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만 더 가면 되요, 남편! "
시내에 다 들리도록 소리치는 윤아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웃으면서 우리를 바라보는데도 윤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것도 좋지만,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 할텐데.
그런데 그때 마침 내 전화기가 울렸다.
" 여보세요? "
[ 오라버니. ]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왔다.
윤아가 옆에 있는 상태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와버리면 곤란한데.
" 어? 이 목소리는! "
역시나 윤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째려본다.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이러는 것을 보면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왠일이야? "
내가 윤아를 보고 진정하라고 제스쳐를 준 후 전화기에다 대고 묻자, 곧 이어 투정이 들려왔다.
[ 치. 꼭 무슨 일 있어야 전화 하나? ]
" 미영아. 근데 말이지. 옆에 윤아가 있어서 조금 곤란하게 됬거덩? "
미영이에게 윤아와 같이 있다는 말을 하자, 윤아가 활짝 웃으면서 전화기를 뺏으려 들었다.
절친인 두 사람으로서는 반가웠을 것이다.
바쁜 스케쥴로 인해서 연락이 잠깐 두절 되었던 그녀였기 때문에, 가뭄에 한 줄기 비와 같이 적절한 시기에 전화가 와 주었다.
" 미영아! "
윤아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자마자 소리치는 윤아에 다시 한번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내가 소리를 낮추라고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 어떻게 연우 오빠랑 같이 있어? 맨날 붙어 다니나봐? ]
스피커 폰을 통해서 들려오는 미영의 목소리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부부가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듣고보니 뭔가 영화에서만 보던 해바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혼 3년차에 이제 아기를 가진 우리 부부였지만, 미영의 덕분에 행복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그녀가 고마워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아내를 바라보고 있으니 참 쉴새 없이 떠들어댄다.
여자들이란.
" 어이, 여보. 여기서 전화만 하고 있을거에요? "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는지 윤아는 아쉬운 표정으로 미소지으며 마지막 인삿말을 건냈다.
" 미영아, 남편이 끊으래. "
" 내, 내가 언제! "
어떻게 저렇게 말이 바뀌지.
나만 나쁜 놈 됬잖아.
[ 헐. 아내가 전부라 이거지? 알았어. 오빠한테 두고보자고 전해줘! ]
미영의 살벌한 목소리를 끝으로 내 전화기의 폴더가 닫혔다.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윤아를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벌쭉 웃으면서 내 손을 이끌고 다시 길을 걸어갔다.
" 너 나빴어. "
내가 살짝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윤아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까치발로 내 입술에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
" 어허. "
이제 쉬도 때도 없이 키스를 해대는 윤아가 걱정되었다.
뭐, 나야 좋지만 이러면 희소성이 떨어지잖아.
가끔 해줘야 기분이 더 좋을텐데 말이다.
" 삐지지마, 남편 - "
안 삐져, 이 여자야.
그렇게 말한 윤아는 옆을 가리키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겐지] 라고 적힌 일본식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행복감에 나는 진심으로 웃었다.
" 배고파 죽을 뻔 했네. "
나는 그렇게 말하고 윤아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유명한 식당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 잠깐 기다리고 있어, 윤아야. 나 잠시 나갔다 올게. "
내가 대기하는 의자에서 일어나자, 윤아도 일어나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옷 구석구석을 만져본다.
" 뭐해? "
내가 묻자, 아니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생각해보니 담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안 핀다니까. "
생각을 들켰는지 윤아가 약간은 움찔하다가 이상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는 윤아에게 가방을 맡겨두고 문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얼을대로 얼어버린 길은 잿빛 아스팔트 길을 더 삭막하게 만들어버린 듯 했다.
낮이 짧은 겨울의 가로등은 벌써부터 빛을 던질 준비를 하는지 잠깐식 깜박이는 게 보였다.
나는 왠지 모르게 진지해져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쓰는 사람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슬퍼보이는 사람들 까지.
웃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
윤아가 바로 옆에서 나를 즐겁게하고 또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에 웃어보려 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가워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한숨을 한번 폭 내쉬고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에, 윤아를 보면 기분이 나아질거라는 생각에 다시 [겐지]로 들어왔다.
" 빨리 왔네? "
윤아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막히는 암흑만이 눈 앞에 끝없이 펼쳐졌다.
" 남편. 어디 안 좋아요? "
윤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혼자 진지하면 되지, 덩달아 윤아까지 다운시켜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이러면 안되겠다고 느꼈다.
" 응? 아니야. 그냥. 저기 자리 비었다. 가자. "
내가 '웃음을 지으며' 윤아의 손을 이끌고 빈 자리로 가도 윤아는 심각한 표정이다.
"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에요. "
나의 물음에도 윤아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윤아를 마주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웃겼는지 그제서야 풋 - 하고 웃는 윤아.
내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윤아가 고맙기도,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만큼 나는 활기차게 외쳤다.
" 겐지 정식 2개요! "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윤아가 식겁했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 오빠! 쪽팔려요! "
그래?
하긴, 나도 쪽팔려.
.
.
.
.
밥을 먹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윤아는 내가 우선이었다.
내가 밥을 먹기 시작해야 그녀도 먹었고, 내가 먼저 팝콘을 먹어야 하나씩 오물거렸다.
아, 빨대는 하나만 있어도 상관 없다나 뭐래나.
사람들의 평과는 달리 그닥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에 실망감이 밀려들어왔다.
" 재미있었어? "
" 웅……. 그렇게 재밌지는……. "
윤아가 실망이라는 표정으로 내 팔짱을 꼈다.
역시, 윤아랑 나는 뭔가 통한다니까.
시계를 보니 9시가 다 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집으로 들어가기에는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윤아의 손을 잡고 물어보았다.
" 우리 더 놀다 갈래? "
노는 것을 좋아하는 윤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품안에 안겨서는 부비적 대면서 매달렸다.
" 미영이도 부를까? "
보통이라면 둘이서 노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미영이는 달랐다.
내가 윤아를 만난것도 미영의 덕이었고, 더 가까워지는 것도 미영이 때문이었으니까.
윤아도 그것을 알고 있어서 그녀는 항상 오케이였다.
" 응! 미영이도 불러요. "
나는 알았다면서 다시 한번 그녀에게 통화를 연결했다.
" 어이 동생. "
[ 왠일이래. 오빠가 나한테 전화한거 한 3년 된거 같지 않아? ]
빈정거리는 미영의 태도에 약간은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상대를 업시키는 그녀의 말투에 판단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까 통화해놓고는. "
[ 그건 내가 전화 한거잖수. 어쨋든 왜? ]
" 술먹자고. 윤아랑. "
[ 사줄거지? ]
나보다 돈 많은 애가 왜 이래.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라 인심쓰기로 했다.
" 알았어. 어디지 그……, [고기고집]으로 와. "
[ 오카이. 오빠 지갑 다 털어주겠어. ]
뚜 -
항상 살벌한 말로 통화가 끝나는구나.
윤아는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있다.
미영이랑 약속 늦으면 안되겠지?
" 가자, 윤아야. "
" 네 남편! "
오랜만에 모이는건가,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