에 띄게 툴툴거리며 차로 돌아갔다. 돈밖에 모르는 인간 같으니라고... 지금 나는 황당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그저 돈돈돈인가.

그 후로 한참동안 카페 주변을 돌며 확인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한숨을 쉬며 차로 돌아갔다. 운전석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던 그가 핸들을 도로 잡았다.

"서울로 돌아갈까요?"

"네. 그래주세요."

시트에 몸을 파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차가 출발하자 카페가 멀어져갔다.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이상한 안경을 쓰고 외투를 뒤집어쓴 네오라는 여자. 그 여자가 컴퓨터를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회사 내부자료 같은 것이 아주 간단하게 드러났다. 컴퓨터는 나도 좀 배웠지만, 통신은 잘 몰랐다. 그렇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장비도 그렇고, 그 정도의 해킹실력이 결코 범상한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몇 가지 사실만으로 규호와 필복의 의중을 꿰뚫어보는 직관력도 가지고 있었다.

본인 입으로 자랑하는 정보전문가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 사실 오늘만 해도 나 역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하영과 유미에게 연락처를 물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녀들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하영에게는 욕을 하다 사무실에서 쫓겨났고 유미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다시 돌아간다고? 꼴 사납기 그지없었다.

"하아... 젠장...."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칠 것 같았다.

'효진이한테나 가볼까.....'

요새 춘천에 살다시피 하는 효진이니 아마 지금 전화를 해도 바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마 불러내야 할 텐데 지혜랑 있는 효진이이가 내 전화에 쉽게 나오려나....

자신이 없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은 도로 집어넣었다. 실내경을 통해 내 안색을 살핀 모양인지 택시기사가 말을 걸었다.

"손님, 뭐가 잘 안 되시는 모양이죠?"

"그래 보이나요?"

기사는 라디오 볼륨을 조금 줄이고 내게 말을 붙였다.

"예. 뭐, 아까 가신 곳도 문 닫은 모양이고... 표정도 꽤 안 좋아 보이시네요."

"하아. 기사님이 보시기에도 그런가요."

"아까부터 한숨을 푹푹 쉬고 계시니 더 그러네요. 땅 꺼지겠습니다."

아저씨. 여기 땅이 어디 있습니까. 자동차 바닥이 있는 거지. 툴툴거리려다가 그냥 좋게 대답했다.

"자연보호를 위해 숨을 좀 참겠습니다."

"하하하. 재미있는 분이네요."

기사는 껄껄 웃었다.

"그냥 좀....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대로 허탕인가 보네요."

"그런 아무것도 없는 데에 사는 사람도 있나요? 어지간히 이상한 사람인가 보네요."

"그러게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긴 했는데.... 물어볼 게 좀 있었거든요."

기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차를 몰았다. 어느덧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왔다 갔다 적지 않은 거리를 달린 터라 지갑에 있는 돈을 한 번 슬쩍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미터기에 찍힌 금액과 비교해보았다. 가까운 전철역에서 내려달라고 해야 할 성 싶었다.

그때였다. 방금 라디오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자..잠깐만요. 기사님!"

"왜 그러십니까?"

다급한 내 태도에 놀란 듯, 그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라디오요. 라디오 좀 키워주세요!"

기사가 볼륨 휠을 돌려 소리를 키웠다.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재계 랭킹 8위인 K그룹은 끝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부도방지협약 대상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는 사실상의 부도처리이며 재계는 협력업체의 연쇄부도 및 자금 경색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증폭되지 않도록...."

"허허. 이거 큰일이네요. 이 차도 K자동차회사에서 만든 건데 말이죠. 부품 조달 같은 건 잘 되겠죠?"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나는 뒷좌석으로 털썩 앉았다. 하영이나... 유미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녀들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영은 그랬다.

- 그래서 규호 그 자식은요?

- K자동차 회사의 영업이사로 승진했습니다.

그리고 유미는,

- K자동차 회사가 대물물산에 투자하도록 좀 도와주었어.....조만간 대규모 투자단이 꾸려지고 거기 단장으로 임 전무가 취임할 거야. 부사장 대우로.

그랬다. 그랬었다. 하아. 이거 너무 엄청난 일이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잔뜩 엉킨 생각은 끄트머리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실타래보다도 더 어지러웠다.

