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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들어가며 ────────────────────
이하 스토리는 더블데이트 루트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이며 본편의 등장인물과 시간, 사건만 차용한다는 기분으로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외전에서의 모든 이야기는 본편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고 진행됩니다.
───────── 더블데이트 외전 < 어쩌면 그녀는 >
박 회장이 하영을 불러 태근과 만나게 하더니 대뜸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했다. 하영은 회장의 말에 따라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태근은 그런 그녀에게 헤드락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와 오빠 밑에서 점잖게 자라난 하영은 그런 취급을 난생처음 당해보고 크게 당황했다. 놀란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태근을 발로 차버렸고, 그걸 지켜보고 있던 회장과 그의 비서 춘희는 깜짝 놀라 둘을 갈라놓았다.
"같이 키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 같군."
결국 하영은 박 회장의 비서인 춘희 집으로 갔고, 거기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하영과 태근, 두 사람은 동갑내기임에도 불구하고 주파수가 전혀 맞지 않았다. 처음 만난 이래로 늘 티격태격 이었다.
하영은 이만한 집안에서 자라면서도 매사 무사태평에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태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태근은 모든 일에 빠릿빠릿하면서 항상 책임감이 충만한 하영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십대를 보내고 이십대 초반이 되었다. 하영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태근이 하영을 찾아왔다. 하영이 춘희와 함께 살고 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철퍼덕 앉은 태근은 인사도 생략하고 자기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너, 그거 알고 있었냐?"
하영은 곧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야 했다. 집을 나가기 위해 짐을 싸던 하영은 손을 멈추고 태근을 돌아보았다.
"뭐야. 다짜고짜."
"우리 아버지는 날 싫어하는 만큼 널 좋아한다는 거."
당시 태근은 박 회장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군 입대를 하겠다고 절차를 밟는 중이었다. 회장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재력과 영향력을 동원하여 태근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해결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태근은 기어이 제 발로 입대신청서를 넣고 신검까지 받았다.
입대 날짜가 코앞이었고, 자기 말을 듣지 않은 아들에 대한 분노로 회장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두 사람 사이는 그 이후로 더욱 틀어졌다.
이런 사정을 다 알고 있는 하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회장님이 날 좋아해주신다면 참 감사한 일이지. 그런데 회장님이 널 싫어한다기보단 네가 회장님이 싫어할 일만 골라서 하고 있는 거잖아."
"어떻게 우리 아버지를 좋아할 수 있냐. 그렇다면 넌 우리 아버지가 하는 일이 다 옳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말로?"
박 회장은 어마어마한 자산을 바탕으로 한 투자력과 정재계 곳곳으로 뻗친 인맥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사업과 행보가 모두 합법적인 것만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하영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회장이 펼친 월권으로 살아난 수혜자였다.
하영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그거에 대해선 노코멘트 하겠어. 안 그래도 연수원 수료 후에는 그룹으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거든."
하영의 대답을 들은 태근은 코웃음을 쳤다.
"듣자마자 수락했겠군."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 있기까지 회장님의 도움이 얼마나 큰데 그걸 어떻게 거절하니? 오히려 내가 다 감사할 일이야. 은혜 갚을 기회를 주셔서."
"은혜?"
태근은 목젖이 보이도록 한참을 웃었다. 숨이 넘어가도록 웃던 그는 어느 순간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야. 진짜 우리 아버지 사람 쓰는 거는....대단하다, 대단해. 어떻게 하면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을 이렇게까지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건지... 정말 궁금하다. 너 뿐만이 아냐. 다른 애들도 그렇고...."
"그런 걸 인복이라고 하는 거야."
"인복? 푸하하하."
태근은 다시 또 한참 웃다가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말이야. 그 뭐냐. 메이드 아카데미인가 뭔가에 있는 애들도 전부 너처럼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다들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는 걸까? 몸을 바쳐도 좋을 만큼?"
하영은 울컥했다. 메이드 아카데미를 나온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몸을 바친다"는 표현이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 하영은 목소리를 높였다.
"아카데미 애들과 나를 비교하는 거야?"
"왜 비슷하잖아? 돈과 시간을 들여, 갈 곳 없는 여자애들 거둬서 자기 쓰기 편한 애로 만들어 내는 거. 내가 보기엔 똑같은데?"
"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하영은 태근을 노려보았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태근이 한마디만 더 보태면 뺨이라도 때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태근은 침묵했고 하영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았던 하영의 기분은 조금 누그러졌다. 태근은 그녀가 민망할 정도로 오래 주시했다. 그답지 않게 꽤나 강렬한 시선이었다. 태근은 그렇게 하영을 한참 보았다. 하영은 되레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뭘... 뭘 그렇게 쳐다봐?"
태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뜸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뭐긴. 니 얼굴 보잖아."
"내 얼굴은 왜? 처음 본 사람도 아니고."
태근은 몸을 뒤로 젖혔다. 소파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몸을 받아들였다.
"많이 봤는데도.... 영 내 취향이 아니잖아. 그래서 쳐다봤어."
"너, 나 화내게 하려고 온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너랑 나랑 결혼시키려고 하는데, 너도 아는가 해서 말야."
"......뭐?"
워낙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하영은 대답할 타이밍도, 화낼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아까도 말했잖아. 우리 아버지는 날 싫어하지만 널 좋아하지. 나랑 너랑 결혼해서 니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으면 하는 모양이더라. 춘희 누나가 말해준 거니 거의 맞겠지."
