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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영어 문법이나 회화에는 크게 자신이 없었는데,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한 걸로 보아 제대로 맞게 말한 것 같았다.
물론 아주 엄밀히 말하자면... 내 파트너는 효진이고 효진의 파트너가 지혜인 셈이지만... 그렇게 복잡한 관계를 영어로 이야기할 정도로 내 실력이 출중하지 못 했다. 설명하기 어렵기도 해서 그냥 그렇게 말해두었다. 둘 다 내 여자라고 말이다. 두 여자한테 번갈아 박아댈 수 있으니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 이후로도 우리 세 사람이 다니다가 그 남자를 다시 만나면 그는 나에게 엄지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 보이곤 했다. 그렇게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보지 말아줘.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리잖아.
그리고 대체 그가 어떻게 소문을 내고 다녔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우리 셋의 관계는 승객들에게 파다하게 알려진 후였다. 크루즈 승객의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나이가 있는 만큼 보수적일 거라 지레 짐작하며 우리를 이상하게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그 세대 사람들에게는 남자가 두 여자 두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히려 나를 능력자로 보며 칭찬을 마지않았다.
그때마다 효진이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능력자는 나라고! 제대로 확 말해버릴까?"하며 협박했지만, 정말 그러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나는 한국의 유력한 기업의 젊은 사장 정도로 소개되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효진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왜 사장이야? 언제부터?"
효진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마도, 이 여행 끝나고 돌아가면, 그때부터?"
태근이 형이 말했던 게 생각나버렸다... 이것이 내 운명인가 싶었다. 빠른 체념은,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좋은 방법이었다.
크루즈 여행은 재미있으면서도 지루했다. 중간 기착지를 들르면 2박 정도 머물렀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나라, 다양한 항구를 맞이하는 건 큰 재미였다. 그러나 항구를 떠나 다음 목적지로 향할 때는 망망대해 바다를 한참 떠다녀야 했고, 기상이 악화되기라도 하면, 가까운 항구에 들어가 며칠씩 정박하기도 했다.
무료한 승객을 달래기 위한 파티가 밤마다 열렸는데, 우리 세 사람은 거기에서 꽤 주목받는 존재였다. 보기 드문 젊은 사람이기도 한데다가 한 남자가 미녀 두 사람을 "거느리고" 다니는 게 퍽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나와 지혜는 선상 파티에 익숙지 않아 처음에 좀 힘들었는데, 효진은 이런 일에 굉장히 익숙했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잘 이끌었다.
그녀가 준비한 - 엄밀히 말하면 선미가 준비한 - 여행 가방 꾸러미에는 이런 파티를 위한 복장도 착실하게 담겨 있었다. 영화제에 참여하는 여배우들이나 입고 다니는 줄 알았던 그런 복장은 실존하는 옷이었다.... 게다가 효진과 지혜에게 아주 꼭 맞게 재단되어 있었다. 과감하게 파인 등이나 가슴을 겨우 가리면서 가슴골을 깊숙하게 표현하는 드레스를 보며 지혜는 기겁했지만, 효진이 입히니 어쩔 수 없이 입고 파티에 참여했다.
그런 지혜에게는 정중하면서도 꽤 친밀함을 표하는 남자들까지 생겨났다. 저 가슴 크기는 확실히 글로벌한 사이즈이긴 했다. 남자가 옆에 뻔히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여자에게 굉장히 잘 들이댔다. "누구의 여자"라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여자 자체에게 의견을 물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지혜는 거절하는 방법이 익숙하지 않아 곤욕을 치를 정도였는데, 결국 효진이 지혜와 항상 같이 다니는 걸로 문제를 해결했다.
유럽 일정의 마지막은 프랑스였다. 효진은 뭔가 준비한 게 있다며 전부터 꽤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오며가며 친해진 많은 사람들을 우리의 "결혼식"에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에 도착하자, 선장에게 부탁하여 하루 일정을 얻어내 다 같이 상륙했다.
