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61화 (46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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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태근은 잠깐 실례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룸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하영은 자신도 따라 나섰다. 밥을 먹다말고 태근이 일어나서 갈 곳 정도는 당연히 꿰고 있는 하영이었다.

흡연실에 이르러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태근에게 그녀는 다짜고짜 물었다.

"누구야?"

"누구?"

"네 옆에 있는 아가씨."

"아아, 내가 소개를 안 했구나."

태근은 빙긋 웃으면서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일회용 라이터였다. 한 모금 빨아낸 그는 천천히 뿜어내면서 말했다.

"내 여자친구."

".....뭐?"

"뭘 그렇게 놀래? 나는 여자 친구 있으면 안 되냐? 내 동생은 이미 애까지 생겨서 시집을 가겠다는 판에?"

하영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의 입술에 닿았던 태근의 입술 감촉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 그 생각이 떠오르면 어쩌나 싶었다. 하영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그 기억을 떨쳐냈다.

"있으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중얼거리는 하영을 보면서 태근은 쓰게 웃었다.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태근이 다시 한 모금 빨아내고 크게 뿜어내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털며 말했다.

"왜. 너의 레이다망에 안 잡혀서 놀란 거야?"

하영은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 효진의 말을 듣고 그녀가 우려했던 사실이 어긋나지 않았다. 태근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녀는 가슴이 옥죄어 왔지만, 태근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지금."

"레이다가 없다고는 안 하네?"

하영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근에게 거짓말을 하기 힘든 하영이었다. 그녀가 말이 없자 태근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면 뭔데? 나와 효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뒷조사해서 아버지에게 보고 하는 게 네 일이었잖아. 그런데도 내 연애사건은 못 알아차렸으니 이 어찌 놀라지 않을 일이야. 내 말 틀려?"

태근의 말투가 비난조가 아니었지만, 하영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버리는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게 아냐..."

"그게 아니라니."

"내가 좋아서 그 일을 한 줄 알아?"

"글쎄다. 넌 일 좋아하잖아. 사람보다도 일을 더. 안 그래?"

"뭐라고....?"

하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근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태근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현아라고 해. 나랑 같이 교원실습 했었고.... 나중에 졸업하면 같이 임용고시 봐서 어디 먼 시골이라도 가서 함께 선생질 할 거야."

"너.... 결국은...."

"그래. 우리 아버지 회사야 하영이 너처럼 똑똑한 사람과 사심 없는 한석이 같은 녀석들이 물려받으면 딱이지. 나 같은 난봉꾼이 하면 곤란해."

하영은 태근이 먼 곳으로 떠나버릴 결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런 동시에 한석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게 너무도 의아했다.

"여기서 갑자기 그 사람 이름이 왜 나오는데?"

"한석이? 뭐, 뻔하지 않겠어? 걔가 우리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도 나에 대한 미련을 접겠지. 나로선 잘 되었다고 생각해."

"회사가 무슨 물건이야? 한 사람에게 주고 말고를 결정하게?"

"그럼, 넌 우리 회사가 무슨 주식회사라도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커졌다고는 하지만 회사는 여전히 아버지 개인 회사야. 그 규모에 맞지 않게 비정상적으로 폐쇄적이고, 아무도 짐작 못하는 방법으로 아버지가 이곳저곳에 투자하며 키워온 회사잖아. 게다가 더러운 짓도 많이 하고 있고..."

태근이 아무리 회사에 관심이 없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그도 내부 사람이었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하영은 태근의 지적에서 틀린 점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늘 허허 웃는 표정의 태근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눈으로 JS그룹의 온갖 치부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저 입에 올린 적이 없을 뿐이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회사를 맡을 생각 없어. 아버지에게도 분명하게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이제 알아들으시겠지."

"그렇다고 최한석을...."

"한석이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어차피 실무는 네가 다 처리하는 거고, 일종의 바지 사장 같은 거 아냐? 녀석은 순박하니까 최소한 남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거란 말야."

한석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하영의 기억 속에서 떠오른 건 그의 눈빛뿐이었다. 하영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한석이 사심 없다고? 그걸 어떻게 알아? 사심이 있을 수도 있잖아. 예를 들어, 효진이와 어울린 것도 알고 보면..."

"알고 보면, 뭐? 걔 친구 지혜인가. 걔 때문에 우연히 만난 사이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럼 넌 걔가 사심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건데?"

"그... 그건...."

하영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겪었던 밤에 대해서 말할 순 없었다. 입을 다문 하영을 보며 태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걔에 대해선 아직 조사 안 해본 거야? 그치만 어쩌냐. 우리 아버지 마음은 한석 군한테 아주 기울였던데. 미자 누나 데리고 온 것도, 오늘 이 자리를 주선한 것도 걔라고 들었어. 빨리 조사해보는 게 어때? 그게 네 일이니까."

"그런 식으로 비꼬지 마."

"게다가 효진이. 그 말광량이인 효진이를 저렇게 턱하니 집에 들어앉히게 만들었으니 우리 아버지로서는 만세 부를 일이지. 총애 받던 너나 미움 받던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들을 그 녀석은 삽시간에 해치웠다고. 그 정도면 우리 아버지가 푹 빠질 만도 하잖아?"

