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의 대학가는 분주하다.
중간고사가 끝난 학생들은 술자리를 가지기 위해 옹기종기 모이고, 나는 학생들이 반납하는 책들에 밀려 하루 종일 눈 코 뜰 새 없이 책을 정리하고 관리해야 했다. 대학생들의 중간고사가 끝나서 시험공부를 위해 빌렸던 책들이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시기였다.
나의 직업은 대학 도서관 사서이다. 1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운이 좋게 모교 대학 도서관에 바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사서라는 직업이 크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시험 기간 직후에는 진이 빠질 정도로 바빴다. 근로 장학생들이 있었지만, 워낙에 소수였기 때문에 나 역시 열심히 뛸 수 밖에 없는 시기였다.
“이번 주도 끝이구나...”
역시 사서라는 직업이 좋은 점은 주 5일제에 정시에 퇴근을 한다는 것이었다. 5월 초의 금요일 저녁, 이제 누구나 좋아하는 주말이었다. 주말이라는 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준다. 노동에서 벗어나 48시간만큼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나 자신에게 무한한 선택권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주말은 마냥 좋지는 않았다.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가족도 떨어져 살아서 집에 혼자 있어야 한다면 그만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뭐, 한 두 번이야 재밌게 혼자 놀기도 하지만, 그게 10번이 되고, 100번이 되면 인생의 큰 고민이었다. 마치 매일 먹는 밥이지만, 오늘은, 저녁은, 어떤 것을 먹을지 고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쉬운 듯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혼자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머리가 깨지게 아플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도,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침대에서 뒹굴어도 잔소리 할 사람이 없다. 혼자 산다는 것, 그것은 분명 자유이다.
하지만, 혼자라는 것은 외로움을 동반한다. 특히 밥 먹을 때,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를 하지 않고 가끔은 식탁에 앉아 누군가 대화를 하며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밥을 혼자 먹는다는 것, 그것만큼 외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내 나이 28살.
20살에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만 8년간 혼자 살다보니 외로움도 많이 익숙해졌지만, 밥 먹을 때만큼은 혼자인 것이 싫었다. 혼자 살다보니 음식도 곧잘 했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요리 해도 항상 나와 같이 밥을 먹는 것은 텔레비전뿐이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온 나는 주말이었기 때문에 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로 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간단하게 안주거리와 맥주를 사서 평소처럼 텔레비전이나 보려고 했다. 맥주 한 잔을 하면서 즐기는 텔레비전 시청, 그것이 곧 나의 주말 휴식이었다.
“와우, 사람 많네.”
주말이라 그런지 마트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가족 단위로 와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팔짱을 끼면서 마트를 둘러보는 연인들도 많은 듯 했다.
“부러우면 지는 것...”
혼자 인터넷에서 떠돌던 말을 중얼거려 본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 즐거워 보이는 연인. 내 눈에 보이는 마트의 풍경이었다. 물론, 부럽지 않을 수는 없다. 분명 부러운 일이지만, 언젠가 나에게 그런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자위했다.
“맥주로 안 되겠는 걸, 소주도 사야 되나...”
이것저것 안주거리를 할 것들을 고르고 맥주 몇 병과 함께 소주도 몇 병 골랐다. 주말동안 다 마시지 못해도 냉장고에 넣어 두면 될 일이었으니. 안주거리와 술을 고른 나는 장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사람들이 많아서 계산대로 향하는 것이 힘겨웠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사람을 피하는 것이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정체되어 있는 카트보다는 나은 듯 했다. 그만큼 사람이 많았으니.
“아이쿠”
“아얏”
결국에는 계산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와 부딪혔다. 상대의 카트에 내 몸이 부딪혔는데,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 했다. 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고 말을 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도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안부는 먼저 묻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괜찮으세요?”
“네....”
나와 부딪힌 사람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꽤 키가 큰 단발머리를 한 아줌마였다. 내 키가 175였지만, 거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순간적으로 아래를 보니 힐을 신기는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여자치고는 상당한 키였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네”
사람들이 북적거렸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안부만 묻고 다시 남이 되었다. 난 계산대로 향해서 물건을 계산하고 지옥 같은 마트를 빠져 나왔다. 그런데 마트에 나오면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무언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언가 빠트린 느낌이랄까?. 주머니를 뒤져보니 지갑도 있었고, 핸드폰도 있었다. 도대체 뭘까?.
터벅터벅.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산 봉지를 들고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앞에서 승용차 한 대가 ‘끼이익’하고 급정거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무턱대고 차도를 그냥 건너가려고 한 듯 싶었다. 물론, 작은 차도였지만...
철커덕.
승용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잘못인 듯 하지만, 다행히 운전자가 욕을 하지는 않고 내리는 듯 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 나 역시 고개를 돌려서 승용차 운전자를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앗?”
“앗?”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합의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서로 ‘앗’이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는 구면이었다. 5분 전에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여기서 또 뵙네요.”
“그러네요. 괜찮으세요?. 다행히 아까처럼 부딪힌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전 괜찮습니다. 제가 다른 생각을 좀 하다가...실수한 듯 하네요...”
이제야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줌마 치고 피부가 참 새하얗고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약간 짧게 느껴지는 단발머리가 상당히 보이시하게 보였는데,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봐서일까?. 내 머릿속에는 무언가 떠오를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뭘까?. 뭘까?. 아주 짧은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내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오묘한 행동 때문인지 그녀 역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
그녀 역시 나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분명 그녀도 그것을 느꼈나 보다. 그런데 그것이 뭘까?. 아, 기억이 날 듯, 말 듯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분명 마트에서 놓쳤다고 생각한 것은 그녀였다. 뭐지?. 뭘까?.
