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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하영은 자기 눈을 의심했지만, 불행히도 감각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뒤늦게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몸 전체를 훑어 내리는 기묘한 시선이 있다는 사실은 공기로부터 알 수 있었다.
숨넘어가는 효진의 비음과 신음. 지칠 줄 모르는 한석의 움직임. 뜨거운 공기, 매서운 움직임.
잠들지 않았음에도 결코 눈을 뜰 수 없는 하영이 꼼짝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그 밤사이에 한석과 효진은 세 번 이상 어울렸다.
그때마다 효진은 숨 넘어갈 듯 신음을 흘리며 한석에게 매달렸고 한석은 그런 그녀를 마음껏 요리했다. 이미 한번 그와 눈이 마주쳐버린 하영은 다시는 눈을 뜨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불행히도 잠도 오지 않았다. 하영은 그렇게 밤새도록 음란한 소리를 들어가며 잠을 설쳤다. 새벽, 한석과 포개어진 효진이 잠들어 옅은 숨소리를 흘리는 걸 들으며 하영은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자기를 깨우는 효진을 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피로와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효진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충격적인 경험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법.
그렇게 후유증은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과장님."
"..........."
"과장님!"
".........."
"손 과장님!"
"네? 네? 아, 승호 씨."
딴생각을 하던 하영은 황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그녀는 회사에 있었고, 업무 중이었다. 눈앞에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부하직원이 있었다. 하영은 표정을 바로 하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라뇨. 아까부터 오늘 회의 안건에 대해 설명 드리고 있었는데..."
"아, 그랬죠. 계속 말씀하세요."
승호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지체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영은 곧 원래의 태도를 되찾고 승호의 보고를 경청했다. 보고가 끝나고 보완할 점과 수정할 점을 지시한 그녀는 승호에게 물러나도록 했다. 그가 사무실을 나가고 나자 하영은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떠와서 그대로 들이켰다.
"하아..."
차가운 물을 마시고 머리를 털어보지만, 그 날 밤의 끈적끈적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날 밤"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었다.
'순박하고 어리바리한 사람?'
한석에 대한 조사보고서에 적힌 평가를 떠올린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 보고서가 미행과 사찰까지 행하며 작성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의 밤까지 담아내지는 못 했다. 그의 진짜 모습은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류가 갖는 한계였다.
'그건... 그게.... 그의 진짜 모습....'
한석의 몸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며 질러대던 효진의 교성이 아직도 하영의 귀에 남아있었다. 늘 장난스럽고 발랄하기만 한 효진의 모습을 접하던 하영에게는 그 점도 꽤 큰 충격이었다. 하영은 아직도 눈만 감으면 효진의 교성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자신을 꿰뚫을 것처럼 똑바로 바라보는 한석의 눈빛이 시시때때로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다리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하영은 의자에 앉은 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게... 그렇게 좋은 걸까.....'
하영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다시 또 고개를 흔들었다. 요새 틈만 나면 그때의 기억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 정도였다.
'생각을 그만두자...'
하영은 책상 위를 정리하고 인터폰을 켰다. 검토할 서류를 전부 가져오도록 지시한 후 진한 커피도 함께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곧 산더미 같은 일감과 커피가 배달되었다. 그녀는 서류더미에 파묻힌 상태로 일에 몰두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 시간이 임박했다고 승호가 알려오기 전까지 그러고 있었다.
하영은 안경을 고쳐 쓰며 승호에게 말했다. 전처럼 날카로운 말투였다.
"태공산업 건은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니 법무팀에 넘기고, 국제팀에 연락해서 지난번 대형물류 제안서 어떻게 되었나 확인하세요."
"네."
"작년처럼 인허가에 묶여 시간 허비하지 않도록 해당 지역 공무원들 확실히 접대하시고요, 접대 명부는 최신 리스트로 업해서 내일 오전까지 제게 제출하세요."
"네."
"그리고 또...."
홍수처럼 쏟아지는 하영의 지시를 받아 적던 승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말을 막았다.
"손 과장님. 많이 늦으셨습니다. 일단 나가시죠."
"그럴게요. 승호 씨. 나머지는 부탁합니다."
"네. 걱정 마세요."
"걱정 안 되게 생겼어요? 나머지를 승호 씨에게 부탁해야 되는데?"
승호 역시 나름의 엘리트코스를 밟아 젊은 나이임에도 여기까지 올라온 인물이다. 그렇지만 워낙 하영의 실력이 출중한 탓에 이 회사에서 거의 전권을 쥐고 흔드는 그녀에게 그런 승호조차 무시되기 일쑤였다. 승호는 자기 이마를 살짝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자주 겪는 일이라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과장님."
"좋아요. 믿어보죠."
