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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들어가며 ────────────────────
이하 스토리는 더블데이트 루트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이며 본편의 등장인물과 시간, 사건만 차용한다는 기분으로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외전에서의 모든 이야기는 본편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고 진행됩니다.
───────── 더블데이트 외전 < 어쩌면 그녀는 >
하영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타고 회사를 떠났다. 차를 타고 가면서 선미에게 전화를 걸어 일련의 지시를 내렸다. 효진이 다른 데로 빠지지 않고 틀림없이 선을 보러 가도록 말이다.
사실 딱히 효진이 세세한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선미는 이런 종류의 일을 칼같이 해내는 편이다. 그저 하영의 성격상 그걸 그대로 두고 보기 어려워 한마디 더 보탰을 따름이었다. 하영의 지시를 다 들은 선미는 천천히 대답했다.
"이걸 지시하려고 전화하신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곤조곤하면서도 힘이 있다. 그 안에 담긴 은밀한 질책을 느끼지 못할 하영이 아니다. 그녀는 대답했다.
"네."
"이 정도의 일이라면 이쪽에서 당연히 알아서 합니다. 바쁘신 분, 공부 많이 하신 분이 따로 전화까지 일일이 하지 않으셔도 말이죠. 다 알아서 합니다."
'다 알아서'에 묘하게 강세가 찍힌 말투였다. 하영은 선미가 불편해하는 기색은 알아차렸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하영과 선미의 알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온 것이라 둘 사이에서는 일종의 암묵적 합의처럼 이런 식의 다툼이 늘 있어 왔다. 선미보다 하영이 훨씬 더 연상이기는 하지만 박 회장 집에서 일한 기간은 선미가 더 길었다.
하영은 결코 나이 어린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선미 역시 늘 일정한 톤과 일정한 어투로 말하는 사람이라 말싸움이 격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영과 선미, 선미와 하영은 묘한 관계였다.
태근과 효진, 박 회장의 두 자녀에 대한 일은 전적으로 하영과 선미의 관리 하에 놓여있다. 명시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개 대외적인 일은 하영의 몫이었고 대내적인 일, 그러니까 집 안에서의 일은 선미의 담당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서로 상충하게 될 때는 하영과 선미 어느 쪽도 그다지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둘이 마주 보고 싸우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으르렁거리며 각자의 일에 충실하게 임하는 걸로 마무리 되었다.
두 사람의 충돌은 늘 소강상태다.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빙하가 작은 부분만 밖에 내놓고 거대한 아랫부분을 물 아래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충돌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격렬하고도 매우 크게 이루어졌다.
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생각하기는 하지만 염려되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알아서 하겠습니다."
선미의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은 하영은 또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여보세요, 같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하영은 그걸 이미 알기에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하영입니다.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 수업 종료 시점에 제게 연락을 주세요. 저는 정문에 있을 테니 만약 타겟이 후문으로 이동하게 되면 제게 연락바랍니다."
"Copy."
상대방이 던지는 짧은 대답을 듣고 하영은 전화를 끊었다.
방금 그녀가 전화한 상대는 박 회장 직속의 어떤 "부대"였다. 직제상 박 회장 직속이라고는 하나 실제로 운영하는 사람은 하영이기에 그녀의 직속이나 진배없었다.
미행, 감시 등에 특화된 "그들"의 정체는 여간해서 드러나지 않았다. 솔직히 하영도 실제로 본 적은 몇 번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보내오는 리포트는 일반적인 경로, 합법적인 영역에서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하영은 그 내용을 늘 확인하고 있었다.
박 회장 일가를 공식적으로 보필하는 것이 하영의 일이고, 집안일을 보는 게 선미라면, 이들 "부대" 사람들은 음지에서 그들을 보좌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존재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박 회장과 하영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영은 가끔 그들이 궁금했지만, 더 알려고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성격이었다.
하영은 차를 몰고 회사를 나왔다. 회사에서 K대학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주말 특유의 정체로 인해 속도가 떨어졌다. 하영은 라디오를 켜고 교통방송 쪽에 주파수를 맞췄다. 시내 교통상황을 알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목적지까지 달려갔다.
잠시 후 하영은 K대부속고등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하영은 차에서 내려 보닛에 기대어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수첩이 들려 있었고 거기에는 아주 깨알 같은 글씨로 뭔가가 잔뜩 적혀 있었다. 남들이 보면 흔한 수첩일지 모르지만, 재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수첩이기도 했다. 국내외 굵직한 자금 흐름과 명망 있는 사람들의 주요한 특징과 약점 등이 빼곡히 들어있는 수첩이니 말이다.
삐리리리릭-
품 안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하영에게는 핸드폰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업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용이었다. 지금 울린 것은 개인용이었다.
"여보세요."
"나야. 오늘 저녁은 어디서 볼까?"
하영의 친구이자 "적"인 채송화였다.
손하영과 채송화.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두 사람은 거의 매주 만나서 식사를 함께 하곤 했다. 아무래도 남자보단 여자가 적은 사법연수원 내라서 형성된 친분이기도 했지만, 다른 동기들보다도 두 사람은 유독 잘 어울렸다.
