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57)

해가 뉘엿뉘엿 서산 뒤로 몸을 감추기 시작하자, 나는 윤아와 하던 이야기를 잠깐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뒤를 따라 윤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안방으로 날 끌고 갔다.

" 한눈 팔면 죽어? "

윤아의 귀여운 행동에 한번 웃어주고는 옷장을 열었다.

대충 블랙진과 검은색 와이셔츠, 마이를 입자, 윤아가 볼을 부풀리면서 나를 째려본다.

아, 목도리가 빠졌구나.

몇달 전 윤아가 직접 짜준 목도리.

나는 알았다는 제스쳐와 함께 서랍을 열어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 과음 하지 마. "

신발을 신을 때 현관에서도 끝까지 당부를 잊지 않는 윤아였다.

그리고 까치발을 하고 나에게 입 맞추었다.

" 조심히 다녀와요. "

" 알았어요. 빨리 갔다 올게요. "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무척이나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윤아를 뒤로 한채 집을 빠져나왔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익숙한 자동차가 보였다.

" 여! "

나는 피식 웃어주고 조수석으로 가서 탑승했다.

준연은 술집으로 가는 내내 실실 웃으면서 흥얼거린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믿기 힘들정도로.

듣기로 태연누나는 아직도 침울해 있다고 한다.

" 아, 맞다. 후배 한명 더 올거야. 너도 알텐데? 정수연 알지? "

정수연.

우리 대학교 사회지리학과 퀸카라고 소문이 나 있는 여자라 나도 익히 들었다.

이미 준연과 안면을 텃는지, 같이 술을 마시자는 소리였다.

여자가 끼인다는 소리에 약간 불길했지만, 일단은 가보기로 했다.

술집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약간은 고풍스러운 느낌에 분위기가 잘 잡힌 그런 집이었다.

준연은 차를 주차장에 대 놓고 차에서 내렸다.

" 너랑 술 마시는거 진짜 오랜만인 것 같다. 윤아씨 덕분에 넌 건강하겠네. "

" 어이. 술도 약간씩 마셔줘야 된다고. 너무 안 마시면 탈나. "

내 말에 준연이 킥킥 거리면서 웃었다.

우리 둘은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술집 상황으로 봐서, 퇴폐한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준연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여성을 발견하고 그리로 나를 이끌었다.

" 수연아. "

준연이 슬며시 그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여자는 놀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 아, 선배 오셨네요. 아……. 이 분이 연우 씨? "

정수연이라는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여자는 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건넸다.

나도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받아주었는데, 손이 매우 차가웠다.

" 말씀 많이 들었어요. 연우 씨에 관한. "

정수연이라는 여자는 술을 내 잔에 따라주며 나에게 건냈다.

" 아, 예.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

그 때, 준연이 미간을 찌뿌리며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나와 여자는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되레 쳐다봤다.

" 딱딱하게 존대는. 그냥 반말해! 여기 연우는 25살. 수연이는 20살. "

스, 스무 살?

23에서 24 정도로 보였던 여자였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훨씬 어렸다.

처음 인상은 발랑 까진 여자였다.

치마도 상상 이상으로 짧고, 겨울이었지만 딱 붙는 옷을 입고 와서 몸매가 훤히 다 드러나는 그런 의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금색으로 염색해서 가슴 앞으로 내린 머리 스타일이 보통 일반인과는 많이 달랐다.

" 음……. 그래도 되요? "

여자가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고 술을 목 뒤로 넘겼다.

알싸한 양주의 향이 몸 전체에 퍼졌다.

이 맛이지.

" 연우 오빠는 여자 친구 있으신가? "

정수연이 나에게 물어왔다.

준연이 아마 말하지 않았나 보다.

" 아, 저는 결혼 했습니다. "

결혼 했다는 말에 약간은 당황하는 정수연이라는 여자.

눈을 크게 뜨고 껌뻑이더니 이내 진정하고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준연도 오랜만에 술이 들어가자 많이 업 된 모양이었다.

" 캬, 역시 남자 둘 여자 하나가 딱이라니까? "

나는 아닌데 말이지.

윤아가 지금 이 상황 보면 죽이려 들거라고.

나는 속으로 준연을 욕하며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수연이 계속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아가씨네.

" 벌써 결혼이라……. 애는 있어요? "

애 있냐는 말 벌써 두번째 듣네.

나는 한숨을 한번 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수연의 얼굴이 펴지는 것은 왜일까.

이 여자, 불안하다.

" 어이, 어이. 정수연. 너 눈빛이 예사롭자기 않은데? 연우 유부남이라고요, 아가씨야. "

준연이 웃긴다면서 술잔을 들고 수연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수연도 특유의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리며 웃었다.

" 에이, 저 그런 나쁜 여자로 만들지 마요. 연우 오빠가 마음에 들긴 하지만, 어쩔수 없는거 아니겠어요? "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묵묵히 술만 들이켰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얼굴은 뻘개져선 웃고 떠들고 난리도 아니다.

술병이 하나 둘 늘어감과 동시에 세사람의 정신은 헤이해 졌다.

그저 손 가는대로 마실 뿐.

" 헤에. 오빠. 우리 학교에서도 아는척 하기에요? "

그 매혹적인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말하는데 보는 사람이 더 쑥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부끄러운 마음에 술을 한 잔 넘겼다.

수연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계속 웃어재낀다.

" 어이, 내가 말이지……. 힘들거덩? 니가 우리누나 잘 봐야된다잉? "

갑자기 준연이 내 어깨 위에 손을 턱- 하니 얹고 말했다.

눈은 거슴츠레 뜨고 뭐하는 짓이야, 이게.

점점 더 상황이 꼬여가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윤아만 해도 벅찬데 앞에 있는 최고 퀸카 정수연에다가 친한 친구의 누나, 그것도 애교덩어리 누나라니.

나는 아픈 머리를 두어번 짓누르고 눈을 번쩍 떴다.

수연이 웃으며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아름답다.

아, 무슨 생각을 한거지.

술이 들어가니 안 드는 생각이 없구만.

적당히 취했다고 생각한 나는 마지막 술잔을 들이키고 탁자 위에 엎어 놓았다.

그만 마시고 싶었다.

" 에이, 더 마셔요, 더.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저희가 처음 만난 날이잖아요. 코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야죠! "

수연이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다가왔다.

부담스러웠지만 잠자코 있었다.

수연은 내 컵을 도로 뒤집고 한잔 쭉 따른 다음 나에게 건내주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한번 쉬고 그 술은 벌컥 벌컥 마셨다.

차가운 술이 목을 타고 흐르자, 기분이 말끔해지는 느낌이었다.

" 힛. 이 오빠 술 세네? "

수연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 보았다.

바로 옆에서 짧은 치마를 입고 달라 붙어 있는 모습이 명백한 여우의 그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하지만 계속 옆으로 붙어서 노골적인 스킨쉽을 시도하는 그녀를 떼어내긴 힘들었다.

나는 눈빛으로 준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술을 마시고 헤헤 거리고 있던 준연은 내 심각한 눈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참. 수연아. "

준연이 그녀를 부르자, 그제서야 입맛을 다시며 떨어졌다.

입맛은 왜 다시는 건데.

" 네? "

수연의 개성있는 세심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피곤했다.

아, 세상이 왜 이러지.

뭐가 이렇게 뺑뺑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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