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57)

제길.

하느님.

수연이 나를 알아봤는지 번호를 구걸(?)하던 남자를 내팽개치고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 연우 오빠! "

내 이름이 불리자, 거절당한 남자가 나를 째려보더니 후다닥 도망을 간다.

그 남자가 가던 말던 난 상관 없었지만, 윤아는 상관있었다.

그 남자가 아니라 수연이에게.

" 아, 그 때 같이 술먹었던 정수연? "

윤아의 얼굴이 뭉게졌다.

" 아이고……. 골 때리네. "

내가 윤아의 손을 더 꽉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윤아는 내 손을 빼려는 눈치다.

왜 이래, 이 사람이.

" 왜 인사를 안해요.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

이미 수연은 우리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금발은 하얀 풍경과 잘 어울리는 머리였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니 생각이 많아지는구나.

" 아, 미안. "

" 또 뵙는군요. "

수연이 윤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아는 우물쭈물 하더니 마지 못해 그 손을 살며시 잡았고, 수연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 보기 좋네요, 두 분. "

수연에게 그런 말을 듣는 다는 것이 뭔가 아이러니 했지만,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안성환 보다 더 하잖아.

" 근데 지리학과가 이쪽 문에는 왠 일이야? 여기랑 많이 먼데. "

내가 그렇게 묻자, 수연은 머리를 한번 흔들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 그냥, 오빠 얼굴이나 한번 보려구요. "

어떻게 결혼한 사람 앞에서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정말 독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이 들어갔을 때는 그냥 쉬운 여자 같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매서워 보였다.

" 아, 그러냐. 우리 강의 시간 다 되서 가봐야 할 것 같아. "

내가 대충 그렇게 마무리 짓자, 수연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많이 엉키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 윤아야.

윤아를 바라보니 많이 뚱해 있다.

내 손을 잡고 있긴 했지만, 힘 없이 그냥 걸치고 있는 정도였다.

" 윤아야. "

내가 그녀를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또 윤아를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 윤아야. "

두 번을 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태연 누나와 미영이를 뺀 다른 여자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윤아로서는 내가 많이 미울 것이다.

나도 윤아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깨뜨릴 마음이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린 윤아는 상처받을 테니까.

강의?

때려쳐.

난 윤아가 더 중요하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윤아를 이끌고 대학교 공원으로 왔다.

겨울이라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 강의 늦어요. 어디 가는거에요. "

간만에 윤아에게 들은 말이었지만, 무뚝뚝하고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윤아를 벤치에 앉히고,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 두잔을 뽑았다.

" 윤아야, 이야기 좀 해. "

"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가요. "

머리가 아파온다.

나를 언제나 믿고 따라주었떤 윤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니 섭섭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더이상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만든 내가 너무 한심해 보였다.

" 임윤아. "

내가 강경하게 말하니 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혼자 손장난을 쳤다.

지금은 이래도, 이게 윤아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좀 알아줬으면 좋겠건만.

" 수연이……, 아니지. 그 여자, 나랑 아무런 관계 없어. 나도 걔 만날 때 아무것도 몰랐다고. 준연이가 후배라면서 데리고 왔고. "

" ……. "

윤아가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계속 설명해 나갔다.

" 니가 걱정하는 그런 사이 절대 아니야. 아까 봤잖아. 나도 걔 꺼려해. "

가만히 보니, 윤아가 울고 있다.

그 큰 눈망울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며,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울지 않는 것 처럼 손으로 재빨리 눈물을 닦아내지만, 눈물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 윤아야……. "

얼마나 서러웠을까.

자신의 마음표현을 가급적 꺼려하는 윤아에게 근래 내 태도는 정말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매일 술을 먹으러 나갈 때.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밥 안 먹는다고 할 때.

그리고, 다른 여자를 만날 때.

나는 팔을 벌려 윤아를 꽉 안아주었다.

" 오빠……. 나는요……. "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차오르는 울분을 막지 못하고 말이 계속 끊겼다.

그녀의 작은 등을 토닥여주면서 기다려주었다.

" 나는……. 무서워서 그랬어요……. "

" ……. "

윤아의 서러움 젖은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오빠가……, 오빠가 갈까봐……. "

제기랄.

윤아를 울린 건 비록 나지만 원인은 정수연에게 있다.

내가 눈뜨고 있을 때는 정수연, 절대 만나지 않으리라.

" 미안해 윤아야. 정말 미안해. "

나의 사과에, 윤아는 더 서럽게 울었다.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또 울었다.

윤아가 우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이길.

이제 우리 부부 사이에는 웃는 일만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녀를 달랬다.

이제 그녀만 바라 보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오늘만 울자, 오늘만.

" 미안해. "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윤아의 울음 그치게 해보려고 노력했다.

" 진짜……, 저 진짜 오빠 사랑한단 말이에요……. 오빠 없이 나 못 살아요……. "

위로를 하려다가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아버렸다.

윤아가 나를 사랑한다는, 그리고 그것이 평생 갈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 나도 사랑해, 윤아야. "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난 후, 우리는 강의를 듣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돌아오는 내내 서먹서먹하게 앞만 보고 걸었지만, 우리 두 사람의 손은 서로를 꼭 잡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서도 윤아는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결혼 하고 이런 적이 한번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이럴 때는, 내 평생의 어드바이서가 있지.

나는 미영이를 생각해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용? ]

" 아, 미영아. 나 연운데. 심각한 일이 벌어져서 조언 좀 얻으려고. "

[ 나한테 조언 얻는 걸 보니 윤아랑 관련됬구만. ]

예리한 연예인이롤세.

나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나지막히 그렇다고 말했다.

[ 자! 그럼 말해보시게나. 나중에 밥이나 한끼 사고. ]

윤아를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데 그깟 밥이 문제냐.

랍스터라도 사주마.

" 내가 음……. 아, 절대 오해하지마라. 뭐라고 설명해야 되나. 아! 그래. 어떤 예쁜 여자가 나한테 친한척 했어. 윤아 앞에서. 그래서 조금 트러블이 있었거든? "

혹시라도 윤아가 들을새라 조심스럽게 말하자 미영은 한숨을 쉬면서 혀를 찬다.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따지고 보면 난 잘못한게 없는데.

[ 오빠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잘못됬구만. ]

아, 그러냐.

그러면 그런거고.

어쨋든.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일단 오빠도 알다시피 윤아가 마음이 여리잖아. 거짓말 못하고. 근데 자기 마음은 또 표현을 못해. 그러니가, 오늘 하루는 계속 이렇게 있어봐. 방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거야. 그리고 잠들 때까지 계속 솔직한 이야기를 나눠. 몸은 어떻게 하든 상관을 안하겠어 - ]

이런 변태 연예인.

팬들은 얘가 이런거 알까 모르겠네.

" 에휴. 마지막 말은 마음에 안 든다만 어쨋든 효과 있겠지? "

[ 당연하지. 나를 뭘로 보고. 백빵일 거야. ]

미영이를 한번 믿어보자.

나보다 윤아를 더 잘 아니까.

" 알았어. 고마워. 나중에 거하게 한번 쏘마. "

[ 오케이. 지갑 털릴 준비나 하숑. ]

미영과의 통화가 끝나고 잠시 기다리자, 윤아가 화장실에서 나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덥석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와 불을 껐다.

윤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내가 하는 대로 이끌려 왔다.

" 지금부터 12시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거야. "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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