지 아내를 팔아먹으면서까지 필복에게 줄을 대길 원했던 규호라는 놈의 최종 목표는 효진을 통해 박 회장과 선이 닿는 것이었다. 그게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건지 모르겠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박 회장과 알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규호는 일개 영업점 차장에서 영업이사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다는 거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말이다.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박 회장이라는 사람이... 그 정도로 대단한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떤 회사에 영향력을 미쳐서 일개 차장을 이사까지 승진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회사를 흔들 수도 있다는 거 아닐까. 설마 K자동차 회사의 부도에 그의 손이 닿아있는 걸까.

의문은 또 있었다. 유미는, 유미는 대체 무슨 수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임필복이 있는 대물물산이 K자동차 회사의 투자를 유치했다지만, K사가 망해버린 지금 그 사실이 대물물산에 얼마나 큰 타격이 될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투자단의 단장이라는 임필복은 엿을 먹어도 제대로 퍼먹었다는 거다.

"기사님. 저기... 강변 역 앞에서 세워주세요."

"네."

전철역 앞에 날 내려놓고 택시가 떠났다. 휴대전화를 들고 왔다 갔다 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단축번호 1번을 길게 누른다. 신호가 갔다. 그러나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 신호가 한참 갔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달칵-

연결되었다.

"어, 자기야! 뉴스 봤어?!"

"........"

통화는 연결되었지만, 상대가 말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말을 쏟아냈다.

"K자동차 회사 뉴스 말이야! 봤냐고! 설마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만든 거야? 아니지? 그렇지? 아무리 너희 아버지라고 해도 규호 그 자식 하나 엿 먹이자고 그렇게 까진 하지 않으셨을 꺼 아냐. 왜 말이 없어! 대답 좀 해봐! 나 방금 라디오에서 그거 들었는데 깜짝 놀라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대방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

분명 효진의 전화번호가 맞다. 그러나 효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모르는 목소리냐. 그것도 아니었다.

"지혜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분하기 그지없는 지혜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쓸쓸한 기분이었다.

"한석이지? 방금 한 이야기... 무슨 말인지 물어봐도 돼?"

"아니... 네가 어떻게 그 전화를...."

"효진이는 씻으러 갔어.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해서 말야. 그래서 내가 받은 거야. 그러니 이제 내가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데?"

"지혜야 그건 그러니까...."

지혜가 선량한 성격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바보라는 뜻은 아니었다.

"너희가 우리 집에 왔다가고, 얼마 되지 않아 규호 씨가 나한테 이혼해달라고 하더라. 임 전무 이야기를 꺼내기에 명백하게 내 잘못이니까 그대로 서류에 싸인을 해줬어.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규호 씨가 승진도 하고 잘 된다고 하길래 난 마음속으로 응원을 했어. 아무리 나랑 안 좋게 끝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 전남편이니까.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지혜야. 그건 말이야."

"너희들... 대체 나 몰래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규호 씨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그 사람.. 불쌍한 사람이야. 내가 그러고 다녔다는 거 알고 얼마나 상처받았을 텐데..."

"지혜야!"

속에서 열불이 났다. 지혜는 명백하게 모르고 있었다. 규호가 뒤로 임필복과 어떤 밀약을 맺고 있었는지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효진이가 나랑 이혼했다고 앙심을 품고 그렇게 한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가 나중에 효진이한테 알아듣게 이야기할 테니..."

"그런 게 아니라고! 모르는 건 바로 너야! 이 바보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냅다 질러버렸다.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되겠지만, 지혜의 터무니없는 오해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자기를 둘러싼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혜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그건.... 그러니까....."

가슴이 답답했다. 말해야 하나. 말할 수 있을까. 말할 필요가 있는가.

"무슨 전화야?"

수화기 너머 작지만 분명한 효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효진이를 바꿔줘!"

"......알았어.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넌 나에게 아까 그 말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야 돼."

"알았어. 알았으니까..."

효진이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녀에게 K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깜짝 놀랐다.

"너도 몰랐어?"

"난 전혀.... 그냥 하영이 언니가 잘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어. 아예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도 했었고."

효진은 곁에 지혜가 있기 때문인지 규호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알아들었다.

"너.. 지혜에게 이야기했었어?"

"전혀."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건...."

"내가 갈게. 설명하게 해줘. 지혜에게....... 영원히 비밀로 할 순 없잖아."

"한석아...."

갈팡질팡하던 발걸음을 멈춘다. 방향을 정했다. 전철역을 등지고 버스터미널로 들어갔다. 1층 매표소 앞에 서서 시간표를 살폈다.

"나 지금 동서울이야. 15분 후에 차 있다. 직행이니까 두 시간 안에 도착할 거야. 미안하지만 터미널에 마중 좀 나와 주라."

효진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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