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49화 (44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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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이 떠나고 난 뒤, 유미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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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이 떠나고 난 뒤, 유미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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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이 떠나고 난 뒤, 유미는 한숨을 쉬었다. 카페 문이 부서져라 박차고 나간 한석의 뒷모습은 삽시간에 멀어졌다. 유리문은 꽤 오래 흔들렸고, 그 위에 달린 종이 서글프게 울었다.

유미 맞은편에 앉은 네오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고 헤드업 마운티드 디스플레이 장치를 들어 올렸다. 이제 갓 스물도 안 된 앳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유미를 향해 툴툴거렸다.

"너무 잔인한 거 아냐? 차라리 직접 넌지시 말해주지 그랬어? 내가 전화로 들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넌 짐작했을 텐데."

유미는 빙그레 웃었다. 네오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넌지시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나한테 악역을 시켰다? 이거 아주 악질인데? 나중에 일원이 오면 다 일러줄 거야."

"일러. 근데 일원이도 나한테는 막 대하지 못하는 거 알지?"

여상스러운 유미의 대꾸에 네오는 혀를 찼다.

"쳇. 역시 지 남자한테는 물러 터졌군. 딸한테는 모질면서."

"내가 언제."

"보아하니 유진이도 쟬 좋아하는 거 아냐? 근데 니가 가로챘겠지."

"티 나나?"

"많이 나."

유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어쩌겠어. 남자 취향이라는 게 유전도 되나 보지.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순 없는 거잖아?"

"말이나 못하면."

네오는 바퀴 달린 의자를 뒤로 쭉 밀었다. 일직선으로 의자가 미끄러졌고, 네오는 순식간에 커피메이커 앞에 도착했다. 1L짜리 컵을 꺼낸 네오는 거기에 얼음을 절반가량 채운 후, 커피메이커 리시버에 담긴 커피를 전부 부었다. 스스로를 카페인 중독자라 칭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일상적인 음료수였다.

"그래서. 저 남자가 네가 말하던 그 남자야?"

"비슷해."

"비슷하다니."

네오는 다시 발을 굴러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유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래, 내가 너한테 몇 년 전 말했던 그대로라면, 내가 점찍었던 그 남자가 맞아. 정해져 있는 내 미래를 혼탁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러기에 내가 유진이를 부탁할 사람. 하지만, 지금은 틀어져버렸어. 이대로라면 저이와 나의 미래는 다르게 흐르겠지."

네오는 손에 든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렀다. 얼음 하나를 입에 넣더니 와그작와그작 깨먹었다.

"전에 말했던 그거구나. 변곡점."

"응."

"아쉽겠네."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 이것도 어차피 다 정해져 있을 텐데."

네오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녀는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름 무언가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기도 하고, 음- 소리를 내며 창밖을 보기도 했다. 키보드를 당겨 무언가 잔뜩 타이핑해보더니 모니터에 뜬 각종 글자와 숫자를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유미에게 물었다.

"물론 유미가 나한테 보여주었던 그 증거들 때문에 난 네가 미래를 본다는 사실을 믿어. 남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 명확한 증거들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 미래를 본다면서도 왜 자기 죽음은 피할 수 없는지. 정해져있다고 하면서 또 어느 순간에는 수시로 변한다고 하면 그게 무슨 고정이야."

네오가 툴툴거리며 말하긴 했지만, 그것은 딱히 유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었다.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그걸 알기에 유미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잔을 비울 뿐이었다.

"원래는 유진이를 저 남자에게 부탁할 셈이었다며. 그런데 저 남자가 저렇게 다른 여자를 향해 달려가 버리면 어떡할 셈이야?"

"내 딸이잖아."

유미는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말했던 부탁이라는 건 말 그대로 옆에 있어달라는 부탁이지 저이에게 책임지라는 소리는 아니었어. 그의 선택이 다른 여자를 향하고 나면, 유진이는 한층 더 단단한 아이가 될 거야. 내가 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가더라도, 그 아이가 흔들리지 않을 거란 믿어주는 건 엄마인 내 몫이야."