태근은 담배를 더 꺼내려하다가 주저했다. 그는 남은 담배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현아가 담배도 줄이라고 잔소리해서 말야. 이제 하루에 피던 양을 반으로 줄이고 있어."

문득 하영은 그녀가 태근에게 담배 끊으라고 잔소리하던 예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태근은 하영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담배를 더 피워대었다. 가슴이 옥죄여 왔다.

"그때....."

"응?"

"그때.... 내가 만약...."

"니가 뭘?"

"그날, 그날 말야. 내가 만약 너한테...."

하영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빠. 또 담배 피워요?"

작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하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흡연실 입구에 현아가 서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이쪽을 쳐다보는 모습은 무척이나 여성스럽고 단정해 보였다. 하영은 그녀와 자신이 극과 극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무리 봐도 저런 태도는 취하지 못한다. 누가 봐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태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냐, 담배는 무슨.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좀 하느라 말이지. 하하핫! 그치 하영아? 너 담배 피냐?"

"아니. 안 펴."

"봐봐. 얘도 끊었잖아."

"난 원래 안 펴."

"담배를 안 피는 사람도 들어와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곳이 흡연실이라 이거지."

너스레를 떠는 태근을 현아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작고 동그란 얼굴이 약간 기울어졌다. 그러면서 살짝 웃는다. 태근을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난다.

"거짓말은 안 해도 돼요. 바로 끊으라고는 안 하고 줄이라고만 했잖아요."

"줄이고 줄이다보면 언젠가는 끊겠지? 흠흠. 그래. 다들 식사 끝났어?"

"곧 후식이 나온대요."

"그래. 하영아. 가자."

"어? 어...."

태근은 먼저 흡연실을 나와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그의 뒤를 따라 나서는 하영에게 현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영은 엉겁결에 고개를 마주 숙였다.

"하영이 언니 맞으시죠?"

"....네. 손하영 입니다."

"평소에 오빠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변호사시라면서요."

"아, 예에..."

하영은 그녀가 평소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고민했다. 그렇지만 현아의 태도에서  비꼬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태근은 분명 하영에 대한 장점만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타인의 험담을 하는 태근... 그런 모습은 하영으로선 전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너무 멋지세요. 그런 전문직 여성분들을 보면 존경스럽거든요."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현아 씨, 라고 했죠?"

"네. 양현아예요."

하영은 속으로 현아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앞으로 사찰 대상에 그녀도 올려야 되는 건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주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대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앞으로 선생님 되신다면서요."

"헤헤. 되고 싶다고 다 되려나요. 앞으로 시험도 봐야 되고요."

"아이들을 가르치잖아요. 변호사보다 더 좋은 직업이 선생님일겁니다. 전 그렇게 봐요."

"어머, 감사합니다. 노력할게요."

얼굴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현아를 보면서, 하영은 뭔가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이 어린 여대생이 삿된 성격이나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그나마 받아들이기 더 편했을 지도 모른다. 태근의 배경을 보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여자였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여자는 여태 많았고, 하영의 선에서 어느 정도 처리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하영이 보고 있는 현아는 너무도 맑고 순순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바라보는 하영이 되레 미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이 착한 아이는 태근이와... 같은 길을 걷는 걸까.... "

선생님이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영은 자신이 선생님이란 단어가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그녀다. 어른에 대한 실망과 깊은 상처로 인해 선생님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곤 했다. 자신이 거의 모든 걸 떠맡으려는 그녀의 성격은 이미 그때 고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결코 이 여자처럼 될 수 없어...'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서로 어긋난 기대로 마음이 멀어졌던 하영과 태근. 이제는 몸도 떨어져 서로 먼 곳에서 지내게 된다. 그렇지만 지금 하영이 보고 있는 이 작은 여자는 다르다. 태근의 곁에서, 그와 함께 있어줄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하영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낯선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처음엔 그 감정이 어떤 색인지 몰랐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짙어지는 그 색깔을, 하영은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았다.

'질투....인가.'

자신이 태근을 원한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이제 태근의 상대가 나타나자 전에 없던 조바심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영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 감정은 그녀에게 너무도 낯설고 힘들었다.

"괜찮...으세요?"

하영은 고개를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던 모양이다. 걱정이 가득한 현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하영은 애써 입술을 움직여 미소 지었다.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먼저 들어가세요.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게요."

"부축해드릴까요?"

"어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로."

하영은 현아를 달래어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쉰다. 길고 긴 복도에 혼자 남은 자신의 모습. 그 자체로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보 같아...'

누구보다 공부에 열중하고 누구보다 일에만 매달려왔던 그녀였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다.

'미련해...'

그때였다. 하영은 문득 어떤 시선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닥에 드리워진 길고 긴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복도를 바라보자 거기에 어떤 키 큰 남자가 있었다. 조명을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하영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어떤 식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눈빛은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은 분명히 하영을 보고 있었다.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네."

한석이 다가올수록 하영은 몸이 긴장되었다. 그녀는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한석이 아주 가까운 곳으로 오기 전 그녀는 자세를 온전히 바로잡았다.

"이쪽인데요."

"........네, 알고 있습니다."

하영은 한석이 자신에게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떼었다. 한석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의 눈빛이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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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월요일 0시에 항상 올렸습니다만, 오늘은 좀 일찍 자야 해서...

지금 올립니다.

만약 시간이 된다면 월요일에도 또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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