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51화 (45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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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결혼식 사진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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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결혼식 사진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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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결혼식 사진을 보고 있었다. 하영의 손에 들린 사진은 전파를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소식을 담고 있었다.

"결혼식이라..."

컬러로 인쇄된 사진 가운데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혜가 서 있었고 그녀의 양옆으로 턱시도를 입은 한석과 효진이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각양각색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같이 축하해주고 있었다.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하영은 그속에서 화사함과 즐거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치 코믹한 시트콤의 한 장면을 담아낸 듯한 사진이었지만, 하영은 꽤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이게 법적으로 효력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하영은 이내 혼자 웃고 말았다. 무슨 일이든 법적인 효력부터 생각하는 게 그녀의 좋지 않은 버릇이었다. 친구인 송화는 그런 걸 가리켜서 직업병이라고 불렀다.

'그래. 직업병은 아주 큰 불치병이지.'

하영은 이후 "관찰원"이 보내온 내용도 눈으로 훑어보았다.

석 달 열흘, 백일을 예정으로 항해중인 호화크루즈에서의 생활은 사실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서 지내는 사람들이야 휴가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쁘고 들떠있겠지만, 그걸 일 때문에 간 사람은 그럴 수 없었다.

관찰원이 보내온 문서는 단조롭고도 따분한 표현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석과 두 여자가 벌이는 섹스 행위까지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하영은 그 부분은 대충 넘겨버렸다. 그럼에도 하영은 관찰원의 이런 문체를 좋아했다. 원래는 말수도 적은 사람이라 대화도 크게 나눠본 적이 없지만, 그의 문장은 늘 읽고 있는 하영이었다.

효진과 한석, 그리고 지혜의 "신혼 전 여행"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번 주말이면 그들은 귀국한다. 하영은 다음 단계 일을 점검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서를 다 읽은 하영은 앞에 놓인 인터폰을 눌렀다. 회장 부속실 직통 버튼이었다.

"네, 부속실입니다."

한 여자의 목소리. 하영에게 있어서 가장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영은 평소의 딱딱한 말투를 버리고 대답했다.

"언니, 저예요."

"하영이구나? 어쩐 일이니?"

"회장님께 직보 드릴 게 있는데... 자리 계시나요?"

"저런, 어쩌지? 방금 나가셨는데."

하영은 사무실 입구 위에 표시된 재석표시등을 쳐다보았다. 표시등의 색깔로 재석 여부를 표시하는 장치였다. 비싼 돈을 들여 전 사무실에 기껏 다 설치했지만, 정작 그걸 일일이 눌러 표시를 바꾸어야할 의무가 있는 춘희는 그 일을 빠트리기 일쑤였다. 이 재석 표시등의 색 전환은 자동이 아니다. 사람이 일일이 눌러야 하는 수동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영처럼 따로 전화로 문의하는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하영은 한숨을 살짝 쉬고 말했다.

"언니, 나가셨으면 재석여부를 외출로 표시하셔야죠."

"어머, 내 정신 좀 봐. 또 안 눌러놨구나. 그래, 알았어. 지금 바꿔놓을게."

회장의 재석표시등 색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퇴근을 나타내는 색이다. 하영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퇴근 하신 거예요, 아님 외출 하신 거예요?"

"외출인데...?"

"그럼 노란색을 누르셔야죠."

"어머어머, 그러네. 후후후. 알려줘서 고마워."

재석표시등이 이제야 바른 상태를 표시한다. 하영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상대방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근데, 있잖아. 하영아, 하영아, 지금 뭐해?"

"문서 정리하고 회장님께 직보 드리러 올라갈 참이었는데요... 지금 안 계시다니 다른 일을 해야죠."

"바쁜 일이야?"

"그야..."

"안 바쁘면 나랑 커피 한 잔 하자."

".........네, 언니."