네오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유진이가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저 남자랑 잔거야?"

유미는 빙긋 웃었다.

"취미 생활 가지고 뭐라 그러지 마."

네오가 옆에 있는 물잔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성깔하고는...... 나도 결코 좋은 성격이 못되지만 넌 나보다 더해."

"칭찬이지?"

"알아서 새겨 들으셔여. 쳇."

"나 택시나 불러줘. 여기 판교에서 서울까지 택시로 가면 많이 나오려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따 일원이 오면 태워 달라고 하던가."

"그래?"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백에서 뭔가를 꺼내어 네오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가 직접 온 이유는 따로 있어. 몇 가지 사소한 부탁을 할게. 이 사람의 연락처 좀 구해줘."

네오는 건네받은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 소. 한?"

유미는 빙긋 웃었다. 네오는 한층 더 크게 투덜거렸다. 거기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거느린 한 남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네오는 손가락으로 쪽지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이 사람은 아무리 봐도 사소한 사람이 아니잖아. 이 사람이랑 어떤 사이인데?"

유미는 답했다.

"한때 같이 살던 사람."

이번에는 네오가 놀랄 차례였다.

"진짜? 그럼... 설마.... 유진이 아빠가 이 사람이야?"

유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또 다른 사람."

네오는 입으로 "맙소사"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모니터를 마주한 그녀는 무언가 몇 번 검색하고, 값을 찾더니 메모지 하나에 연락처 몇 개를 적어 내려갔다.

"이거면 돼?"

그러나 유미는 건네받은 쪽지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접어서 그대로 백에 넣었다.

"사실은 필요 없어."

"그런데 왜?"

"내가 이걸 너한테 부탁하는 장면을 보았거든. 그래서 그랬을 뿐이야."

네오는 짜증을 부리며 유미를 카페에서 내쫓았다.

약 한 달 후.

규호와 지혜는 합의 이혼 절차를 마쳤다. 하영은 규호에게 연락을 취해, 그를 시내 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불렀다.

거기에는 박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에서 그와 독대하여 점심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규호는 엄청난 기회가 자신에게 왔음을 알았다.

그 자리에서 규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야망을 몽땅 쏟아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국내 자동차 시장의 활황은 물론 국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자기 지론, 즉, 해외로도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유창한 말솜씨에 실어 강력하게 어필했다.

물론 요새 들어 경제 전반적으로 자금 유통이 원활치 않고 심상치 않다는 경고가 연이어 흘러나오고 있기는 하나 규호는 위기는 기회임을 역설하여 자기 주장을 더더욱 주장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박 회장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난 자네가 누군지 모르네. 그런데... 나한테 어떤 사람이 전화를 하더니, 꼭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 하더군."

"어떤 분이..."

"기다리게."

박 회장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배석하고 있던 하영이 지배인을 불러 와인을 청했다. 지배인이 다가와 물었다.

"평소 드시던 걸로 준비할까요?"

이 레스토랑의 역사는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사환일 때부터 이곳에서 일 해온 지배인은 박 회장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박 회장이 가타부타 말이 없기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등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주문을 바꿨다.

"아니. 난 아저씨 마시던 거 말고 좀 달달한 걸로 부탁해요. 포트와인인가? 그거 있죠?"

하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싶은 여자 한 명이 걸어와 박 회장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아무도 청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하영은 당황하여 지배인을 쳐다보았지만, 그도 그녀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인사까지 보냈다. 그가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싸구려를 마시는구나. 내가 좋은 걸로 주려고 항상 애를 썼는데도... 넌 그랬지."

고급스러운 빛을 한 검은 옷의 여자는 씨익 웃으면서 박 회장의 팔을 툭툭 쳤다.

"입맛대로 고르는 거지, 가격 보고 고르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아저씨가 낼 거니까 싼 거 시키면 돈 굳고 좋죠. 안 그래요? 내 말 틀려?"

"틀리지 않다. 맞아."

