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57)

오늘 밤, 윤아와 로맨틱하게 일본 거리를 걷고 싶다.

단 둘이서, 결혼 하기 전 그 풋풋함 - 지금은 더 성숙해지고 더 과한 애정표현도 하지만 - 을 지닌채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

설렌다.

" 남편, 뭐해? "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윤아가 옆으로 와서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나긋이 말했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기분 좋은 샴푸 냄새가 내 코를 자극시켰다.

코를 윤아의 머리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 뭐에요. 어떡할거야, 이제? "

윤아가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뭐, 내가 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나는 윤아와 함께 자리로 돌아와 걸터 앉았다.

" 어떡할래요, 이제? 조금 어두워지긴 했는데, 오늘 비행기 탔으니까 다들 피곤도 할테고. 내일로 미루고 숙소로 돌아갈래요? "

" 난 찬성! "

태연 누나가 술을 들이키면서 외쳤다.

수정이와 진우형도 별로 반대하는 기색은 비치지 않았다.

난 그런줄로 알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맥주 한캔을 더 땄다.

" 조금만 마셔요……. "

윤아의 당부의 말을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게 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기분 좋게 듣고 넘겼지만.

" 자, 우리 여행하는 동안 다치지 말고 좋은 추억 쌓아서 갑시다. "

내가 술잔을 올려 드니 윤아와 수정이는 음료를, 진우형과 태연 누나는 맥주 캔을 따라 올렸다.

건배를 하고, 술을 쭈욱 들이켰다.

일본 술, 맛 없다.

" 왜 일본에 가면 온천은 꼭 들르라는지 알겠어요. "

수정이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 좋지? 목욕할 때랑은 뭔가 다른 느낌이야. "

" 에……. 플라시보 효과 맞나? "

우와.

17살이라고 아는게 별로 없을 줄 알았더니 전문용어까지 쓰는 수정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았다.

온천이 좋다, 좋다 해서 좋다고 느껴지는 것일 수도.

" 누나, 근데 준연이가 뭐라 안 그래? "

" 당연히 뭐라 하지. 그냥 무시하고 몰래 나왔어. 아까부터 전화도 계속 오는데 안 받고 있지롱. "

한국으로 돌아가면 준연이가 때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겉으로 허허 웃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이 누나, 분명히 나를 잡고 늘어질 게 뻔하니까. 

" 쌤. "

그 때, 수정이가 나를 불렀다.

뭔가 심각한 표정이었다.

" 응? "

" 잠시……. "

수정이의 눈치를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팔을 잡고 있는 윤아를 한번 쓱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잠시만, 윤아야. "

" 빨리 갔다 와요 - "

윤아에게 그렇게 통보한 나는 수정이를 따라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수정이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왜 그래? "

" 쌤, 우리 언니랑 무슨 관계에요? "

이건 또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래.

수정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타이밍이 조금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막 온천에서 나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연이 이야기라니.

나는 그녀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채 머리 위로 물음표만 띄우고 있었다.

그러자, 수정이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내 내게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 연우 오빠 힘들게 하지말고 얌전히 다녀와. 항상 조심하고 - 언니♥ ]

이게 뭐 어때서?

내가 보기에는 동생을 지극히 아끼는 한 소녀의 사랑스러운 문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 저희 언니, 저한테 이런 문자 보낼 위인이 아닌데. 게다가 연우 오빠라는 말이 들어가 있잖아요. 분명히 쌤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

아, 수정아.

눈치가 빠른 건 좋은데 말이야, 눈치가 빨라도 잠자코 있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란다.

이 말이 목 위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간신히 막고 나는 작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 왜요? "

" 그냥, 좀 얽혔지. "

" 말 못해주는 거에요? "

수정이는 그렇게 '쿨하게' 말 해 놓고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전혀 쿨하지 않다.

" 아니, 그런건 아닌데……. "

" 그럼, 해주세요! "

하아.

또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수연이와도 어느 정도 관계가 평탄하게 갈 줄만 알았다.

윤아도 별 반대 없이 받아들이는 눈치였고.

" 음, 그러니까……. 태연 누나 동생이 나랑 절친이야. 걔가 술 한잔 하자고 해서 갔는데 수연이랑 걔랑 아는 사이더라고? 그래서 걔가 수연이를 데리고 왔는데 윤아가 그걸 안거야. 나는 별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윤아가……. 흐음……. "

울었다는 소리를 하기는 조금 그렇다.

수정이가 믿을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 윤아가? "

" 아, 몰라. 윤아가 그리고는 많이 울었어. "

" 우와아……. 윤아 언니 진짜 지극 정성이다. 쌤 진짜 윤아 언니 울리면 진짜 나쁜 놈 되는거에요! "

나 졸지에 나쁜 놈 되어버렸다.

나는 알았다면서 대충 손을 훼훼 저어주고는, 수정이를 바라보았다.

감동 받았다는 눈치였다.

" 진짜, 이때까지 수많은 여자들을 봐 왔는데 윤아 언니 만한 사람 못 본것 같아요. "

그렇지.

나도 윤아만한 여자 못봤어.

" 오빠아아 - "

때 맞춰 윤아가 나를 불렀다.

타이밍을 잘 잡는 윤아.

수정이도 놀랬는지 약간은 멍하게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내 등을 밀었다.

" 윤아 언니가 부르잖아요. 가요. "

" 자기야. "

허, 헐.

자기야라는 말은 또 처음이라서 나는 짐짓 놀라 윤아를 바라보았다.

윤아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쑥쓰러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내 팔만 꼼지락 꼼지락 만지고 있엇다.

웃음이 내 입가를 타고 흘렀다.

" 왜, 윤아야? "

따뜻하게 말해주었다.

윤아는 나를 보고 우물쭈물 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 우리 조금 걸으면 안 돼? 우리 둘만요. "

수정이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하지 못한 것일까.

아까와는 조금 다른 태도였다.

" 그럼, 지금 숙소로 들어가서 나올까? "

" 그래두 돼요? "

윤아가 원하면 안 될게 뭐 있겠어.

나는 괜찮다면서 고개를 기분좋게 끄덕여 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 저기요. 우리 숙소로 들어가서 각자 나오는게 어때요? 쉴 사람은 쉬고. "

" 가서 술 마셔도 돼죠! "

태연 누나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술 너무 좋아하는거 아니야, 누나?

" 그래도 돼요. 뭐, 그건 알아서 하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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