하영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몇 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회장의 직속 비서인 춘희였다. 그녀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었다. 박 회장이 이만한 대기업을 이루기 전부터 그의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광주에서 모든 가족을 잃어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하영을 거의 걷어키우다시피한 사람 역시 그녀였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아 슬하에 자식이 없는 춘희는 하영을 자기 딸처럼 생각했다. 하영도 그런 춘희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하영이 부속실로 올라가자 춘희는 몹시 기뻐하며 맞이했다.

"같은 건물에 있는데도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드니. 넌 어째 살이 더 빠졌어.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마."

"회사에서 월급 받고 다니면 그에 맞게 일을 해야죠."

"돈 주는 만큼만 일하는 거야. 그 이상 한다고 아무도 칭찬하지 않아. 일단 거기 앉으렴."

하영이 소파에 앉자 춘희는 과자와 차를 내왔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 보아 하영이 오는 시간에 맞추어 갓 끓여낸 것이 분명했다. 하영의 맞은편에 앉은 춘희는 소포장된 과장 봉지를 하나하나 벗기며 물었다.

"요새는 어떤 일 하고 있어?"

"국내랑 일본 투자지분 조정하고요, 곧 있을 대규모 SOC사업에서 참여할 회사들의 컨소시엄 내역을 조사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거든요."

"으응."

"전에는 정부 측 인사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일이 쉽게 풀렸지만, 요즘은 그런 쪽의 차단이 강화되어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브리핑하는 하영은, 사실 맞은편에 앉은 춘희가 사실 크게 관심도 없으면서 질문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한다고 다 알아들을 춘희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 누구에게나 이런 걸 일일이 말하는 하영도 아니었다. 상대가 춘희니까 이야기를 꺼낸 것뿐이었다. 예전부터 춘희는 자신이 설령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라도, 하영의 이야기는 꽤 귀 기울여 들어주곤 했다.

하영은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고, 고아가 된 자신이 받는 후원에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날 자신이 배우고 공부한 걸 춘희에게 항상 말했다. 춘희는 가방끈이 길지 않아 점차 하영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하영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순간까지도 춘희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하영은 그런 춘희가 좋았다. 그렇게 가만히 듣고 있던 춘희가 넌지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말이야."

"네?"

"너도 중요한 시기지. 안 그래?"

하영은 눈치가 빨랐다. 춘희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또 무슨 이야기 하려고 그래요, 언니."

"아니야. 이번엔 진짜 중요하다니까 그러네."

춘희는 테이블 옆에 놓여있던 파일 한 권을 스윽 꺼내왔다. 그리고 하영이 보기 좋은 방향으로 펼쳐놓고는 자연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미리 준비해놓은 게 틀림없다.

"이 언니가 아는 사람 총동원해서 알아본 남자야. 나이는 서른이고 행정고시 패스해서 지금 나랏일 하고 있다더라. 얼굴도 봐봐. 이 정도면 훤칠하잖아, 응?"

춘희가 펼친 페이지에는 어떤 남자의 증명사진, 반신 사진, 전신사진, 그리고 간략한 프로필이 첨부되어 있었다. 하영은 그걸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춘희를 나무랐다.

"언니!"

"그래, 내가 니 언니잖아. 그런 동시에 엄마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면 동생이자 딸내미인 너 선 자리 알아보는 것도 의무라고 생각해."

"알아봐달라고 한 적 없어요. 남자는 생각 없다고요."

그러자 춘희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남자가 생각 없다니. 그럼 효진이처럼 너도 여자가 좋니? 맨날 만나는 그 친구인 송화인가? 그 검사 여자애랑 그런 사이야?"

"언니!!"

"농담이야, 농담. 얘도 참, 그렇게 정색하지 마. 근데 봐봐. 아무리 여자 좋아하는 효진이라고 해도 일단 결혼은 남자랑 하잖아. 요새 회장님이 얼마나 기분 좋으신 줄 모르지? 앓던 이가 빠진 사람도 그보다 기분 좋아 보일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 생각을 한 번 해보렴."

"제가 무슨 앓던 이라도 되나요?"

