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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하영은 비서실을 나왔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눈앞에 두고도 일부러 계단을 통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 기분으로는 도저히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었다. 계단과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생각했다.
한석의 기묘한 일탈행위를 계속 두고 볼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제지할 것인가.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하며 한참을 생각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영의 머릿속에는 춘희가 언급한 "박 회장의 선택"이라는 말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하영은 일단 현 상태를 두고 보기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행위"는 끝나 있었다. 한석은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고 선미는 그의 뒤에서 선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하영은 한석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하루 종일 갈등에 빠져 있었다. 없는 외근이라도 만들어 나가버릴까도 싶었지만, 한석은 명색이 그녀의 상관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세운 철칙상 상관에게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영 씨?"
한석이 불렀지만, 하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느라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석이 한 번 더 부르고 나서야, 하영은 황급히 대답할 수 있었다.
"네?! 넷!!"
"....대답은 한 번만 하셔도 됩니다. 이 서류에서 사용된 약자가 무슨 뜻인지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하영은 한석의 책상 앞으로 가서 그가 내민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어떤 음탕한 말이 적혀있지도 않았고 이상한 선물이 얹혀있지도 않았다. 그저 무역과 해외 투자에 관한 서류일 뿐이었다. 한석은 하영을 재촉했다.
"....왜 빤히 보고만 있어요? 설명해 달라니까요?"
"아, 네."
하영은 한석이 부탁한 설명을 시작했다. 한석은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듣다가 의문 나는 점 몇 가지를 메모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설명이 끝나자 한석은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에서 서류로 시선을 옮기기 전, 한석은 그의 앞에 서 있는 하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거기 서 있죠? 제가 따로 부르기 전에는 하영 씨 볼일 보세요."
"네."
하영은 자리로 돌아가 자기 업무에 매진하는 척을 했지만, 한석을 경계하고 관찰하느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한 달여가 지났다. 회장의 복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영은 전보다 더한 패닉에 휩싸였다. 마음 같아서는 예전에 그녀가 지시를 내리던 사찰부대라도 써서 한석이 저토록 재수 없게 구는 이유나 회장의 소재를 파악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찰부대에 대한 지휘권은 이제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다. 대체 어디에 쓸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대에 대한 제어는 완전히 한석에게 넘어가버렸다. 이제 그녀는 사찰부대에 대해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없었고, 어떠한 보고도 받을 수 없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 나올 뿐이었다.
결국 하영은 끊임없는 고뇌하면서도 한석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 일투성인데 한석은 거기다가 대규모 해외투자 건수를 기획하여 하영의 일감을 더욱 늘려주었다. 전보다 야근을 더 자주하게 되었다.
하영의 피로는 극에 달했다. 이런 그녀를 약 올리기라도 하는 듯이, 저녁 여섯시만 되면 한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퇴근합시다."
"먼저 퇴근하시죠. 저는 검토할 일이 많아서..."
"저런. 웬만하면 대충 해요."
하영은 순간적으로 욱했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찼다.
"...."
"하하. 그럼 전 먼저 이만."
오후 여섯시만 되면 선미를 동반하고 칼바람처럼 나가버리는 한석의 뒷모습을 보며 하영은 허탈감마저 느꼈다. 그가 이 회사에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로 얼마 전까지 회사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너무나 얄밉게도 그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고, 그와 달리 아무렇지 않기 힘든 하영은 이제 분노마저 쌓일 지경이었다. 하영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심이?"
하영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송화였다.
"그래. 나야. 오늘 시간 돼?"
"갑자기 왜 그래?"
"상담을 좀 하고 싶어. 웬 미친놈 하나를 상관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잡아넣을 수 있나 방법을 묻고 싶어."
하영은 수화기를 붙들고 울분을 쏟아내었지만, 정작 수화기 건너의 상대는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쩌지? 요새 한창 바쁠 시기라서 말야."
"....너, 내 말은 들은 거야?"
"들었어. 상관이 미친놈이라며? 그거야 직장인들이면 누구나 겪는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해. 자신의 상관이 제정신인 조직은 이 세상에 없어."
"그게 아니라!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뭐? 범죄라도 저질렀어? 횡령? 배임?"
"이 사람은...."
'나를 추행했단 말이야! 게다가 여자를 데리고 와서 회사에서 그 짓을 하고 있다고!'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하영의 이성은 결코 그 소리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도록 조절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사법계에서 일하는 이 친구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가는 좋게 넘어가기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하영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긴 한숨만 내쉬게 되었을 뿐이다.
"하아. 알았어. 바쁘다는데 어쩌겠어. 수고해, 그럼."
"그래. 미안하다. 다음엔 내가 살게."
"무리할 필요 없어."
