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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대낮부터, 그것도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살색 향연을 보면서 하영은 경악했다. 결혼식에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던 한석이니 사무실에서도 뭔가 저지르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제아무리 강철 같은 이성을 가진 하영이라고 해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하영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성을 동원하여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동안에도, 한석은 선미에게 계속 박고 있었다. 적나라한 소리가 계속, 쉬지 않고 들려왔다.
하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겐 손 끝 하나 대지 않으면서 굳이 선미를 데려온 이유는 뭐지....?'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저쪽을 쳐다보았다.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들려오는 살과 살의 마찰음으로 인해 온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선미가 흘리는 신음 소리가 계속 들렸다.
"하악....하윽....흐....윽.... 한석 님....하악...."
"흐음, 어젯밤에도 그렇게 좋아하더니, 여기서 이러는 게 더 좋은가 보지?"
"아,앙, 몰라요... 흐응.... 하악...하악..."
"선미 씨 더 조이는 것 같아...."
"모르겠어요. 하악... 흐응...."
항상 반듯했던 선미의 흐트러진 모습은 하영에게 너무도 신기하게 다가왔다. 하영은 선미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늘 예의 바른 선미와 지나치게 이성적인 하영, 자기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종사하는 일에 더 몰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동류의 사람으로 비춰지곤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서로 불쾌해했던 그들이다. 함께, 같은 집안을 위해 일해 온 두 사람은 여태까지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석의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선미를 보면서 하영이 느낀 감정은 생소한 종류였다.
'저게 저렇게..... 좋은 건가? ........'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던 하영은 한석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욕정에 불타는, 그리고 여자를 지배한 남자의 눈.
하영은 다시 한 번 그 날 밤의 기억이 엄습해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사무실을 벗어났다. 일단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무실의 문을 밖에서 걸어잠궜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하영은 우선 효진을 떠올렸다. 전화기를 꺼내어 당장 그녀에게 전화를 할까도 싶었다. 그러나 곧 산달이 다가올 그녀에게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할 용기는 없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하영은 박 회장을 떠올렸다. 도저히 참지 못하겠으니 부서를 바꾸거나 한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의견을 낼 생각이었다. 한석의 이런 미친 짓거리를 낱낱이 고해바칠 생각이었다. 평소의 하영이라면 절대 박 회장의 뜻을 거스르거나 반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하영의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일단 한 번 결심하자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대로 회장실로 달려갔다. 직통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하영은 이내 회장실에 도착했다. 회장의 비서인 춘희가 씩씩거리며 달려온 하영을 맞이했다. 의외의 소식이 하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은 당분간 회사에 나오지 않으실 거야."
당연히 회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영은 움찔하고 말았다. 이건 그녀의 계산 밖이었다.
"당분간이라니. 대체 얼마나...."
"모르겠어. 의사가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좀 오래 걸리겠지?"
"의사? 요양? 대체 언제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으신지 좀 되었어. 네가 몰랐다니... 의외구나."
한석의 일에 정신이 팔려있던 하영이었다. 미처 회장의 동태를 챙기지 못했다. 예전의 하영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춘희는 조심스럽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아무래도... 효진이 결혼시키면서 마음의 긴장이 풀리신 모양이야. 큰 병이 있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기력이 쇠하여 당분간 쉬시는 걸로 하기로 했어. 괜히 쉰다고 하면 입방아 찧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대외적으로는 해외출장으로 해놨어. 너무 크게 염려 하지 마."
"그래서 지금 어디 계신데요?"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지."
이런 타이밍에 박 회장의 부재가 하영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더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그녀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어째서 나한테는 비밀로 한 거야?"
그러자 춘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너한테 비밀로 하다니? 최 팀장에게는 미리 언질이 갔을 텐데?"
"최 팀장?"
"그래. 네 팀장 말이야. 최한석 팀장. 네 상관에게 듣지 못 한 거야?"
춘희의 입에서 나오는 한석의 이름에, 하영은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비서실 소파에 무너지듯 앉아버린 하영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영이 한석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어느새 한석은 하영이 모르는 곳까지 회사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정보를 쥐고, 자신이 마음대로 결재하고, 신규 기획과 투자를 좋을 대로 집행하고 있다. 하영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놈이 그렇게 안하무인.... 빌어먹을...."
