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이에요, 이 여사. "
" 서두 필요 없고 누나방으로 잠시 올래? 윤아는 잠깐 쉬고 있구 - "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하는데, 여간 섬뜩한게 아니었다.
호순씨의 매서운 눈빛을 보는 듯 했다고나 할까.
임신을 시킨게 큰 일은 아니지만, 아이가 있는 누나로서는 윤아의 심정을 더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누나방으로 들어갔다.
누나는 문을 닫고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 어린것이. "
이 말 나올줄 알았다.
3살차이면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니라구요, 이 아줌마야.
하지만 목에서 이 말이 올라오질 못했다.
" 윤아도 이제 임신 할 때 됬거든. "
" 되긴 뭐가 돼. 아직 대학도 졸업 못했는데. "
그렇지만, 윤아가 원한 일이었다.
그리고, 안성환이니 뭐니 하는 학생에게 피해받기 싫었다.
" 지른 걸 어떡해. 그나저나, 임신해 본 누나로서는 많이 알 거 아냐. 뭐 어떻게 해야하는지. "
" 그거 안 물어봤으면 너 때리려 했다. 윤아를 생각 안 하는 '배은망덕' 죄로. "
배은망덕?
내가 무슨 은혜를 입….
입었구나.
윤아 자쳬가 나에게는 은혜구나.
" 그건 윤아한테 말해주려 했는데 너도 알아야 겠네. 일단 윤아 곧 엄청 힘들어 할꺼야. 가뜩이나 날씬한 앤데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해봐. 체중이 장난이 아닐꺼야. 게다가 많이 불편하거든. "
여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단계였지만, 어떻게 조금 덜 힘들게 지나게 할 수 있을까.
내 아내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설아와 먹고, 자고 할 수 있을까.
"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윤아 매일 아침에 힘들텐데. "
딱 - !
아파라…….
" 니가 일찍 일어나서 밥 해, 그럼! 그게 남편의 도리야! 일년은 그렇게 여자의 종이 되서 사는거고, 이제 나머지는 니가 잡고 사는거지. 아기 가졌을 때도 일을 한 내 슬픔을 윤아도 느끼게 하고 싶진 않구나. "
내가 힘들겠지만, 윤아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 하지 않을 것이다.
윤아니까.
내 하나뿐인 아내이고, 내 심장을 아직도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이니까.
" 그거야 할 수 있을 것 같고. "
" 이열 - 동생 다시 봤어? 근데 왜 나한텐 그렇게 안해. "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리로 새는거야.
나도 누나한테는 백점짜리 동생이었다구.
연주한텐 미안하지만 백점짜리 오빠는 못 된것 같다.
어쨋든, 나는 손을 두어번 흔들어주고 재빨리 누나방에서 나왔다.
거실에 가보니 윤아가 과일을 깎고 있었다.
" 룰루 랄라 - "
" 잘 놀다 오셨어요? "
연주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째려보았다.
윤아가 들고 있는 과도를 뺏어서 찌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땀똔 - "
오잉?
이 목소리는…, 지우!
" 지우야! "
발 밑을 보니 지우가 내 정강이를 잡고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무릎 까지도 오지 않는 작은 키가 많이 귀여웠다.
설아도 이렇게 귀여울까?
나는 지우를 안아 올렸다.
" 끼야아 - ! "
소리를 빽 지르면서도 좋다고 난리다.
" 내 아들 내려놓으시오. "
언제 나왔는지 누나가 옷을 갈아입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내 조카롤세. "
내가 지우를 안고 쇼파에 앉자, 윤아가 포크로 사과를 하나 찝어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네.
" 아유, 진짜 요즘 시대에 윤아만한 아내가 어딨을까. "
어머니의 말이었다.
그렇고 말고.
형수랑 누나도 그건 동감하는지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니에요, 어머님. 더 잘 해야죠……. "
" 아니다. 넌 더 못해야 돼. 연우가 너무 편하게 살잖냐. 새아가가 너무 힘들면 저놈이 기고만장해져서 막 부릴거다. "
왜 나를 그런 나쁜놈으로 보시나요, 아버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지우가 내 입을 턱 막았다.
이거, 뭔가 우연적인데?
" 지우가 너 말하지 말래잖냐. "
누나의 말에 나는 입을 그냥 꾹 다물고 있었다.
윤아는 싱글생글 미소 지으며 계속 과일을 깎고 있었다.
" 나도 새언니 같은 여자가 될거야! "
연주가 소리쳤다.
퍽이나.
내가 봤을 때 연주 성격으로는 남편 꽉 잡고 살것 같다.
네가 암만 그렇게 다짐해도 윤아는 못 따라와 이 녀석아.
동생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니 왠지 기분이 통쾌해졌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윤아 만한 여자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신사임당도 못 따라 올거야.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지우를 바라보았다.
" 빠빠 - "
밥 돌란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밥 먹어야 되는데 과일이 먼저 들어가도 되나?
" 밥 안 먹어요? "
" 우린 먹었단다. "
아버지의 장난스러운 말투가 나를 아프게 찔렀다.
배고픈데 남들은 먹었다니.
두명 몫을 먹어야 하는 윤아는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쉬고 지우를 옆에 놓았다.
" 까우우 - ! "
지우가 나를 툭툭 때리며 그렇게 소리 질렀다.
장군이 되려 하는지 목소리가 여간 큰게 아니다.
나는 그의 볼을 쓰다듬어 주고 쇼파에서 일어났다.
" 형수님, 밥 남은 거 있죠? "
" 있죠. 차려 드릴까요? "
형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또 그녀의 팔을 잡았다.
" 냅둬. 알아서 먹겠지. "
어머니…….
나는 원망스런 눈초리로 엄마를 한번 째려봐 주고 부엌으로 갔다.
명절 때는 먹을게 많단 말이야.
" 조금만 기다려요, 남편. 차려줄게. "
언제 왔는지 윤아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옆에 섰다.
역시 윤아 밖에 없다.
윤아는 곧 노련한 솜씨로 남은 탕국을 다시 끓이고 반찬들을 꺼내 다시 조리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배고파 죽겠다. "
내가 계속 투정을 부렸으나 윤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벌써부터 나를 가지고 놀줄 아네?
뭐, 윤아니까.
" 밥이 없다? "
……?
뭐라고?
나는 다급해져서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밥통으로 달려가 보았다.
밥이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 거짓말이지롱 - "
이 앙큼이를 어떻게 해야하나.
정말 밤에 봅시다.
"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
" 히히 - "
너도 나도 좋은(?) 벌이겠지만, 왠지 윤아의 싱그러운 웃음을 보니 도저히 짜증을 못 내겠다.
오히려 꽉 안아주고 싶었다.
" 여기요. 많이 드세요. "
윤아가 차려온 밥을 한 숟갈 떠서 먹어보앗다.
달콤했다.
" 역시 어머님 솜씨가 좋으셔. "
윤아가 행복한 젓가락질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이렇게 되요, 설아 엄마.
설아 맛있는 것 많이 먹이려면 노력해야지.
물론 지금도 맛있지만 말이다.
" 시간은 늦어지고, 잘 시간은 다가오고, 윤아는 큰일났고. "
" 에에? 정말? "
내가 빈말 할 때 있었나?
씩 웃으며 밥을 넘기자 윤아가 인상을 찌뿌렸다.
어지간히 무서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