하영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유일한 동성친구라고 할 수 있는 송화하고는 좀처럼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조금 전 전화로도 못 한 말을 얼굴을 보면 할 수 있을까 싶은 회의감도 들었다. 책상에 쌓인 일거리를 보니 더 울적해졌다.
결국 하영은 회사를 나왔다. 일부러 차를 두고 거리로 나왔다. 조금 걷던 하영은 자신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어딜 가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을 보자 하영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통렬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친구가... 정말 없구나. 난.... 이런 기분일 때, 갈 곳이 정말 없구나....'
오가는 사람들, 그 군중 속에서도 하영은 고독을 느꼈다. 문득 고개를 들고 드높은 마천루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저녁놀을 바라본다. 익숙지 않은 풍경이 시야에 가득 차자 하영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언니와 오빠 손에 길러졌던 그녀였다. 그러다가 광주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 휘말려 언니와 오빠마저 창졸지간에 세상을 떠나게 된 후, 그녀는 고향 근처의 교회에 맡겨져 자라났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그녀에게 교회의 가르침은 잘 맞지 않았다.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그녀는 오히려 종교에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종교 자체에 대한 호감은 있었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큰 실망을 갖고 있었다.
그 후, 학업 문제 때문에 나중에는 서울로 올라가 박 회장의 비서인 춘희와 함께 살기도 했었지만, 하영은 그들을 향해서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런 하영의 머릿속에서 한 인물이 떠올랐다. 모든 일에 심각한 그녀와 정반대로 모든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 처음부터 그녀와는 전혀 맞지 않았던 남자.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하영은 손을 들어 택시를 한 대 세웠다. 퇴근길 러시아워에 걸려 차가 꽤 막혔다. 더군다나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영을 태운 차는 잠시 후 한 빌라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빌라 앞에 세워진 대형 SUV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빌라에 어울리지 않게도 외제차였다.
'집에 있구나.'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니 불도 켜있었다. 하영은 계단을 올라가 한 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이곳에 직접 찾아온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지?'
막상 문 앞에 서고 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초인종을 누르기 위해 들어 올린 손가락이 떨릴 지경이었다. 다른 이가 사는 집의 문을 연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하영이 주저하고 있는 사이, 문이 먼저 열리고 말았다.
하영이 열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안에서 나온 두 남녀는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오빠. 그럼 잘 먹고 가요."
"내가 데려다 줄게. 비도 오는.... 어?"
갑자기 열린 문에 부딪힐 뻔 한 하영은 옆으로 비켜서던 동작 그대로 굳어버렸다. 태근의 자취방에 태근이 있으리란 건 그녀의 기대였고 예상이었다. 그러나 태근이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여자가 있으리란 건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태근 역시 자신의 자취방 앞에 하영이 당도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하영아... 여긴 어쩐 일로?"
태근 옆에 서있는 현아 역시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이었다.
"하영 언니...?"
하영은 순간적으로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근의 눈과 현아의 눈이 너무도 무섭다는 걸. 사람의 시선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꿰뚫어 버릴 정도라는 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아니, 난 그냥..."
하영은 말을 잊지 못했다. 그녀의 똑똑한 머리는 무언가 말을 만들어 내고 입을 향해 말하라 외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대로 몸을 돌린 그녀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단 한 순간도, 저들의 시선에 자신이 비춰지는 것이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영은 달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도 달렸다. 빌라를 뛰쳐나와 무작정 길을 따라 달려갔다. 힐은 벗겨지고 비에 젖은 치마가 몸에 들러붙어 거추장스러웠다. 길은 어두웠고 비가 내리고 있어서 시야도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영은 계속 달렸다. 아니, 달리려고 했다.
"하영아! 하영아!"
달리기에 익숙하지 못한 하영과 달리 쫓아오는 이는 유망한 체육선생님이었다. 태근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영을 붙잡을 수 있었다. 팔을 붙들린 하영은 더 달릴 수 없었다. 더는 벗어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그래? 이 비에 어딜 가는 거야?"
"...놔 줘."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그래놓고 갑자기 왜 빗속으로 나가는 거야?"
"....널 보러 온 거지, 걔를 보러 온 건 아니니까."
"뭐?"
태근은 어이없어하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하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길바닥에서 비 맞으며 이게 뭐하는 짓이냐."
하영은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남자의 힘, 특히나 태근의 힘을 그녀가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팔을 잡은 채 몇 걸음 걸어가던 태근은 하영을 돌아보더니 혀를 찼다.
"신발은 또 어디다 흘린 거야?"
"신발?"
태근의 지적을 들은 하영은 자신의 발 한쪽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구두 한쪽이 없었다. 한쪽에만 힐을 신고 있다 보니 높이가 맞지 않아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태근은 주저하지 않고 하영의 무릎 뒤에 손을 대더니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렸다. 하영은 깜짝 놀라 태근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굵은 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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