미리 준비된 버스가 승객을 실어 날랐다. 항구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오래되고 아담한 중세 성채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샤토 데스클리몽". 효진은 여기서 결혼식을 열기로 결심했다. 나야 뭐, 아내가 정하는 대로 따라가는 선량한 남편이라 그녀가 결정하는 대로 따랐다.
준비실에 놓인 커다란 거울 앞에서, 나와 효진은 서로의 모습을 점검해주었다. 효진에게 물어보았다.
"정말... 할 거야?"
"응. 그때 몹시 분했으니까."
효진이 말하는 "그때"라는 건 지혜가 결혼하던 날을 말한다. 신부로서 입장하는 지혜 옆에 자신이 없었다는 게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하아. 정말이지 너란 여자는...."
"정말 좋다고? 그치? 그렇게 말한 거지? 우리, 남편!"
효진은 내게 확 안기며 입술을 맞추었다. 효진을 한 번 토닥여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입어보는 연미복이 몹시 불편했다. 제비꼬리처럼 늘어진 뒷부분도 이상하고 목을 단단히 죄고 있는 나비넥타이도 좀 풀렀으면 좋겠다. 그러나 효진은 안 된다며 더 단단히 매주었다. 나 역시 그녀의 나비넥타이를 고쳐 매주며 말했다.
"우리, 남편이라는 건.... 어째 느낌이 묘한 걸?"
"왜 묘해?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물론 그렇다. 한국어의 표현에서 자기 것을 가리키는데 굳이 "나의"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우리 학교, 우리 집, 우리 가족... 공동체 생활이 개인보다 강조되었던 문화의 한 단면이지만 지금 효진이가 사용할 때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내 남편"이 아니라 "우리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두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남편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때, 성에서 일하는 사람이 와서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알려주었다. 한쪽 벽에 쳐있던 커튼이 걷히고 준비를 마친 "우리의"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성하고 화사한 스커트 하단이 바닥 전체를 덮고 있는 옅은 분홍빛의 드레스였다. 등은 물론 앞부분을 대담하게 파내어 살색이 한껏 드러났다. 한데 모아 올려붙인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몹시 도드라졌지만, 그렇다고 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체적인 분위기에 기품이 느껴졌다. 면사포를 살짝 들어 올리자 가볍게 눈을 감고 있는 지혜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 드레스는 이 지방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드레스라고 했다.
"와아! 역시!!! 이걸로 하길 잘했어!"
지혜의 난감한 표정과는 달리 효진은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지혜는 들고 있던 부케로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
"정말 이걸 꼭 해야 하는 거야? 가슴이 너무 파였는데?"
"그게 포인트니까."
효진의 주장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지혜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효진은 지혜 옆에 서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아까도 이야기했잖아. 난 니가 신부입장 할 때 옆에 서지 못한 게 너무 분했다니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처음 입어보는 것도 아니면서 부끄러워하기는."
효진이 팔을 내밀었다. 지혜는 살짝 손을 들어 그 팔에 손가락을 얹었다. 나 역시 효진의 반대편, 지혜의 옆에 섰다. 깊고 깊은 그녀의 가슴골을 유심히 살펴보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역시 해보신 분이라 그런지 자세가 나오네."
"너어, 놀리기야?"
"하하. 어차피 효진이랑 나는 한국 가면 또 해야 하니까 말야. 오늘 잘 가르쳐주세요. 선생님."
이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면, 아마도 박 회장이 준비한 성대한 결혼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지혜 대신 효진이 신부로 서게 될 것이고, 난 신랑 자리에 서야 한다. 오늘은 효진의 한풀이 예식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있을 진짜 결혼식을 위한 예행연습이기도 했다.
지혜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효진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우리의 준비가 끝나자 곧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턱시도를 입은 남녀를 사이에 두고 지혜의 두 번째 신부 행진이 시작되었다.
