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주말 저녁.
혼자 거실에 앉아 하루의 옷을 개고 있던 난,
갑자기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火)에
열심히 개고 있던 하루의 옷을 내동댕이 쳤다.
"...뭐야, 이 하루!"
입술을 쭉 내민채 씩씩 거리며 울상을 한채 자리에 앉아서는....
온통 하루의 이삿짐으로 어수선한 거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못된놈! 열받아..."
`스크린` 이란 영화 덕분에 한복 입고, 광란의 밤을 지낸지 며칠 되었을까...
하균씨의 추천으로 큰 광고 계약이 성사 되었다면서 좋아하던 하루.
거기다 마침 광고 찍는곳이 미국, 뉴욕이라면서 이 기회에
부모님한테도 갔다가 조금 늦게 귀국 할거라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던 녀석이었다.
사실 혼자 좋아라~ 들뜬 하루 녀석과는 달리 난 불안했다.
상대역 크리스틴!!
거기다 광고 포스터 촬영, 사진작가..... 당. 연. 히. 민 하균!! 쳇!!
크리스틴하고 하균씨하고 둘이 짝짝꿍 해서,
이 기회를 발판 삼아 크리스틴이 하루를 덜컥! 꼬시기라도 하면.....
으악!!! 제길.
물론 예전에 하루 말이 크리스틴하고 자기는 다시 예전처럼 친한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면서 크리스틴은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며,
나 보고 절대 걱정 하지 말라고 했지만......
녀석은 모른다.
크리스틴의 고단수를! 크리스틴의 양면성을!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인즉,
뉴욕으로 촬영 떠나기전 하루와 함께 울 집에 놀러왔던 크리스틴.
하루의 앞에서 호호하하~ 웃으며 나보고 예전에 했던 짓은
자기가 예전에 하루에게 차인게 분해서 나한테 짖굿은 장난을 친거라며
`앞으로는 언니 동생하며 잘지내요~ `
라며 온갖 아양을 다 떨더니....
주방에 혼자 다과를 준비하던 내게 살며시 와서는 하는 말!
`같이 살아도... 뭐, 결혼은 하지 않았으니깐 아직 나한테 기회는 있는거네.
뭐 요새 동거가 흠이라도 되나. 안그래요, 정. 현. 진. 씨?!`
란다.
정말 어이없이 기지배!! 거기다 한국말은 왜이리 잘하는지. 쳇!
이런 기지배랑 둘이 짝(?)이 되어서 촬영을 떠나는것도 불안해 죽겠는데,
하루를 배웅하러 공항에 나갔던 날이었다.
광고 촬영팀과 사진 포스터 촬영팀들이 엉켜있는 게이트 앞.
얼핏이 보이는 하균씨의 모습, 왠지 모르게 수척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자꾸 그에게로 시선이 갔지만,
그와 나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서먹함에 먼저 다가가 인사도 하지 않은채...
난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하루의 곁에 서있었다.
그렇게 정신 없던 게이트 앞에 얼마나 서있었을까....
어느순간 부터인가 사람들이 마치 밀물이 빠지듯 게이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러자 서둘러 짐을 챙겨서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려던 하루 자식.
갑자기 나한테 집에서 말하는걸 깜박 했다며 방실방실 웃으면서 하는 말이....
` 우앗! 깜박 할 뻔 했다!
누나! 나 돌아오기 전까지 내 이삿짐 좀 싸줘.
에이전시에서 오피스텔 준다는 곳으로 이번에 이사 가기로 결정 했거든.
나 돌아오면 바로 이사 갈거니깐... 이삿짐 싸는거 잊지마!`
라며 내게 환한 미소를 지은채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크리스틴과 같이 게이트로 들어가버린다.
뭐?! 이..이사?
".....야!! 야!! 이 하루!!!"
갑작스런 녀석의 말에 녀석을 불러보지만, 이미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후.
너무 황당한 맘에 넋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었는데,
뒤늦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하균씨와 그만 눈이 마주쳐버렸다.
하균씨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 하며 놀라는 나와는 달리
아주 차갑게 내 시선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외면해 버리는 하균씨.
그대로 게이트 안으로 휭~ 하니 들어가 버렸다.
하아~ 정말.... 충격이었다.
언제는 날 좋아한다면서... 사랑한다면서 자기한테 오라고 했으면서!!
아무리 내가 퇴짜를 놓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서로 입 박치기한 옛 정(?)도 있건만... 그렇게 매몰차게 피하다니! 흑흑.
우씨~ 나 이러다가 결국 두 마리 다 놓치고...쪽박 차는거 아냐!!
설마~~ (개콘 버전..;;;)
"우씨..."
거기다 하루 자식, 뉴욕에 도착한뒤 잘 도착했다 란 전화 연락만 왔을뿐.
그 후로는 깜깜 무소식이다.
비록 촬영이 바쁘고 오랜만에 부모님들 만나 정신이 없겠지만...
