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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444화 (44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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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박 회장을 만나러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처럼 메이드들이 몰려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지혜는 그들 중 한 명에게 부탁해 쉬도록 했고, 나와 효진만 박 회장 서재로 들어갔다.

딱 봐도 무척 비싸보이는 고급 책상을 사이에 두고 회장과 우리 둘이 마주 앉았다. 효진은 선언했다.

"나, 얘랑 결혼하고. 그리고 지혜까지 해서 셋이 살 거야."

회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 앞에서도 효진은 당당했다.

"아빠가 원하는 대로 남자랑 결혼하는 거잖아. 그 이후는 내가 뭘 하고 살든 상관없을 테고."

회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난 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한참만에 그는 입을 열었다.

"네가 일단 결혼만 하고 나면... 그 이후는 내 알 바 아니다.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 말에 순종해야 한다."

우와... 외모는 젊어보여도, 말하는 건 진짜 할아버지였다. 하긴, 그의 나이는 할아버지 급이 맞기는 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회장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더니 이어 말했다.

"네 남편될 사람도... 네 그 황당한 의견에 동의한 거냐?"

회장이 이렇게 말하자 효진은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한석 군도 사실은 지혜랑....!"

이쯤에서는 미래의 남편이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효진이 옆구리를 살짝 꼬집어 입을 다물게 했다. 효진이 굳이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 맥락이 이해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고리타분한 성격을 평생 고칠 수 없을 것이다. 효진도 여기에 부단히 싸워왔지만, 이제는 어떤 한계에 봉착했다.

그러니 자기 아버지의 정책에는 순응하면서도 그러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그래서 내가 필요한 거였다. 물론 그런 효진이 싫다거나 지혜까지 해서 셋이 사는 게 결코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수단이 되어버린 후에는 내 의지가 반영될 틈이 거의 없어서 그런 게 좀 아쉬웠다.

딸의 선언을 듣고 할 말을 잃은 회장은 딸 설득하기를 포기했는지 내게 상의했다.

"그나마 자네가 가장 정상인 같군.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아들이든 딸이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다고 그러고, 누구 하나 내 맘 같지 않아.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에서는 깊은 체념이 묻어났다. 회장은 효진에게 나가보라고 일렀다. 효진은 나 혼자 남겨두고 서재를 나갔다.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에 있는 양주를 꺼내왔다.

"술 좀 하는가?"

"네."

박 회장이 딴 양주는 독했고 그 술의 힘을 빌어 참 많은 것을 털어 놓았다. 그와 밤늦도록 나와 효진의 관계, 효진과 지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었다. 그중에는 우리 세 사람의 잠자리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효진이도 자네 씨를 받긴 받는다는 거군."

어떻게 결론이 그렇게 납니까만은.... 그는 한 가지 전제조건을 달아 우리의 관계를 허락했다.

"어디 멀리 보내줄 테니 그 사이에 일단 효진이를 임신시키게. 그러면 두 사람의 결혼을 진행해주지. 내 약속함세."

그냥 듣기에는 굉장히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절박했다. 그는 끝끝내 자기 딸이 노말한 성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했고 그 증거를 보고 싶어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씨"에 대해 굉장히 집착하고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후손 문제에 엄청나게 집착한다고 하던데,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는 결국 지혜가 효진의 곁에 머무는 것에 대해 굉장히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막지는 않았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절박한 그런 조건을 수락하고 나니, 나와 효진 사이는 그리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았다.

박 회장의 서재에서 나오자 태근이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잘 되었냐고 물어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나보고 "매제!"라고 대번에 부르기 시작했다. 좀 어색했지만, 나도 "형님"이라고 불러주었다.

내 "형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러면 나는 아무 문제없이 선생질에 매진할 수 있겠군. 으하하. 고맙다, 한석아. 아니, 이제는 매제라고 불러야지. 아, 이거 입에 잘 안 붙네. 매제... 난 그냥 이름 부르면 안 될까?"

"그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문제라뇨?"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그러자 태근이 형은 도리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서 날 가리키며 되물었다.

"이제 우리 아버지 일은 네가 이어 받을 거잖아. 그러려고 효진이랑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일 하시는지도 모르는데 뭘 이어받고 자시고가 있어요. 그리고 제가 효진이랑 결혼하는 건...."

아니지. 이건 여러 사람에게 떠벌릴 만한 이유가 아니지. 박 회장이야 오해를 하고 있었으니 설명해야 했고, 그런 이유를 달아 결혼을 허락하고 지혜도 묵인하고 그랬다지만 .... 제아무리 지나치게 쿨한 성격의 형이라고 해도 자기 동생이 또 다른 여자와 지내기 위해 날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긴 어려울 지도 몰랐다. 때가 되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라 주저되었다.