하영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어쩐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며칠 밤낮을 밤새우고 졸려 미치겠는데도 지나친 카페인 복용으로 잠이 안 오는 느낌이랑 비슷했다. 소파에 앉아있는데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바닥이 단단하지 않고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든 하영의 앞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춘희가 있었다. 하영은 안경을 벗고 눈가를 비비며 물었다.
"왜요, 언니?"
"아니... 네가 빌어먹을 이라고 말하는 건 처음 봤어."
"....제가 그랬어요?"
"응. 그래."
"잘못 들으셨겠죠."
춘희는 빙그레 웃으며 차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따뜻한 잔을 받아든 하영은 잠자코 앉아 춘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기가 마실 잔도 타온 춘희는 하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에는 시간 날 때마다 나한테 자주 놀러오고 그러더니 왜 요새는 안 와?"
"그거야...."
"선 보라고 하도 졸라서?"
하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알면서 그랬어요?"
"후후~"
박 회장이 오갈 데 없는 하영을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직접 돌본 사람이 바로 춘희였다. 광주에 있을 때는 종종 내려가 생활용품을 전달하기도 했었고, 하영이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같이 살기도 했었다.
결혼을 하지 않아 슬하에 자식이 없는 춘희는 하영을 자신의 딸처럼 여기는 마음도 있었다. 실제로 춘희는 하영에게 자신의 수양딸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도 했었다. 하영은 춘희에게 고마워했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런 제안에 선뜻 응하지 못했다.
하영은 춘희가 고마우면서도 불편했다. 박 회장에게 감사해하면서도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하영은 대학을 채 마치기도 전에 사법시험에 도전해 합격했고, 돈을 벌기 시작하자 곧바로 춘희의 집에서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 회장의 회사에 들어와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따로 살기 시작한 이래로 춘희는 하영을 볼 때마다 시집가라고 권하고 있었지만, 하영은 그때마다 춘희를 피해왔다.
하영은 불평했다.
"그렇게 결혼이 좋은 거라서 자꾸 하라고 권할 거면... 그런 거면....."
춘희는 하영의 뒷말에 어떤 이야기가 생략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춘희에게 이유를 묻는 것이리라.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난 후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최 팀장은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냐고요?"
"응. 이제 같이 일한지 좀 되었잖아. 그 뭐냐, 옆에 데리고 있는, 이상한 제복을 입은 아가씨랑은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야? 회사에 소문이 파다한데?"
"그... 그게...."
하영은 찻잔을 어루만지며 주저했다. 안 그래도 한석 때문에 이곳에 왔던 그녀였다. 그러나 막상 보고하려던 대상인 회장이 없게 되자 그녀는 목표를 잃었다. 춘희에게 이 상황을 털어놓을까도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이걸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사내의 소문에 정통한 춘희였기에 역으로 소문을 퍼트리는 속도도 빨랐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친한 춘희라도 하영은 한석의 진면목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한석이 그러고 있는 걸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영은 아직도 "회사 사람"입니다.
"그냥, 그래요. 이상한 소문들은 사실이 아니에요."
하영은 춘희의 질문을 일축했다. 대답을 들은 춘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네가 보기에는 어때?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좋은 사람? 아뇨... 전혀요."
"뭐가 문제인데?"
"문제라면.... 그게...."
하영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 하나 춘희에게 말해 줄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말 꺼내기를 주저하는 하영을 보며 춘희는 빙긋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회장님이 봐둔 사람이잖아. 여태까지의 박 회장님 선택을 믿어봐."
"박 회장님의 선택..."
춘희의 말을 듣는 순간,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애써 억눌러 잊고 있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겪은 일이었지만, 하영은 눈만 감아도 그날의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들, 은은하게 들려오던 총소리, 그리고 자신이 들어가 있던 어둡고 좁은 트렁크 바닥... 차 밖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고함....
오래된 기억이 엄습하기 시작하자 자기도 모르게 숨이 조금 가빠졌다. 박 회장의 선택. 하영은 그걸 통해 이미 한 번 구원을 겪은 적이 있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욌다. 아무리 비합리적인 일처럼 보이는 박 회장의 지시에도, 하영이 맹목적으로 따랐던 이유는 거기 있었다.
하영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게 하영이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으로서 최선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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