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활기찬 우리집이다.
" 새 아가, 연우한테 그렇게 고분고분 하지 않아도 된단다. "
엄마가 갑자기 윤아에게 그렇게 말했다.
" 헤겔 알지? "
아, 엄마.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이신 어머니는 곧잘 우리를 철학자를 예로 들어 훈계하시곤 했다.
윤아한테도 그러실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 얼마나 이상적인가!
" 엄마, 윤아는 철학과가 아니라구요. "
" 가만히 있어봐. 헤겔의 벼증법적 긴장은 말이지, 갑작스러운 변화를 초래하는 자연 발생적 행위를 일으킬 수 있단다. "
아, 어렵다.
무슨 말인지, 단어 조차도 어려운데 윤아가 알아 들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한창 공부중인 연주도 어리둥절 하는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 조금 어렵나? "
" 당연 하지요, 어머니. "
" 예를 들어주지. 늘 '네, 엄마', '물론이죠, 엄마', '예, 당장 할게요, 엄마!'라는 말만 하는 어린 소녀를 상상해보거라. "
그런 소녀라.
" 등골이 오싹해지네. "
연주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그렇게 덧붙였다.
정말 어머니들은 바라지만, 아이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윤아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어느 날 소녀의 엄마가 자기 딸이 늘 그렇게 순종적인 데 대해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시리친다. '제발 좀 그렇게 고분고분하지만 말아!' 그러자 그 아이는 또 '네, 엄마!'하고 대답한다. "
그것도 그렇네.
그런데 반대 상황도 웃길것 같았다.
엄마한테 '천만에요, 전 순종할 거에요!' 하는건 거역이고도 순종인 모순적인 상황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 아……. "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드니 조금 쉽나 보다.
" 이 상황이 더 이상 진전이 없다는 거다. 첨예해진 거지. 부부 관계도 똑같아. 진전이 없어지고, 연우가 널 부려먹을 거다. "
그녀의 말에도 윤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 그래도 전 오빠한테 순종할 것 같아요. "
윤아의 말에 엄마가 못말린다는듯이 혀를 내두르고 나를 째려보았다.
잘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리라.
" 아, 철학 강의 끝! 나 나갈거야. 바람 좀 쐬고 올게요. "
그렇게 말하고는 윤아의 손을 잡고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와 현관으로 갔다.
" 오빠! "
분한듯 외치는 예쁜 동생 연주의 말을 뒤로 하고서.
수험생은 공부나 하시지.
그렇게 윤아와 함께 대책없이 밖으로 나와버렸다.
공기가 차가웠다.
" 미영이는 올해도 혼자 있을텐데……. "
그 때 갑자기 옆에서 윤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인상을 잔뜩 쓰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 전화 해보자. "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윤아의 얼굴이 조금은 풀렸지만, 걱정스러움이 아직 얼굴 위로 비쳤다.
윤아가 번호를 꾹꾹 누르고 통화를 시도하자, 곧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윤아야! ]
" 미영아……. 스케쥴 중이야? "
연예인들은 큰 명절 때도 행사나 스케쥴이 빡빡해서 항상 혀를 찼었다.
그것도 가장 친했고, 사랑하는 동생이 대한민국 대표 연예인이다 보니 나는 그 아픔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운다는 것을.
큰 명절 때마다 미영이는 갈 곳이 없었다.
부모님이 두 분다 별세하시고 친척들은 미국에 있으니까.
홀로 숙소에서 남아야 하기에 매번 우리가 외로움을 달래주었었다.
[ 응? 아니야. 숙소에 있어. ]
숙소…….
괜히 안쓰러워진다.
" 으……. 조금만 기다려, 미영아……. 내일 갈게……. "
윤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나보고 무슨 소리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할까.
" 어, 미영아. "
[ 아, 오빠! ]
미영이가 활기차게 소리쳤다.
그 활기참이 슬픔을 메우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 오히려 그 사실을 알기에 - 나는 웃으며 통화에 임했다.
" 그래, 그래. 심심하지? 조금만 기다려 내일 올라갈 꺼니까. "
[ 안 그래도 돼. 설 지내고 와서 놀아줘. 매번 너무 미안하네. ]
내 말에 미영이가 약간은 슬픈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르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
연예인이 뭐라고 -
" 니가 암만 그래도 우린 내일 올라갈꺼네요. "
[ 그럴 필요 없다니까……. ]
그녀가 계속 거절하자, 윤아가 답답한지 휴대폰을 뺏어들어 소리쳤다.
" 시끄러, 시끄러! 내일 봐! "
하고는 폴더를 닫아버렸다.
뒷감당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윤아는 그런 처신을 하고나서 눈을 찡그렸다.
" 미영이 불쌍하다……. "
불쌍해 하면 더 불쌍해지는 법이야.
이럴 때 일수록 아무렇지 않은척 하면서 잘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미영이 앞에서 우울해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다.
" 내일 가서 놀지 뭐. "
윤아가 내 팔짱을 끼고 같이 발을 맞췄다.
" 연주가 조금 불쌍해지네. "
내 말에 동의하는지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험생이니까 공부를 해야지.
윤아와 함께 대구의 복잡한 거리를 거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절때마다 보는 것이었지만, 항상 달랐다.
봄을 알리려는 듯 새들이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앉아 짹짹 거렸다.
하지만, 아직 가지는 앙상하다.
언제쯤 꽃이 피려나?
이런저런 망상을 하면서 걷고있을때,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 오빠! 전화 왔어요. "
윤아가 알려주자, 나는 곧바로 전화기를 꺼내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 누구지? "
" 받아봐요 - "
내가 폴더를 열고 귀에 휴대폰을 가져가자, 낯익은 - 하지만 듣기 싫었던 -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여보세요? ]
정수연…?
윤아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흔하지 않은 목소리의 소유자인 정수연은 너무 튀었다.
" 누구세요? "
혹시 몰라서, 아니, 약간의 기대를 걸고 상대방을 확인했다.
[ 저 수연이에요. ]
제길.
윤아가 길을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째릿 째려보고 귀를 기울였다.
불안하다.
또 무슨 폭탄같은 말을 뱉어낼까.
"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
[ 다 방법이 있어요. 것보다, 내일 만날래요? ]
애인도 아니면서, 아니 백번 양보해서 많이 본 것도 아닌데 불러내고 있다.
순간 확 불쾌해져서 휴대폰을 집어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따끔하게, 그리고 차갑게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 싫어. 나 결혼까지 했고 설이잖아. 가족이랑 같이 보내야지. "
[ 그러지말고 좀 나와줘요. 부인이랑 같이 나오면 되잖아요. 그거 하나 못해줘요? ]
" 내가 너한테 왜 그런 호의를 베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
내 따끔한 말에 윤아의 얼굴에 '믿음'이 피어났다.
그녀를 위해서 있지도 않은 차가운 면모를 보여야 한다는것이 조금 찝찝했지만, 그래도 별수 있겠는가.
예쁘면 다라는 말, 절대 아니다.
윤아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정수연 같은 여자라면 절대 사양이다.
[ 한번만 나와줘요. 그리고, 내가 오빠한테 뭘 잘못했나요?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것 뿐인데. ]
이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건 아닐까.
윤아의 마음을 열어서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닐까.
" 윤아가 싫어해. 나 다른 여자 만나는거. 그리고 나도 편하지 않고. 더군다나 별로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전화해서 불러내는 건 예의에도 어긋난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