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57)

" 오랜만이에요, 이 여사. "

" 서두 필요 없고 누나방으로 잠시 올래? 윤아는 잠깐 쉬고 있구 - "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하는데, 여간 섬뜩한게 아니었다.

호순씨의 매서운 눈빛을 보는 듯 했다고나 할까.

임신을 시킨게 큰 일은 아니지만, 아이가 있는 누나로서는 윤아의 심정을 더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누나방으로 들어갔다.

누나는 문을 닫고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 어린것이. "

이 말 나올줄 알았다.

3살차이면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니라구요, 이 아줌마야.

하지만 목에서 이 말이 올라오질 못했다.

" 윤아도 이제 임신 할 때 됬거든. "

" 되긴 뭐가 돼. 아직 대학도 졸업 못했는데. "

그렇지만, 윤아가 원한 일이었다.

그리고, 안성환이니 뭐니 하는 학생에게 피해받기 싫었다.

" 지른 걸 어떡해. 그나저나, 임신해 본 누나로서는 많이 알 거 아냐. 뭐 어떻게 해야하는지. "

" 그거 안 물어봤으면 너 때리려 했다. 윤아를 생각 안 하는 '배은망덕' 죄로. "

배은망덕?

내가 무슨 은혜를 입….

입었구나.

윤아 자쳬가 나에게는 은혜구나.

" 그건 윤아한테 말해주려 했는데 너도 알아야 겠네. 일단 윤아 곧 엄청 힘들어 할꺼야. 가뜩이나 날씬한 앤데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해봐. 체중이 장난이 아닐꺼야. 게다가 많이 불편하거든. "

여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단계였지만, 어떻게 조금 덜 힘들게 지나게 할 수 있을까.

내 아내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설아와 먹고, 자고 할 수 있을까.

"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윤아 매일 아침에 힘들텐데. "

딱 - ! 

아파라…….

" 니가 일찍 일어나서 밥 해, 그럼! 그게 남편의 도리야! 일년은 그렇게 여자의 종이 되서 사는거고, 이제 나머지는 니가 잡고 사는거지. 아기 가졌을 때도 일을 한 내 슬픔을 윤아도 느끼게 하고 싶진 않구나. "

내가 힘들겠지만, 윤아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 하지 않을 것이다.

윤아니까.

내 하나뿐인 아내이고, 내 심장을 아직도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이니까.

" 그거야 할 수 있을 것 같고. "

" 이열 - 동생 다시 봤어? 근데 왜 나한텐 그렇게 안해. "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리로 새는거야.

나도 누나한테는 백점짜리 동생이었다구.

연주한텐 미안하지만 백점짜리 오빠는 못 된것 같다.

어쨋든, 나는 손을 두어번 흔들어주고 재빨리 누나방에서 나왔다.

거실에 가보니 윤아가 과일을 깎고 있었다.

" 룰루 랄라 - "

" 잘 놀다 오셨어요? "

연주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째려보았다.

윤아가 들고 있는 과도를 뺏어서 찌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땀똔 - "

오잉?

이 목소리는…, 지우! 

" 지우야! "

발 밑을 보니 지우가 내 정강이를 잡고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무릎 까지도 오지 않는 작은 키가 많이 귀여웠다.

설아도 이렇게 귀여울까? 

나는 지우를 안아 올렸다.

" 끼야아 - ! "

소리를 빽 지르면서도 좋다고 난리다.

" 내 아들 내려놓으시오. "

언제 나왔는지 누나가 옷을 갈아입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내 조카롤세. "

내가 지우를 안고 쇼파에 앉자, 윤아가 포크로 사과를 하나 찝어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네.

" 아유, 진짜 요즘 시대에 윤아만한 아내가 어딨을까. "

어머니의 말이었다.

그렇고 말고.

형수랑 누나도 그건 동감하는지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니에요, 어머님. 더 잘 해야죠……. "

" 아니다. 넌 더 못해야 돼. 연우가 너무 편하게 살잖냐. 새아가가 너무 힘들면 저놈이 기고만장해져서 막 부릴거다. "

왜 나를 그런 나쁜놈으로 보시나요, 아버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지우가 내 입을 턱 막았다.

이거, 뭔가 우연적인데?

" 지우가 너 말하지 말래잖냐. "

누나의 말에 나는 입을 그냥 꾹 다물고 있었다.

윤아는 싱글생글 미소 지으며 계속 과일을 깎고 있었다.

" 나도 새언니 같은 여자가 될거야! "

연주가 소리쳤다.

퍽이나.

내가 봤을 때 연주 성격으로는 남편 꽉 잡고 살것 같다.

네가 암만 그렇게 다짐해도 윤아는 못 따라와 이 녀석아.

동생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니 왠지 기분이 통쾌해졌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윤아 만한 여자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신사임당도 못 따라 올거야.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지우를 바라보았다.

" 빠빠 - "

밥 돌란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밥 먹어야 되는데 과일이 먼저 들어가도 되나?

" 밥 안 먹어요? "

" 우린 먹었단다. "

아버지의 장난스러운 말투가 나를 아프게 찔렀다.

배고픈데 남들은 먹었다니.

두명 몫을 먹어야 하는 윤아는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쉬고 지우를 옆에 놓았다.

" 까우우 - ! "

지우가 나를 툭툭 때리며 그렇게 소리 질렀다.

장군이 되려 하는지 목소리가 여간 큰게 아니다.

나는 그의 볼을 쓰다듬어 주고 쇼파에서 일어났다.

" 형수님, 밥 남은 거 있죠? "

" 있죠. 차려 드릴까요? "

형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또 그녀의 팔을 잡았다.

" 냅둬. 알아서 먹겠지. "

어머니……. 

나는 원망스런 눈초리로 엄마를 한번 째려봐 주고 부엌으로 갔다.

명절 때는 먹을게 많단 말이야.

" 조금만 기다려요, 남편. 차려줄게. "

언제 왔는지 윤아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옆에 섰다.

역시 윤아 밖에 없다.

윤아는 곧 노련한 솜씨로 남은 탕국을 다시 끓이고 반찬들을 꺼내 다시 조리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배고파 죽겠다. "

내가 계속 투정을 부렸으나 윤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벌써부터 나를 가지고 놀줄 아네?

뭐, 윤아니까.

" 밥이 없다? "

……?

뭐라고?

나는 다급해져서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밥통으로 달려가 보았다.

밥이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 거짓말이지롱 - "

이 앙큼이를 어떻게 해야하나.

정말 밤에 봅시다.

"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

" 히히 - "

너도 나도 좋은(?) 벌이겠지만, 왠지 윤아의 싱그러운 웃음을 보니 도저히 짜증을 못 내겠다.

오히려 꽉 안아주고 싶었다.

" 여기요. 많이 드세요. "

윤아가 차려온 밥을 한 숟갈 떠서 먹어보앗다.

달콤했다.

" 역시 어머님 솜씨가 좋으셔. "

윤아가 행복한 젓가락질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이렇게 되요, 설아 엄마.

설아 맛있는 것 많이 먹이려면 노력해야지.

물론 지금도 맛있지만 말이다.

" 시간은 늦어지고, 잘 시간은 다가오고, 윤아는 큰일났고. "

" 에에? 정말? "

내가 빈말 할 때 있었나?

씩 웃으며 밥을 넘기자 윤아가 인상을 찌뿌렸다.

어지간히 무서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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