그래도 이삿짐은 잘 싸고 있냐? 혼자 있으니깐 무섭지는 않냐?
뭐 이런식으로 간단하게 전화해줄수 있잖어.
피이...나쁜 놈!
혼자 투덜투덜 거리며 자리에 앉아있는데 문득 주위에 어수선하게 펼쳐있는
하루의 짐들이 내 시선을 옳아맨다.
두려움.
녀석의 짐들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날 에워싸는 두려움이란 감정.
이대로 녀석을 잃는건 아닌지....
이대로 녀석이 날 떠나는건 아닌지....
[삐리리]
싸늘히 날 스쳐가는 어두운 기운에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을무렵,
핸폰으로 문자 메세지가 들어왔다.
[언니, 오늘 약속시간 늦지 말고 와요~]
영은이의 문자 메세지.
그제야 영은이와 약속을 한 걸 깨달은 난 집안에 있기도 답답하고 해서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고는 오피스텔을 나섰다.
명동 거리.
금방 눈이라도 내릴듯.... 검회색, 무거운 구름이 건물 사이로 내려앉은 거리.
날 스쳐가는 사람들과 헤드라이트 불빛을 스쳐가는 차들 사이로,
스쳐가는 상점들 문밖에 붙여져 있는 하루의 광고 사진을 애써 피한채
영은이와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왜 길거리에서 만나자고 한거지, 이 추운 날에.
거기다 오늘따라 왜이리 하루 광고 사진이 눈에 많이 띄냐구!!!
[빵! 빵!]
넓은 4 차선 도로를 지나치는 차들의 굉적소리가 내 귀를 스쳐갈무렵,
투덜거리며 자리에 서있던 내게 문득 길 건너편 큰 건물 한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루의 광고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쿡...
하루의 광고 사진에 나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그었다.
그렇게 보지 않을려고 피하고 다녔는데...
내 앞에 떡! 하니 펼쳐져 있다니.
차갑게 날 스쳐가는 사람들 속, 멍하니 하루의 광고 사진을 바라보는 내게....
[삐리리]
옷 주머니에 넣어진 핸드폰, 알람 소리가 울렸다.
[영상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영상 메일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난,
영상 메일을 오픈했다.
[여어~ 누나! 잘 지내지? 설마 내 짐 싸면서 내 옷 끌어안고
보고 싶다고 펑펑 우는건.... 아니겠지?!.....큭큭큭....]
작은 액정 화면 가득 쏟아져 나오는 하루의 목소리.
그리고 그의 장난섞인 몸짓에 난 그만 함박 미소를 입가에 그었다.
바보....이런거 말고, 빨리 오란 말야.
녀석을 바라보며 혼자 속으로 중얼거린 내 말에도.....
하루의 영상메일은 계속 이어졌다.
[......그거 알어, 누나. 누나가 나한테 단 한번도 사랑해 라고 말해주지 않은거.
나 그거 때문에 엄청 삐져서... 지금까지 누나한테 줘야 할것도 주지 않고 있는데.
..... 한번 말해봐, 지금. 사랑해~ 라고 말해주라.
그럼 내가 누나 곁으로 갈께.
누나한테 주고 싶었던 그것도 꼭 챙겨서 말이야.
응? 말해봐, 응? 응?]
삐--
작게 터지는 전파음과 함께 끊어진 하루의 영상 메일.
폴더를 접은채, 핸드폰을 입가에 가져간채로 바보같이 자꾸만 입가로 스며드는 미소와는 달
리
눈에선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맴돈다.
[여어~ 누나! 잘 지내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 마신뒤,
난 하루의 영상 메일을 다시 한번 열어 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작게 속삭이는.....
작은 액정 화면 안에서 활짝 웃고 있는 하루를 향하는 내 목소리.
"......사랑해...이 하루, 사랑해......"
[사륵]
어느새 눈(雪) 이 내리는지.....
액정 화면 위로 흰색의 눈이 떨어져서는 활짝 웃으며 나에게 말하는
하루의 모습위로 스미는 순간이었다.
"....어? 저게 뭐지? 무슨 쇼 하는건가?"
"글쎄..."
거리로 옅게 흩어지며 내리는 눈(雪) 속,
날 스쳐가는 사람들의 의아한 목소리에 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도로 건너편, 건물 한편을 가득 메웠던 하루의 광고 위로...
흰색의 스크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춘다.
[차르륵...치익....]
흰 스크린 위로 영상이 펼쳐진다.
마치 오래된 영화를 상영하듯...... 제일 먼저 펼쳐진 여러개의 검은색의 흔들리는 화면 뒤,
태여난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마치 그 여자 아이의 성장 화면을 보여주듯....
천천히 나이를 먹어가는 영상 속의 여자 아이의 모습.
갓난 아이의 여자 아이가 천천히 나이를 먹는다.
유치원 때의 모습...