"내가 회사를 물려받는다고....? 말도 안 돼."
하영이 중얼거리자 태근은 기가 막힌 듯이 소리 질렀다.
"야! 넌 지금 이 상황에서 회사가 중요해? 너랑 나랑 결혼시킨다니까?"
하영은 최대한 쌀쌀맞게 대답했다.
"흥. 그거야 당연히 말도 안 되니까 고려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러자 태근은 한층 더 맥 빠지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영에게 물었다.
"너, 나 싫어하냐?"
하영은 기가 막혔다.
"세상에나. 웃겨? 그럼 여태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꿈 깨!"
"왜? 그렇게나 잘해줬는데...."
"잘해주긴! 지난번만 해도 그래, 넌 시험 보러 가는 사람 목을 졸라가며 시험 잘 보라고 덕담하는 게, 그게 잘해주는 거야?"
하영이 소리를 빽 지르자 태근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힘내라고 한 건데...."
"힘내기 전에 숨 막혀 죽는다고!"
태근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기 행동에 대한 반성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게 하영의 속을 더 긁었다. 태근은 매사에 이런 식이라 하영의 마음에 영 차지 않았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나라도 하면, 속을 벅벅 긁는 짓을 열 가지 해냈다.
태근은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더니 말했다.
"뭐든 간에 일단 넌 내가 결혼상대로는 별로라는 거군."
"그야 당연히 난 네가 싫으니까."
"그러냐? 좀 서운한데?"
태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현관을 나서기 전, 하영에게 말했다.
"난 네가 그렇게까지 싫지 않은데 말야.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랄까."
"뭐?"
깜짝 놀라있는 하영을 향해 태근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하영의 입술을 덮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워 하영은 무방비로 당하고 말았다.
지그시 눌러오는 입술의 감촉을 난생처음 느껴본 하영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있는 게 아닐까 싶은 태근이었지만, 그런 그라도 입술만큼은 부드러웠다.
그렇게 두 사람이 꼭 붙은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하영은 자신이 선 채로 기절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없었다.
이것은 그녀의 첫 키스였다. 달콤하고도 은근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눈을 꼭 감고 있는 하영의 귓가에 태근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래도 내가 싫어?"
늘 시끄러운 평소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소리가 피부에 스며들고 있었다. 무게를 담은 목소리는 형체도 없이 그녀를 잠식했다.
하영은 입을 열어 여전히 싫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태근의 입술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열면 입술에 남아있는 그 감촉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대로 멈춰있었다. 하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단어가 오갔지만 어느 것도 형체를 가지고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영리하고도 명석한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멍청하고 아둔했다.
대답하지 않는 하영을 보고 태근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한 일은 크게 웃고 넘기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묘한 표정일 수밖에 없었다. 태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싫다는 거구나. 알았어. 미안해. 방금 한 일은 잊어줘.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
그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하영은 닫힌 문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가 문을 열고 태근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하영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게 첫 키스의 강렬함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돌발적인 태근의 행동에 대한 반발심인지, 그녀로서는 알수 없었다. 태근이 가고 나서도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그 날 하루는 온전히 태근에게 마음이 빼앗겨 버린 하영이었지만, 자신의 마음이 대체 어떤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 후로 태근은 하영을 개인적으로 찾아오거나 연락하지 않았다. 일이 있을 때만 뭔가를 부탁하기 위해 전화할 뿐이었다. 이 날의 대화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는 태근과 마찬가지로 하영도 그 키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사이가 어색해진 건 아니었다. 태근은 여전히 실없는 농담으로 하영을 화나게 만들었고, 하영의 타고난 성실성은 태근을 멋쩍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하영은 뭔가 보이지 않는 벽, 전에 없던 벽 하나가 태근과 자신 사이에 놓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투명하지만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벽이었다. 누가 세운 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들이 볼 때는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태근이었지만, 그를 오랫동안 보아온 하영은 알 수 있었다.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벽이 둘 사이에 있었다.
사법연수를 마치고 변호사가 된 하영은 박 회장의 권유에 따라 그룹에 입사했다. 그녀에게 태근과 효진에 대한 감시 업무가 할당되었고, 그녀는 그 누구보다 그 일에 성실하게 임했다.
태근에 대한 보고서에는 그가 만나는 여자나 업소에서의 향락에 대한 내용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영은 사무적인 태도로 보고서를 정리했다. 태근이 여자관계로 "사고"라도 치면, 그녀가 할 수 있는 방안을 동원해서 정리하고, 마무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다시 현재.
대학로 길가에 세워진 차 안에서 하영은 생각했다. 조금 전 효진이 대수롭지 않게 흘리고 떠난 이야기는 하영으로 하여금 오래된 기억 속에 파묻히게 했다. 자신의 감시를 알아챈 효진. 그리고 알아챘을지도 모르는 태근...
'그런 녀석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그녀는 문득 두려워졌다. 또한 깨달았다.
'내가 왜... 그런 걸 걱정하고 있지... 대체 왜.... 설마....'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스스로 믿을 수 없었다. 하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며 했어야 했던 태근에 대한 뒷조사... 그것을 수행하며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아버렸다.
'말도 안 돼... 착각일 거야. 그럴 거야.'
하영은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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