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71화 (47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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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한석은 파르르 떨리는 하영의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하영에게 반문했다.

"그래서요. 불만입니까?"

"없진 않습니다."

"그럼 애초에 일을 잘 하시든가요.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지금 잘 했다는 겁니까?"

"...."

하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무 깨물어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한석의 조치가 어처구니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일이 제대로 꼬여버린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한석은 들고 있던 문건으로 책상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회장님 딸이니 엄밀히 따져서 외부 사람도 아니고 말이죠. 불만 있으면 회장님에게 가서 말씀하세요."

하영은 기가 막혔다. 한석이 부임한 이래, 회장 얼굴은 고사하고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한석이 으스대는 꼴을 보아하니 그는 하영이 닿지 못하는 곳에 회장을 빼돌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영은 이를 악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때 마침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석에게 다가와 서류철 몇 개를 건넸다. 그리고 그중에서 몇 군데를 짚어가며 한석에게 무어라 귓속말 했다. 속삭이는 게 끝나자 한석은 하영을 불렀다.

"몇 가지 물어봅시다. 손하영 씨."

"네."

"해외에 분산 적치된 우리 회사 자산... 아니, 엄밀히 말해서는 회장님의 뭉칫돈들, 이거 다 누구 이름으로 예치되어 있죠?"

"박태근과 박효진입니다."

그러자 한석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싸늘했고,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또 있잖아요?"

하영은 주저하며 대답했다.

"....제 이름으로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한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영을 쳐다보았다.

"왜?"

"...왜라뇨?"

"아니. 태근이형이랑 효진이야 자식이니 그렇다 치지만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이름을 얹고 있는 겁니까?"

하영은 기가 막혔다. 이 회사에 관련된 사람들은, 아니, 딱히 회사에 관련되지 않더라도 박 회장과 하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박 회장이 그녀를 자식처럼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석이 아무리 눈치 제로인 인간이라고 해도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하영으로서는 그가 이렇게 대놓고 이유를 물어보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무슨 의도로 하신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의도라뇨. 말 그대로의 질문입니다. 회장님 자식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그분의 유산을 어째서 당신이 나눠먹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야..."

전혀 뜻하지 않은 질문에, 평소에 의문조차 가져보지 않은 일에 대해 질문을 받으니 하영으로서는 대답이 막막했다. 그러자 한석이 재차 따지듯 물었다.

"혹시 당신이 숨겨놓은 자식이라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뭐라고요?"

"당신 어머니와 회장님이 부적절한 관계였다거나... 아, 아니다. 기록을 보아하니 당신 언니가 이 회사에서 일했던 적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회장님과 당신 언니가 붙어먹었다거나... 그럼 말이 되는데..."

짝-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석 얼굴이 홱 돌아갔다. 방금 뺨을 후려친 하영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만 떨리는 게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하영의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하영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너 이 자식,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네가 감히..."

그러나 한석은 이런 하영의 반응조차 우습다는 태도였다. 그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씨익 웃었다.

"말보다 주먹이라니. 이게 대한민국 변호사의 수준이라는 거죠? 아하?"

"사과해."

"뭘 사과하라는 겁니까? 아니, 맞은 사람은 난데 내가 당신보고 사과하라고요?"

"내가 때린 건 사과하지. 그렇지만 그 전에 당신도 사과하라고. 누구보다 떳떳한 길을 걸었던 내 언니였어. 그런 언니에 대해 당신은 터무니없는 소리로 예단하고 모욕하고 있어.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더는 문제 삼지 않겠어."

하영의 눈빛은 단호했다. 무섭게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한석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목을 꺾다가 하영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떳떳한 길? 당신 언니, 폭도였다며? 폭동에서 총 맞아 죽은 게 그렇게 떳떳한 일이었습니까? 저는 여태 몰랐군요."

하영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눈이 뒤집힌 그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한석에게 집어 던지다 못해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울부짖으며 한석을 발로 차고 때렸다. 결국 그녀는 보안요원들에 의해 사무실에서 끌려 나갔다.

다음 날, 회사의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해임예정안공고가 나붙었다.

[ 대상 : 손하영

직급 : 과장

소속 : 제17법무팀

사유 : 위 인물은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투자를 무단으로 진행하였으며 이에 대한 조사에 불응, 또한 상관에 대한 폭언과 폭행을 행한 바 해임을 처분함. 당 인사 조치에 불응할 경우 징계위원회를 요청할 수 있으며, 30일 이내로 소명하기 바람. ]

소명기간이 다 되어가도록 하영은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예정안공고가 있던 자리에는 확정공고가 붙었다. 하영은 그렇게 회사에서 해임되었다.

***

하영의 해임이 확정되기 며칠 전, 기획실의 장승호 주임은 게시판 앞에서 장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황망하기 그지없는 공고문이었다. 손하영이 해임이라니. 승호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사태였다.