하영은 까무러치게 놀랐다. 늘 근엄하고 말수가 적은 박 회장이었다. 그를 알게 된 지 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 번도 박 회장에게 저렇게 살갑게, 혹은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가족 중에도 저렇게 구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낯선 여자는 지배인에게 물었다.

"빈티지는 어떤 거 있나요? 혹시 94년산 있어요?"

"저희도 그건 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92년 빈티지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지배인은 불청객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여 주문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후후. 저기, 갑자기 끼어 들어서 미안해요? 괜찮죠?"

미안하다는 건지, 전혀 안 미안하다는 건지. 말투만 들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하영과 규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은 하영은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자기보다 너댓살, 많으면 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입가는 웃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눈매는 웃고 있지 않았다. 낯선 여자는 하영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박 회장이 말했다.

"걔가... 네가 말했던 애다."

하영은 회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몰랐지만, 여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회장을 향해 빙긋 웃으며 반박하기까지 했다.

"설마 내가 모를 것 같아서 소개한 거야?"

회장을 껄껄 웃었다.

"그래. 내가 널 오랜만에 보니 실수했다."

곧 주문한 와인이 서빙 되었고 네 사람은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하영은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누구인지, 왜 저렇게 회장에게 무례하게 구는지 알지 못해 신경 쓰였다. 규호는 이 자리의 주역이 자신인 줄 알았는데, 난데없는 여자가 회장의 관심을 전부 가져가 버린 게 짜증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 다 회장의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그저 침묵했다.

침묵을 깬 건 회장이었다. 그는 여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

여자는 들고 있는 잔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K자동차 회사를 사세요. 그리고 저 분을 최대한 높은 자리에 앉혀주면 고맙겠어요."

하영과 규호, 둘 다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건 회장의 반응이었다.

"그래. 알았다."

머리가 비상한 하영은 방금 회장이 수 조원짜리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난생 처음 보는 여자의 말만 듣고!

"회... 회장님, 방금 말씀은...."

"하영 군도 들었으니 알겠지. 곧바로 자금을 준비해서 K자동차 회사를 매입하게. 금액에 구애받지 말고. 곧바로 진행하도록. 그리고 이 사람은...."

회장은 규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규호를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끼는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할 뿐이었다.

"인수가 끝나는 대로 내부에서 승진할 수 있는 만큼 승진시키게. 임원직이면 더 좋겠군."

회장은 반론이나 더 이상의 의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영과 규호는 레스토랑 내실을 나왔다. 뒤에는 회장과 여자만 남았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마자 규호는 투덜거렸다.

"뭡니까, 저 여자는."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는 분입니다만 그래도 회장님이 아시는 분인 듯하군요. 그것도... 친밀하게."

하영은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정 같은 것이 듬뿍 담겨 있었지만, 그녀를 본 적이 없는 하영으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게다가 회장은 그녀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 걔가... 네가 말했던 애다.

여기에 여자 대답은 더 뜻밖이었고, 회장은 자신의 실수라며 사과까지 했다. 하영은 이 상황이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저기요, 지금 제 말 듣고 있어요?"

생각에 빠져있던 하영은 옆에서 규호가 귀찮게 굴어서 짜증이 났다.

"회장님 지시가 떨어졌으니, 그대로 합니다. K자동차 회사는 우리가 매입하고, 당신은 영업직에서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영업이사를 시켜드리죠. 됐습니까?"

규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영과 헤어지고 빈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이제 없었다. 그렇지만 더 큰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허전함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꼈다.

몇 주 후, K자동차 회사가 부도 사태를 맞이하여 그가 나락에 떨어지기 전까지, 그는 영업이사 양규호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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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일입니다.

레스토랑에 나타난 불쑥 나타난 여자가 누구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설마 모르는 분이 계시다면... 160-186회에 연재된 외전 [장미정원]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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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호와 임필복이 망해서 사채업자들에게 쫓기고, 끝내 양 씨는 실종, 임 씨는 어떤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하기로 합니다. 아저씨들 이야기에는 제가 관심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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