하영의 볼멘소리에도 춘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앓던 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회장님도 널 딸처럼 생각하는 건 너도 잘 알잖아. 은혜도 많이 입었고. 효진이 결혼시키고 이러고 나면 회장님 눈에 누가 밟힐 것 같아?"

"태근이 있잖아요. 태근이 장가보낼 생각하시겠지요."

"태근이야 진작 내놓은 자식 취급이신데 그러겠니? 태근이보다 니가 더 우선 일 거야. 안 그래도 이번에 효진이가 여행 돌아오면 회사도 그 남자애한테... 이름이 뭐래더라? 한석인가, 현석인가."

"한석이요. 최한석."

"그래 최한석, 걔한테 회사도 물려줄 생각이신 것 같으니 태근이는 일찌감치 텄다고 봐야지."

"한석...에게 회사를 물려준다고요?"

한석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하영은 그의 맹한 모습을 머릿속에 잠깐 떠올렸다. 지난 몇 달간 있었던 난리법석에서 그는 하영에게 너무도 많은 허점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하영은 그런 남자가 효진의 남편이 되고, 이 회사의 오너 자리에 오른다는 게 영 미덥지 않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냐. 근데 지난번에 뵈었을 때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고 또 태근이랑 밥 먹을 때도 걔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태근이는 엄청 좋아했어. 대찬성이라고 하더라. 이제 한석이한테 일 맡기고 나면 자기는 지방으로 내려가서 선생님 자리나 알아보겠다고 말야."

"태근이 그 자식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자각이 전혀 없군요."

하영은 혀를 찼지만, 춘희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태근이를 아주 어릴 때부터 보아온 사람이었다.

"자각이 없다기보단...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게 아닐까."

"뭐든 간에요. 행동이 아무 생각 없는 건 똑같아요."

"태근이도 요새 만나는 아가씨 있다더라. 효진이는 귀국 하는 대로 결혼식 올릴 거고. 이래저래 남은 건 너뿐이야. 어때, 그래도 생각 없어? 응?"

하영은 춘희의 이야기 속에서 나온 "태근이가 요새 만나는 아가씨"를 떠올렸다. 하영 역시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관찰원"은 태근에게도 붙어있고, 그들이 보내는 보고서는 하영이 항상 검토했다.

"태근이랑 그 여자는... 아마 결혼까지는 못 갈 거예요. 태근이가 전부터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깊은 관계까지 가는 건 여태 못 봤으니까."

춘희는 하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영은 그제야 자신이 쓸데없는 부분까지 너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고 후회했다. 춘희는 하영을 보며 대견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태근이 신경 써주는 사람은 너 밖에 없어.... 그치?"

"그게 무슨 신경이에요. 일이니까 그렇지."

"그래. 그럼 나도 이게 내 일이라고 생각해. 자, 다시 봐봐."

춘희의 은근하면서도 집요한 압박에 하영은 두 손을 들었다. 그녀는 춘희가 내민 사진과 파일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춘희는 기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다음 주 토요일, 그랜드 호텔에 열두 시까지 가면 돼."

"....전 생각만 해본다고 한 거였는데요, 날짜를 벌써 잡아놨단 말이에요?"

"네가 허락할 줄 내가 미리 알았나 보지."

춘희는 빙긋 웃으면서 하영을 놓아주었다. 하영은 파일을 받아들고 부속실을 나왔다. 하영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자기 사무실로 돌아왔다.

'언니도 참....'

춘희보다는 그녀의 말에는 함부로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해보았다. 그래보았자 별 수 없었다. 하영은 파일을 다시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책상 서랍 안에 적당히 쑤셔 넣었다. 그런 다음 자기 자리의 재석표시등을 퇴근으로 바꾸어두고 회사를 나왔다.

회사 내에서 그녀는 상관도 부하도 딱히 없었다. 출근과 퇴근, 외출이 자기 멋대로였다. 그러나 어지간한 일이 있을 때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출근하고 누구보다도 늦게 퇴근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녀가 업무를 보고하는 대상은 박 회장 한 명 뿐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출퇴근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그룹 내에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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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가 누구인지 기억하시는 분,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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