'손 과장님.... '

그는 백방으로 하영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하영의 집까지 다녀온 참이었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는 그녀였기에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집에는 사람의 흔적 자체가 없었다. 집에도 들르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게 분명했다. 그가 알고 있는 선에서 최대한 뻗어보아도 하영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손하영의 해임"으로 인해 회사는 발칵 뒤집힌 터였다. JS그룹만의 충격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정,재계를 비롯한 사회 각지에 연이 닿아있는 JS그룹이었기에 그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시장에서 어마어마한 현금 흐름을 도맡고 있던 JS그룹이었기에 장 전체의 유동성 흐름이 경색될 지경이었다.

이런 사태에 대해 수많은 이들의 분석이 뒤따랐다. 수천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결론은 하나로 모였다. 그들은 그룹 내의 권력이 옮겨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사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회장의 총애를 줄곧 받던 하영이었기에 그녀를 제치고 사위인 한석이 전면에 나선 것을 가리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건 아마도 하영이 여자였기에 더욱 그렇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실질적인 2인자였던 하영을 통해 JS그룹에 연을 닿으려고 굽실거렸던 이들이 이제는 하나둘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런 쑥덕거림 속에서는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까지 잉태되고 있었다.

'좆도 모르는 새끼들이... 진짜....'

사내에 퍼진 그녀에 대한 뒷담화를 들을 때마다 승호는 분노하고 절망했다. 그는 새삼 하영의 파워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녀가 있을 때는 그게 너무 당연하여 이상하지 않았던 힘. 그 힘의 주인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나니 그 거대한 공백이 도무지 메워지지 않는다. 그녀가 도맡던 수많은 사업검토, 처리 등을 위한 서류는 각지의 팀으로 분배되어 담당 직원들을 과로사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승호 역시 그런 처지다.

'그 정도의 일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처리하던 사람이야... 그런 초인에 대해서 너희가 그렇게 찧고 까불 순 없는 거야....'

승호는 하영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누명이라 생각했다. 설령 잘못된 투자 건이 큰 실책이라고 해도 그녀가 일신의 안녕을 위해 그런 일을 도모하진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 승호는 사내에서 그와 같은 의견인 사람들을 규합하여 탄원 성명이라고 발표할까 싶었다. 그러나 그 작업도 쉽지 않았다.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새로운 2인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한석이라는 자는... 대체....'

하영의 대단함이 빛을 발할수록 한석의 무서움은 더 깊은 어둠을 더해간다. 설령 한석이 직원 수백 명을 잘랐다고 해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단번에 하영의 윗자리를 차지한 것은 물론 그녀를 해고하기까지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회장의 반대는 한 번도 표출되지 않았다. 반대는 고사하고, 한석이 회사에 부임한 이래 회장은 대외적인 활동 자체가 없어졌다. 이는 한석에 대한 암묵적 지지로 해석되었다.

그러니 자연히 회사 내 사람들은 한석을 함부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말이 팀장이지 회사 내에서 신이나 마찬가지의 존재가 되었다.

언제 깨져버릴지 모르는 아주 얇은 살얼판 위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 그게 회사 내부 분위기였다.

'이제 앞으로 어쩌지....'

승호는 매일 같이 게시판 앞에서 탄식하는 게 일과가 되어버렸다. 어떤 이들은 그런 승호를 염려하기도 했다. 하영에 대해서 지나치게 아쉬움을 토로하면 그런 행동마저도 한석에게 찍힐까봐 두려운 까닭이다.

'손 과장님 고향이라도 가볼까. 고향 집에 내려가신 건 아니겠지, 설마?'

앞날이 막막한 승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몸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 햇빛을 가린 탓이다. 인기척을 느낀 승호가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아니, 돌리다보니 위로 올려야만 했다. 상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혼자 몸으로 회사 로비를 꽉 채운 그는 승호와 눈이 마주치자 공손하게 물어왔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네? 네. 물어보십시오."

난데없이 회사 로비에 들어선 그였지만, 아무도 제지하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한 성인 남자 두 명은 합쳐놓은 듯한 크기의 인물인지라 감히 막을 엄두가 안 난 까닭이다. 승호도 속으로는 딸꾹질이 날 지경이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회장실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회, 회장실이요?"

"네. 잠시 박 회장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상대는 전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승호의 귀에는 박 회장을 뵙고 공격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승호를 상대로 한 말투는 지극히 공손했지만, 상대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회장님을 뵈려면 사전에 약속을 하셔야... 그리고 회장님은 최근 출근을 안 하고 계십니다."

"최근?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만."

사실 회사 사규에는 낯선 방문자에게 회장의 재석 유무를 알려줄 의무 따위는 없었다. 그저 위압감에 경도된 승호가 자진해서 대답했을 뿐이다. 다행히 상대는 승호에게 회장을 내놓으라고 횡포를 부리지 않았다. 대신 더 곤란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렇다면 제17법무팀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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