“아.....다운이......아줌마?”
“김....민수?”
우리는 거의 동시에 과거를 기억해 냈다. 서로의 존재가 확인이 되면서, 우리는 놀라움을 표현하며 두 손을 부둥켜 잡았다.
“정말 아줌마 맞아요?”
“너도 민수 맞지?. 얼마만이야?”
“와....이렇게도 만나네요. 정말 세상 좁다, 좁다 하지만...서울에서....와....”
그녀는 12년 전, 내가 고향에서 살 당시 우리 옆집에 살던 다운이 엄마였다.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 이름이 정다운이었다. 생각해 보면 키가 큰 것도 그녀의 큰 특징이었으니, 딱 맞아 떨어졌다.
“정말 얼마만이야....호호”
“12년 정도 됐을걸요?”
“몰라보게 컸네...민수가....”
“아줌마도 몰라보게 변하셨네요....와...”
반가운 마음에 우리는 길가에 차를 세워 둔 것도 잊고 한동안 길거리에서 그렇게 인사를 했다. 결국 다운이 엄마가 세워 둔 차의 뒷 차가 ‘빵빵’ 거려서 자리를 옮겨야 했지만.
“일단 차에 타...”
“네...”
다운이 엄마의 말에 일단 나는 그녀의 차에 탔다. 다운이 엄마는 차를 운전하여 한적한 갓길에 차를 정차하고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 때 가족이 서울로 이사 왔어?. 부모님은 잘 계시고?.”
“아니요. 저 혼자 서울에 살아요. 부모님은 아직도 전주에 사시고....”
“그렇구나. 난 한 달 전에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어디 사세요?”
“K 아파트 알아?. 바로 이 근처인데....”
“헉...제가 거기 혼자 살고 있는데...벌써 1년 정도 됐고요...”
“그래?. 정말?, 반갑다...”
“몇 동이세요?”
“나 102동...301호 사는데...”
“그래요?. 저 102동 401호 사는데....바로 아랫층이네요?”
“정말 신기하네. 한 달 동안 몰랐단 말이야...”
“와. 정말 신기하네요...하하....”
우연의 연속이었다. 12년 전에 전주에서 알고 지낸 이웃사촌이 먼 땅인 서울에서도 이웃사촌이라니. 믿기도 힘들지만, 안 믿을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내가 자주 보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제보를 하고 싶을 만큼.
“일단 집으로 가야겠지...”
“네...”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다운이 엄마가 다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집도 거의 같다고 봐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차를 얻어탈 수 있었다.
“민수는 서울에서 뭐해?”
“대학교에서 사서하고 있어요. 다운이랑 아저씨는 잘 지내요?”
“다운이는 캐나다로 어학연수 갔어. 아저씨는 L중학교 야구부 감독이야. 그것 때문에 서울로 이사 온 거야”
“그렇군요. 아저씨는 여전히 야구 계에서 일하시네요. 그때 저희가 이사 가고 2년 뒤에 은퇴하셨단 말은 듣긴 했는데...”
“그이야 뭐, 평생 야구만 한 사람이니....”
다운이 엄마와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운전하는 그녀를 옆에서 보았는데, 아직도 여전한 몸매를 유지한 듯 했다. 전체적으로 외모가 30대 중반으로 밖에 보이지를 않으니. 정확한 나이를 모르겠지만, 다운이가 나보다 3살 정도 어렸던 듯 싶은데, 다운이가 올해 25살, 그렇다면 최소한 다운이 엄마는 40대 중반이었다.
어느새 K 아파트에 도착을 했고, 다운이 엄마는 능숙하게 주차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102동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18층에 있었고, 우리는 차분히 기다렸다. 내 옆에 서 있는 다운이 엄마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12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아참, 마트에서 뭐 샀어?”
“하하. 그냥 술이 조금 땡겨서...안주거리 몇 개와....”
“그러면 쓰나?. 남자 혼자라 밥 잘 안 챙겨 먹지?. 음...오늘 만난 것도 반가운데...같이 저녁식사나 할까?.”
“그래도 돼요?”
“호호. 안 될게 뭐 있어. 예전에도 우리 집에서 밥 많이 먹었잖니.”
“그러면...오늘만 신세 질게요.”
“신세는 무슨. 그러면 30분 정도 있다가 우리 집으로 올래?. 나도 준비를 해야 하니깐...”
“네”
대화를 마치자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했고, 우리는 각자 3층과 4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운이 엄마가 3층에서 내렸고, 난 4층에서 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술과 안주를 모두 냉장고에 넣고 잠시 소파에 앉았다.
“다운이 엄마....”
12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마치 세월이 비껴 지나간 듯 한 모습. 사춘기 시절 밤마다 내 상상속의 여신이었던 그녀, 그녀가 바로 다운이 엄마였다. 사춘기 시절의 여신이었던 그녀가 28살인 현재의 내 앞에 나타나다니, 우연이긴 하겠지만, 분명 의미가 있는 우연이라고 생각되었다.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필연이 될 테니깐.
“그러니까 그때가....”
저녁 약속을 한 시간까지 약 30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난 잊고 지냈던 다운이 엄마에 대항 옛 생각을 되살려 보기로 했다.
“처음 이사 왔을 때가 내가 13살 때였나....”
다운이 엄마, 아니 다운이 가족과의 첫 만남, 그건 정확히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