친구끼리 종종 만나 식사를 한다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평소 업무량을 아는 사람이라면 입을 딱 벌릴 일이다. 둘 다 초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라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하영에게는, 어떻게든 줄을 대려는 사람들, 그녀와 식사 한 번 하는 일에 목메고 있는 이들이 버스로 몇 대 분량이 되고도 남았기에 그녀가 송화를 이렇게 사적으로 대하는 건 지극히 각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속내와는 달리 하영과 송화는 서로 주고받는 말이 항상 거칠었다.
"무례한 년 같으니. 상대에게 시간이 있는지 먼저 묻는 게 도리 아냐?"
"어차피 애인도 없는 영심이가 시간이 없을 리가 없잖아. 어디서 볼까? 지난번처럼 대학로?"
"그러지, 뭐. 핀들가든에서 보자."
"지난번에 갔었잖아."
"몇 달 전에 가고 또 가는 건데."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할 장소와 메뉴에 대한 대화를 잠시 나누었다. 그러다가 송화가 하영에게 지금 뭐하느냐고 물었다. 하영은 크게 한숨을 지어 내쉬며 말했다.
"일 하고 있어. 애 보는 일이랄까."
"애 보기? 네가? 언제 낳았어?"
"효진이 말야. 효진이."
"아아, 그 아가씨...?"
"그래. 걔를 어떻게 하면 시집 보낼 수 있을 것인가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야."
이름하여 M-2 프로젝트. 하영이 맡아 처리하는 일 중에서 우선도가 가장 높은 일에 속한다. M-2보다 상위의 일이라면 M-1뿐이다. 여기서의 M은 Marriage의 약자. 1은 효진보다 위에 있는 태근을 가리키는 숫자였다. 송화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쿡쿡거리며 웃으며 물었다.
"본인은 생각이 전혀 없어?"
"그게.... 뭐랄까. 남자 자체에 흥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뭐야, 그게."
하영은 쓰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이 송화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는 전달되었다.
"일단은 주변에 남자가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을 예의주시하고 있어. 그게 잘 먹히길 바라고 있을 뿐이지."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나면, 너도 시집가는 거야?"
"걔가 가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는 너는?"
"일에 치이다 남자 만날 일도 없어. 맨날 보는 남자들이라고 해봐야 범죄자들 뿐이고."
"범죄자 뿐이라니. 주변에 있는 다른 검사들은?"
"아이고. 난 영감님은 싫어. 같은 직종 종사자라니, 딱 질색이야. 만약 검사나 변호사랑 결혼했다가는 부부싸움 할 때도 법정에서 싸우듯이 싸울 게 분명할 테니 말이야."
하영은 송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하영은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결혼이라....'
정작 자기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 우스웠다. 분명 송화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도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결혼 이야기를 나누는 빈도가 높아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송화도... 남자가 고픈 걸까.'
이제 이십대 후반에 접어든 하영은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어렸을 적 불행한 일을 겪고 자라난 그녀는 회장의 후원을 받게 된 이후 공부에 매진했다. 그렇게 십대 시절은 공부하느라 정신없이 보냈고 이십대는 일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삼십대가 코앞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동창이나 동기들의 소식 중에는 결혼 소식은 물론 득남이나 득녀 소식도 섞여있곤 했다.
'난 아직 모르겠다.'
하영은 한 번도 남자를 사귀어 보지 못했다. 못 했다기보단 안 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날카로운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선이 고운 그녀였다. 외모만 보고 반한 남자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마다 하영은 사람이 아닌 희한한 동물을 바라보는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바라봤다. 호의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거절하는 대답을 곧바로 돌려주곤 했다.
그렇지만 하영은 딱히 남자를 사귀지 못해서 아쉽다거나 시험 삼아 사귀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다른 일이 너무도 많았다.
남자도 모른 채 일에만 열중하는 그런 여자. 그게 그녀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어느덧 하영은 평범한 남자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하영은 자신에게 여성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일부러 여성잡지를 사다가 보았지만, 거기에 실린 이야기를 이해 못할 때가 태반이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라든가 예쁜 꽃, 프로포즈 등에 열광하는 여자들은 보면 뭔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 게 하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꽃송이 말대로 너무 공부만 하다가 돌아버린 걸지도 모르겠네.'
언제고 술을 마시면서 송화가 했던 이야기가 하영의 머릿속에 내내 남아있었다. 송화는 하영에게 네가 그렇게 공부와 일에 열중하는 건 어쩌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하영은 거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하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학생들이 교문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 하영은 수첩을 덮었다. 조잘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 사이에서 하영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을 발견했다. 키가 작은 여학생과 옥신각신하며 나오는 상대를, 하영은 한 눈에 알아보았다.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서류를 통해서는 거의 매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외우고 있었다.
"최한석 씨 되시죠?"
하영의 타겟, 최한석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하영은 남자 표정이 참 어리바리하다고 생각했다. 사진으로만 볼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직접 보니 그런 생각이 훨씬 더 크게 들었다.
그렇게, 하영과 한석은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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