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70화 (47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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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다음 날 아침, 하영은 태근의 집에서 출근했다. 태근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회사로 나가는 기분은 기묘했다. 하영은 태근에게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태근은 씨익 웃더니 부탁을 들어주었다.

"손하영 과장님!"

빌딩에 막 들어가려던 하영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기획실의 장승호였다. 하영은 걸음을 멈추고 승호를 기다렸다. 멈춰선 그녀를 지나쳐 수많은 사람이 회사로 들어갔다. 출근 시간이 임박한 터라 다들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영은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왜 그러시죠, 장 주임님."

"하아. 계속 연락이 안 되셔서..."

달려오던 승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하영은 승호에게 손수건을 주려다가 지금 입고 있는 옷에는 손수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어젯밤 입고 있던 옷은 아직도 태근의 자취방 한쪽에 걸려있다. 새벽에 어딘가 나갔다 돌아온 태근은 하영에게 꼭 맞는 정장 한 벌을 가져다주었고, 그녀는 그걸 입고 출근하는 참이었다.

"과장님 핸드폰으로도 연락이 계속 안 되셔서 직접 찾아다니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어제 댁에 갔더니 안 계시더라구요."

"연락을...? 집까지 날 찾아왔다고요?"

하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핸드폰을 태근의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어제는 비에 홀딱 젖기도 했다.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어제 그 상황에서 옷에 들어있던 핸드폰 따위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하영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로도 모자라 집까지 찾아올 정도의 일이라니, 보통 일이 아님이 분명했다. 승호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그는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어지간한 일이면 연락을 안 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뭡니까. 빨리 말해보세요."

승호가 긴 한숨을 쏟아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과장님이 전격적으로 진행하고 계시는 해외 투자 건 말입니다... 거기서 문제가 났습니다. 좀 크게 났습니다."

"문제라뇨?"

"이번 투자 건에서 일정 금액 이상은 현지 법인에 맡기고 위탁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 현지 법인 중 가장 큰 미국 법인 대표 쿠보 씨가 어제 잠적하고 회사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현지와의 시간차가 있어서 저희에게는 좀 늦게 알려졌습니다."

하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투자 프로젝트의 총괄 기획자는 그녀 자신이었다. 그 일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도 반나절 이상을 모르고 있던 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회사에 새벽 같이 출근하느라 좀 더 일찍 파악했겠지만, 오늘 그녀는 출근 시간에 딱 맞춰서 나오는 중이었다. 새벽까지 태근과 어울려 있었기 때문이다.

태근과 함께 한 행위의 여운을 만끽하던 뇌가 서서히 날카롭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사안들을 승호에게 빠르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현지 연락사무소 연결해서 피해 규모를 확인하고 투자 보험액을 확인하세요. 해당 국가의 사법당국에 협조 요청하고,... 또...."

하영의 두뇌가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이가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하영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타이밍에 만나고 말았다. 하영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고 있던 승호가 차려 자세를 취하더니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가 인사한 대상은 다름 아닌 한석.

하영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몸을 돌렸다. 뒤에 유진을 동반한 한석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늘 함께하던 선미가 아닌 유진을 데리고 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하영은 그 점에 대해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한석은 승호와 하영을 둘러보곤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회사에 들어가지도 않고 입구에서 이러고 계시죠? 급한 일입니까?"

"그게 저어..."

승호는 긴장한 표정으로 하영을 힐끔거렸다. 하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일전에 지시하신 해외투자건 진행 중 ... 대행업체 하나가 증발했습니다. 이후 면밀히 조사하여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조사? 차질?"

한석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갑자기 달라진 그의 목소리 톤에서 하영은 예전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쳤다. 한석은 하영과 승호를 돌아보았다. 눈빛이 음산한 빛으로 번뜩였다.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손 과장이 아주 잘 되어가고 있다고 보고한 게 바로 어제 아니었습니까? 그게 언제 일어난 일입니까!"

"어제 업무종료 후에...."

한석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대번에 고함질렀다.

"그런데 나한테 보고도 안 했단 말인가요? 어제 업무종료 후부터 지금까지 12시간이 넘게 지났는데, 그 사이에 이 일에 대해 책임지고 보고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승호는 물론 하영 역시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보고는 고사하고 이쪽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보다 못한 승호가 겨우 나서서 설명하려 했다.

"그게.... 손 과장님이 연락을 받지 않으셔서...."

"손 과장이 연락이 안 되면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요! 장 주임. 말해 보십시요. 누가 더 윗사람입니까. 나예요, 손 과장이에요?"

"그, 그야...."