하영은 황급히 회사를 떠나 남산으로 차를 몰았다. 남산 중턱에 있는 고급 일식집은 박 회장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발렛파킹을 담당하는 직원이 하영을 알아보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하영은 차를 맡기고 서둘러 올라갔다. 지배인이 그녀를 안쪽의 방으로 안내했다.
마루로 된 긴 복도를 걸어가면서 하영은 지배인에게 물어보았다.
"항상 가던 방이 아니라 왜?"
"오늘은 다른 분들이 더 오셔서요. 4인용 룸이 아니라 다인용 룸인 매화방으로 모셨습니다. 늘 오시던 회장님과 자제분들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계시던데요."
"다른 분들?"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가족모임의 날이었다. 딱히 누가 이름을 붙여놓은 건 아니지만, 주로 그렇게 통칭하곤 했다. 박 회장과 태근, 효진은 물론 하영까지 넷이 모이는 날이지만 본인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 네 사람을 "가족"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인이 안내한 방 앞에 도착한 하영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하영은 허리를 깍듯이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박 회장이 껄껄 웃으면서 하영에게 손짓했다.
"뭘 그렇게까지... 어서 앉게나."
고개를 든 하영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박 회장의 옆에는 낯선 여자가 앉아있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가진 젊은 여자였다. 그리고 회장의 우측 편에는 태근과 함께 웬 여대생이 앉아있었고, 좌측 편에는 효진과 한석, 그리고 전에 한 번 보았던 여고생이 한 명 앉아있었다.
하영은 태근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본 박 회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영이가 어리둥절한 모양이구나. 소개하마. 이 사람이.... 내 안사람이라네. 미자. 인사해. 아까 말한 손하영 군이라네."
"미자가 아니라 유미라고요. 아저씨. 안사람 그만 둔지가 언제인데, 여태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그런가? 어허허."
유미는 회장에게 가볍게 핀잔을 주곤 웃으면서 하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영은 어리둥절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마주 숙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 두 번째 딸. 유진이라고 하네. 사정이 있어서 여태 떨어져 살았지만.... 이제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
"안녕하세요. '진'유진이에요. 전에 본 적 있죠?"
매우 귀엽게 생겼지만 눈빛이 매서운 유진이었다. 하영은 유진이가 자신의 성을 꽤 강조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회장의 딸인데도 불구하고 성이 달랐다. 하영은 이미 유진이라는 아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겪는 건 처음 들어 보는 일뿐이다.
"전에 봤다고? 어디서 말이냐."
회장이 물어보았지만, 유진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석이 나서서 설명했다.
"일전에 하영 씨가 절 데리러 학교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때 유진이와 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아버님."
"아, 그래? 그렇지. 자네가 유진이 과외를 했었다고 했었지, 아마?"
"그렇습니다."
"둘이 꽤 친하겠구만."
"친하다기... 보다는, 제가 유진이에게 많이 혼나고 있습니다. 아버님."
"그런가? 껄껄껄."
하영은 너무도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박 회장의 전 부인이라고 갑자기 등장한 젊은 여자도 여자거니와 박 회장의 딸이 유진이라는 사실도 그녀를 놀랍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한석의 태도였다. 그는 지금 박 회장에게 아주 친근하게 말을 건네며 "아버님"이란 호칭을 붙이고 있었다. 박 회장 역시 그런 호칭이 퍽 마음에 드는 듯 흐뭇하게 웃으며 한석을 마주 보고 있었다.
하영은 효진이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효진은 생긋 웃으면서 한석의 팔 한쪽을 끌어안았다.
"언니. 저 이 사람이랑 결혼해요."
"...결...혼?"
"응. 그게... 그렇게 되었어."
효진은 가볍게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 동작을 본 하영은 가볍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가 지금 몹시 경황이 없었기에 그런 효진을 보면서 유진이가 코웃음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진 못 했다.
"갑작스럽게 대가족이 되어버렸군.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건배 한 번 하자고."
박 회장이 잔을 들자 모두들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모두의 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맑고 부드러운 맛의 무알콜 샴페인을 목 안쪽으로 넘기면서 하영은 줄곧 옆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근의 옆에 앉은, 묘령의 아가씨에 대해서는 아직 소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낯선 이들도 무척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그녀만큼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태근과 그녀는 귓속말을 나누듯이 아주 작은 소리로만 대화를 나누고 있어 하영에게는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영은 잔을 들고 남은 걸 마저 마셨다. 빈 잔을 내려놓자 맞은편의 한석이 샴페인 병을 들고 그녀의 잔을 채워주었다.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술의 받았다. 투명하고 노란 술이 그녀의 잔에 가득 채워진다. 한석이 그녀에게 눈인사를 보낸다. 사람 좋은 표정이다. 하영은 애써 웃어 보였다. 남들이 봐도 어색하지 않도록 매우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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