초등학교 때의 모습...
고등학교 때의... 대학교 때의....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여자 아이의 마지막 모습.
마지막으로 스크린을 가득 메운 여자 아이의 모습은....
바로 나였다.
그 화면 뒤, 펼쳐지는 글씨.
[ 이 후의 당신 모습도 나와 함께 하길 바랍니다.
이 후의 당신 곁에도 제가 언제나 함께 하길 바랍니다.
........Will you marry me?..............]
"어머! 왠일이야! 저거 프로포즈 잖아?!"
"재밌다, 야. 쿡쿡, 누군지 모르지만 돈 많이 썼겠다. 큭큭큭"
"치이~ 저것봐, 당신! 누구는 저렇게 프로포즈 하는데...당신은 나한테 어떻게 프로포즈 했
어!
뭐 ` 내 아를 낳아도!! (개콘 버전;;)` 으이그!!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런 프로포즈에 결혼을 승락했으니!!!"
자리에 멈춰슨채,
나와 함께 스크린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토해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과는 달리 이젠 멈춰져 버린 스크린 영상을 말없이 바라보던 난,
".....누나...아니...정 현진씨."
문득 내 등뒤로 밀려드는 낯익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내 등뒤에 서있었는지.....
내 눈망울로 가득 스며드는 하루의 모습에....
내 눈망울 안에 가득 고인 눈물에 출렁이듯 일렁이는 하루의 모습에
그만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정 현진씨, 나와 결혼해 줄래요?"
".........."
"나이가 어린 만큼, 그 차이 만큼 더 사랑할께요."
"...바보..."
"이 후의 모습 누나 모습, 내 눈망울에 담을 수 있게.....해줄거지?"
"바보..이 바보야!!...으앙...."
눈속으로 잔잔히 흩어지는 하루의 목소리와 녀석의 모습에
난 그만 눈물을 왈칵 쏟아낸채,
녀석을 꽉 끌어 안아버렸다.
포근한 녀석의 체온이 날 감싼다.
따뜻한 녀석의 손이 날 꽉 감싸더니 조심스레 자신의 몸에서 날 밀더니,
문득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들었다.
"누나는 내가 크리스틴 때문에 처음에 광고 찍은지 알지?"
"......."
"바보. 누나 옆에 자꾸 이상한 놈이 붙는것 같아서, 누나한테 사주고 싶은게 있었거든.
근데 내가 돈이 있어야지. 그래서 광고 찍기로 한거야.
이것만은 내 돈으로 누나한테 해 주고 싶어서......."
멋적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하는 하루 녀석.
천천히 조금한 상자를 열자, 흑진주 반지가 주위로 흩어지는 눈속에 반짝거린다.
"...거참, 선물로 사뒀던건데....결혼 반지가 되어버렸네. 헤헤..."
멋적은듯 머리를 긁적이며 날 바라보는 하루의 모습에
난 훌쩍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바보, 왜 사고 주질 않았냐? 그러니깐 이렇게 되었지. 바부....치이.."
"나 누나 때문이다, 뭐. 누나가 사랑한다고 나한테 말해주지도 않는데...
내가 미쳤냐, 이 비싼걸 누나한테 주게. 흥!
이거 그때 내 광고 모델비도 모잘라서 영은씨가 다음 광고까지 같이
채결하는걸로 해서 돈 미리 받아서 산거다. "
"피이.. 그럼 갑자기 이사한다는건 뭐야?
결혼하자면서 이사는 왜 해?"
"어이구, 바보야. 아줌마, 아저씨한테 결혼 승락 받아야 하는데....
미리 같이 살고 있다고 하면 아주 좋아들 하시겠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부모님들은 그게 아니지!
누나가 내 깊은 뜻을 어찌 알겠어.
쳇, 그나저나 빨리 말해봐.
나랑 결혼 할거야, 말거야?
그리고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 정말 안해줄거야!!"
투덜거리며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다그치는 하루의 모습에
훌쩍이던 난 그만 웃음을 토했다.
그러자 나와 같이 피식 웃어 버리는 하루 녀석.
[스윽]
조심스레 반지를 꺼내어 들어선 내 손가락에 끼워준다.
어느새 내 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물그머니 바라보다...
[쪽]
기습으로 하루의 입술을 훔친 난,
아주 작게 녀석의 귓가로 속삭였다.
"...이 하루, 바보! "
"뭐, 누나!!"
내 귓속말에 벌컥 화를 내며 미간을 찌푸리는 녀석을 뒤로 한채,
빠르게 몇발자국 앞서 걸어 나갔던 난.
하루 녀석을 향해 뒤를 돌아서는 천천히 입술을 달작였다.
"...사. 랑. 해....."
그러자 날 향해 달려오며 버럭 버럭 소리치는 하루 녀석.
"이리 와, 정 현진!! 미치겠다!!! 키쑤 한방 때리자!!! 정 현진!! 누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