그러나 형은 이런 나의 주저함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아, 물론 둘이 좋아서 하겠다는 거 말리지는 않겠어. 오히려 환영할 정도야. 그치만 나도 너한테 일찌감치 이야기한 거 있잖아. 내 장래희망."

"선생님이요...?"

이제는 아주 습관처럼 헤드락을 걸려 하기에 가볍게 형을 밀어내며 되물었다.

"그래, 인마. 알아들었으면 협조 좀 해줘봐. 우리 아버지가 좀 거친 일을 하긴 하지만.... 뭐, 누굴 죽이는 일은 아니니까 금방 배우게 될 거야. 나도 곁다리에서 좀 구경은 해보았지만... 에휴, 도무지 모르겠더라구. 나는 그런 일을 할 타입이 아냐. 절대로."

"대체 무슨 일 하시는 데요?"

"어라? 너 정말 몰랐구나. 우리 아버지.... 돈놀이 하신다."

....어째 형의 말투만 들으면 박 회장이 손가방 하나 옆구리에 끼고 시장 돌면서 상인들에게 일수 돈 걷어와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럴 리가 없잖아!! 모르긴 몰라도 그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지켜보았던 나로서는 태근이 형이 무심하게 말하는 "돈놀이"라는 것의 규모가 어떨지 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거실에 오가며 집안 일을 하고 있는 메이드들을 보면서 형에게 다시 물었다.

"그때 무슨 아카데미인가.. 그런 거 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아, 그건 취미지. 여자 건드리기 좋아하는 우리 아버지의 고약한 취미."

아들에게도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로... 박 회장의 엽색은 유명한 모양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금 박 회장의 부인, 그러니까 앞으로 내 장모님이 될 사람은 태근이 형보다 서너살 많은 정도 밖에 안 되는 젊은 분이었다. 무려 네 번째 부인이라고 했다.

첫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 태근이 형이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 효진이었다. 앞의 두 부인은 각각 병과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세 번째 부인은 자기 자식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고 했다. 지금의 부인은 효진이가 고등학교 때 얻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 자기 집이 시끄러운 게 싫어서 지혜네 집에 종종 갔었다는 효진의 말을 아주 예전에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 밖에도 박 회장이 건드린 여자는 셀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태근이 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보았다.

"너... 진짜 사회에 관심이 없구나...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쑥스럽지만, 우리 아버지, 유명할만큼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태근이 형은 어떤 회사 이름 하나를 말했다.

"네? 거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회사 이름이잖아요. 그게 왜..."

태근이 형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거... 우리 아버지 꺼야. 뭐... 여러가지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실소유주나 이런 건 다 감추고 있지만, 어찌되었건 우리나라 회사 중 큰 거 대부분은 우리 아버지 돈으로 돌아가는 회사거든. 너, 진짜 몰랐냐?"

"뭐라구요? 아까는 돈놀이라면서요....?"

"응. 기업 같은 거 사고 팔고... 그런 거 하는데. 그 뭐냐. 지난번에 자동차 회사 샀다가 나중에 도로 팔기도 했잖아."

"뭐어어어!"

그게 어딜 봐서 돈놀이야! 너무 터무니없을 정도로 간략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축소시켜 아무렇게나 말하는 태근이 형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 그런 일을 나보고 하라고요?"

"그러게. 전부터 나보고 하라고 그래서 절대로 안 한다고 했더니 효진이나 하영이 시키는가 싶었거든. 근데 아버지가 효진이에게 기대 끊었다가 다시 네가 들어오니까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아. 나중에 하영이에게 물어봐. 다 설명해줄 거야."

입이 딱 벌어져서 제대로 닫히질 않았다. 태근이 형은 내 표정을 보며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을 들으며, 내가 어떤 집안에 사위로 들어와 버렸는지 엄청나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일까.

"뭐가 그렇게 웃겨?"

복도 끝에서 효진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효진이 곁에는 지혜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 너희랑 살 일이 웃겨서."

그러자 효진도 마주 웃었다. 속도 좋아, 이 녀석.... 그렇게 나와 효진, 그리고 지혜는 서로의 약속에 따라 함께 지내기로 했다. 너무 크고 위험한 결정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르게 해버린 것 같은 느낌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일주일 후, 우리 세 사람은 어떤 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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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더블데이트가 444회까지 왔습니다...

여자들 만나느라 샤 샤 샤

...........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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