한석의 언성이 높아졌다. 승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다. 실제로 업무는 그녀가 다 처리한다고 해도 명목상 윗사람은 한석이 분명하다. 그녀에게 연락이 안 되었으면 한석에게라도 보고했어야 했다. 이는 중대한 보고 지연 문제였다. 다른 누군가 책임지지 않으면 승호에게 큰 책임이 돌아갈 일이었다. 승호는 황급히 고개 숙이고 물러났다.

"죄...죄송합니다."

하영도 애써 담담하게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지만, 불같이 화를 내는 한석의 태도는 그런 걸 쉬이 용납하지 않았다. 프로젝트의 방향이야 그가 정했다고는 하지만 세부사항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하영에게 있었기에 그의 분노는 고스란히 그녀를 향했다.

한석은 거세게 질책했다.

"하영 씨는 분명 알아서 잘 하고 있노라고 저에게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설명 해봐요. 어떻게 한두 푼도 아니고 수천억 원이 달린 문제에 대해 이토록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바로 어제, 단 하루 모든 걸 털어내고 잠시 외면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가장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지금 사람이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평소에 회사 일에 대해서는 마치 다 아는 사람처럼 그렇게 잘난 척 실컷 하더니 결과가 이겁니까?"

하영의 아픈 부위를 쿡쿡 찌르는 한석의 질책은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하영보다 높은 자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 일에 대한 책임은 교묘하게 그녀에게만 전가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하영은 속으로 분을 삼키며 답했다.

"....애초에 투자 리스크는 있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

"그래서! 그래서, 지금 하영 씨가 잘 했고 내가 못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당장 상황 파악하고 대처방안 모색해서 사무실로 가지고 돌아오세요. 지금 당장! 저는 회장님께 이 일에 대해 직보하겠습니다."

한석은 더 이상의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대로 하영을 지나쳐 회사로 들어가 버렸다. 유진 역시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회전문 너머로 사라지자 승호는 조금씩 씩씩거리다가 이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지가 윗사람이면 상관답게 책임을 져야지. 어디다 떠넘기는 겁니까, 게다가 실질적으로 일을 다 처리했던 건 손 과장님 아니십니까. 지금 저 사람이 되레 화내는 건, 웃긴 거 아니에요?"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 윗사람에게 보고를 안 하고 있던 건 우리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실질적으로 해온 사람이 저이니 책임도 제가 져야겠지요. 지금 저분의 태도를 보아 분명 이 일을 쉽게 넘어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 주임님. 많이 번거롭겠지만, 좀 도와주세요."

"네? 네에.... 알겠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승호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그가 알던 하영은 설령 무슨 일이 생겨도 남에게 결코 도움을 요청하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그녀의 입에서 "도와 달라"는 소리가 나왔다. 승호는 만약 하영에게 무슨 일이 있어 그녀가 변한 게 아니라면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사태이리라 생각했다.

"아까 제가 말했던 것들, 기록하셨습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하영은 고개를 한 번 흔들어 떨쳐내곤 승호에게 마저 지시를 내렸다. 승호는 수첩 한 가득 하영의 지시를 받아 적고는 자기 사무실을 향해 뛰어올라갔다. 하영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각 부서별로 돌아가며 사태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사태는 명료한 만큼 참담했다.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해오던 해외협력사의 사장이 거액의 투자위탁금을 가지고 그대로 잠적해버렸다. 어떤 징후도 없었고 흔적도 없었다. 말 그대로 증발. 수천억 원이 그대로 공중에서 분해되어 버렸다. 말이 좋아 수천억 원이지 연관된 파급 효과를 고려하면 조 단위가 될지도 몰랐다.

오늘 아침, 태근의 품 안에서 눈을 뜰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던 하영은 이제 낙하산 없이 땅으로 뛰어내린 스카이다이버의 기분이 되었다.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어....'

하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번 털어내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으로 들어가던 그녀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의 자리에 유진이 앉아 서류철을 들춰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하는 거죠, 유진 양?"

"....."

유진은 고개를 들어 하영을 힐끔 쳐다보곤 다시 서류철로 고개를 돌렸다. 별다른 대꾸도 없었다. 하영이 사무실 안을 둘러보니 캐비닛은 전부 열려 있었고 서류란 서류는 전부 나와 있었다. 흡사 수사기관의 수색을 받은 용의자 집안 같은 광경이었다. 자기 자리에서 문건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석이 하영을 향해 손짓했다.

"방해하지 말아요. 쟤는 내가 임시로 고용한 감사관이니까."

"감사관....?"

"더러운 일을 많이 해왔던 우리 회사 사정상 외부 회계감사원을 들일 순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유진이 보고 보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영은 기가 막혔다. 유진의 총명함이야 지난번부터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한석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그가 여태까지 해온 것들, 그가 여태까지 회사에 데려온 여자들, 전부 하영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영은 터질 것 같은 속내를 억누르며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고등학생 하나를 데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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