일명 '루이 16세의 거실'이라고 불리는 살롱에는 크루즈의 승객들이 손님 자격으로 가득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 반, 신기함 반으로 빛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결혼식을 찍어대는 사람도 많았다. 지혜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효진은 뭐가 그리 신 나는지 손을 들어 인사까지 해가며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신부님이 있는 단상까지 나아갔다. 금박으로 화려하게 수가 놓인 옷을 입은 성직자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는 신랑 두 명과 신부 한 명이 서 있는 기묘한 결혼자들을 보며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식순에 따라 결혼식을 진행했다.
프랑스 말이라 당연히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우리 셋은 우리 셋끼리 떠들고 있었다. 승객들도 그렇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효진은 가족계획을 시작했다.
"애는 어떻게 할까? 나 하나, 지혜 하나 낳으면 될까?"
효진의 말에 지혜가 기겁했다.
"나도 낳으라고?"
그러자 효진이가 왜 아니냐는 투로 선선히 대답했다.
"응. 난 지혜 자식도 한 번 보고 싶어. 귀여울 것 같아. 여자애면 크면서 얼마나 가슴이 훌륭하게 자라날지 구경도 해보고...."
오, 신이시여. 저런 터무니없는 성희롱 소리를 신성한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내려쬐고 있는 교회에서 지껄이고 있는, 제 마누라 될 사람을 용서하소서. 저도 저런 생각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난 변태가 아니니까.
효진은 어차피 키워줄 사람은 다 있으니 기왕 낳을 거 많이 낳자고 떠들고 있었고 지혜는 그런 효진을 달래어 가까스로 한 사람당 둘 정도만 낳기로 합의를 보았다.
아니, 그게 합의로 될 문제야... 일단 씨 뿌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난 뭐야. 그럼 조만간 애 넷 딸린 아빠가 될 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우리 애들에게는... 엄마가 둘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괜찮....겠어?"
살짝 부끄러워하며 날 올려다보는 지혜의 표정을 보니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릴게."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고 있는데, 앞에 있는 신부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뭔가 이야기했다. 못 알아듣고 멍하니 있자니 입술을 내밀며 맞추는 시늉을 했다.
아하, 그거구나. 내가 깨닫는 동안 이미 효진은 지혜의 허리를 홱 꺾어 진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하객 석에서는 웃음과 환호가 터져 나왔고 성직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효진은 지혜를 놓아주었다.
"자! 이번에 자기가."
다시 한 번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찾을 것도 없이... 효진은 지혜를 내게 임대했다. 지혜는 이미 어느 정도 체념한 듯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미 촉촉이 젖은 그 입술을 향해 내 입술을 가져갔다. 맹세의 입맞춤이 오갔다. 짧지만 뜨겁게.
지혜와 내 입술이 떨어지자, 이젠 효진이 두 팔을 벌려 내게 말했다.
"그리고 이번엔 우리가 해야겠지?"
내가 손을 뻗으며 말하자 효진이 웃으면서 안겨왔다. 비록 둘 다 남자옷을 입고 있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웨딩드레스야 뭐 돌아가면 입게 될 테니 상관없겠지. 입을 맞추기 직전,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함께, 살아가자."
"응."
입술을 겹쳤다. 다시 한 번 환호가 터져 나오고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며 우리의 시작을 축복했다. 너와 나만이 아닌, 우리 셋의 시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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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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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 박효진 Rout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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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보내는 프랑스에서의 밤.
루트 6 중간에 있었던 일 몇 개,
그리고 몇 가지 이야기를 짧게 전해드리고, 그 후에 더블데이트 연재를 좀 쉬겠습니다.
제가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어서 얼마나 쉴지는 모르겠네요.
빨리 마무리하고, 더블데이트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이제 전체 루트에서 남은 건 외전 몇 편과 일명 "명희" 루트라고 되어 있는 루트 1과 2입니다.
몇 년 전, 더블데이트 처음 연재할 때 괜히 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가 굉장히 욕 먹은 기억이 납니다.
루트 1과 2를 접하는 분들은 모쪼록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주시고요....
암튼,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