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보게, 200만냥은 너무 하지 않나! 어르신은 자네의 실력을 높이 사고 있네.
그러니 제발 이번 일은 100만냥에 수락하게나."
소년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계속해서 의뢰를 부탁하는 정명도 재상의 집사를,
특유의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까 자신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만 200만냥은 재상 어르신에게 결코 많은 돈이 아닙니다.
게다가 제가 이만큼 요구하는 것도 정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하로 금액이 내려간다면 전 이 외뢰를 받지 않겠습니다."
"여보게, 그냥 100만냥에 수락하게. 100만냥도 그리 적은 돈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어르신의 뜻대로 해드리면 혹시 아나? 자네를 천민 신분에서…."
탕! 요란하게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소년의 그 무심한 눈동자가 재상 나으리의 시끄러운 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200만냥이오. 그 이하는 절대 의뢰를 수락할 수 없소. 재상께 잘 전해요."
한참 소년의 기세에 눌려있던 집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가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문을 나섰다.
"…흥, 망나니 주제에…."
"결국은 벗어날 수 없어…."
집사가 도망치듯 모옥을 빠져나가며 남긴 비아냥에, 소년은 피식 하는 웃음을
내뱉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자신의 몸 안에
돌아다니는 기를 조절해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비록 적에게 동정심 따위를 품는 멍청이였지만,
자기에게 있어서는 훌륭한 무술 선생이었다.
"바보같은 아버지…."
소년은 기를 한바퀴 돌린 후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한때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장교였던 아버지는 누군가의 모함으로
반역자로 몰려 하루아침에 망나니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명령을 내린 왕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항상 술에 취해서 궁궐이 있는 쪽으로 큰절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빌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소년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바보같은…."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산 속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 사이로 몸을 놀려 재빠르게 이동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경공술이었다.
※ ※ ※
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귀족 팡 라오는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자신을 기다리던 가마도 사양한 채 비틀거리며 으슥한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사흘 전에는 딸의 생일이었다. 올해로 열일곱이 되는 딸의 생일이었다.
자신이 25살이 되던 해에 얻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딸, 린린.
직접 상점을 돌아다니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마에 걸어줄 예쁜 장식띠를 샀다.
포장을 해서 품에 넣고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온 집안에 불을 꺼놓았다. 딸이 돌아와 불꺼진 집을 보고 당황해 할 때
갑자기 불을 키며 자신이 나타나 선물을 건네주려는 것이었다.
팡 라오는 좋아서 어쩔줄 모를 딸의 모습을 생각하며 웃음을 지으며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딸은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친구들과 생일 축하 잔치를 벌이나 했다.
자시가 지나도 안 돌아오자 그때부터 갈만한 친구들의 집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딸을 찾은 것은 축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고운 얼굴은 칼에 긁혀 완전히 얽혀 있었고,
하얀 피부는 사내의 정액에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끔씩 자신이 씻겨주던 자그마한 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그녀가 얼마나 쫓겨다녔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딸의 시체를 부여잡고 울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렇게 울었다.
하인들이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도 딸의 시체 옆에 누웠을 것이다.
마음이 조금 진정된 후, 팡 라오는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범인은 아마도 여태까지 벌어졌던 납치 강간 사건의 범인 같았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범인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범인을 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딸의 생일날 흔적을 찾아다니다가 지쳐 돌아오는 길인 것이다.
"으음?"
비틀거리며 길을 가던 팡 라오의 몸에 부딪혀 오는 것이 있었다.
팡 라오는 완전히 풀린 눈을 들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확연히 빛나고 있는 무심한 보라빛 눈동자….
평상시대로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지금의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야, 이 놈아! 어디서 천민 나부랭이가 감히 어르신의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냐! 썩 비키지 못할까!"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상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그는 상대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이 놈! 그래, 내말이 말같지 않다는 것이냐! 어디 한번 내 손에 죽어봐라!
이 망나니…."
그러나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상대의 손에 의해
멱살을 쥐인 채 공중에 들려있었다. 숨이 콱 막혀오는 가운데,
그는 예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흥분하는건 별로 몸에 도움이 안됩니다. 정 원하신다면 제가 이대로 당신을
집까지 운반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팡 라오는 겨우겨우 목을 돌려 거부의사를 밝혔고, 상대는 피식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아주었다. 한참을 캑캑 거리며 숨을 고르는 그에게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을 그렇게 만든 놈을 잡고 싶으시겠죠. 전 지금 그놈을 추격중인데
아무래도 무기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댁의 집안에 가보로 전해오는
청룡보도를 빌리고 싶습니다만."
그는 상대의 그 말에 찬찬히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그러나 숨막히게 빛나는 보라빛 눈동자에 압도된 채,
팡 라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찬성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 놈을 잡아주기만 한다면 그깟 청룡보도 정도는 그냥 넘겨주겠네.
그런데 정말 잡을 수 있는 것이겠지?"
"전 승산없는 일은 맡지 않습니다."
상대는 클클 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팡 라오의 뒤를 따라갔다.
※ ※ ※
소년은 조용히 나무 위에서 목표물을 주시했다.
아무래도 저 덩치는 머리라곤 쓸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만 옆으로 돌아가면 될 것을, 저 덩치는 괜시리 멀쩡한 바위를 뽑아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그대로 소리없이 나무 위를 뛰어갔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저 덩치는 자신의 은신처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마도 저 덩치가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을 맛있는 양고기 국이 끓고 있을 것이다.
소년은 해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다.
가을에 접어들었다지만 아직은 더운 날씨이다. 그래서 저 덩치의
은신처 한 구석에 묶여 있는 저 귀족 아가씨도 한층 더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고.
잠시 후, 그 덩치가 돌아왔다. 그는 어디선가에서 풍겨오는 냄새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고깃국을 보고
환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옆에 놓여져 있는 국자나 그릇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솥채 들어 들이키기 시작했다.
일식경이 지나자 가마솥은 깨끗하게 비워졌고, 그 덩치는 만족한 듯
입술을 혀로 빨며 천천히 묶여있는 귀족 아가씨에게로 다가섰다.
그녀는 질겁을 하며 뒤로 내빼려 했으나 발과 손이 묶여져 있는데다,
입에 재갈까지 물려있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덩치는 너무나도 손쉽게 귀족 아가씨의 화려한 옷을 찢어내었고,
금방 알몸이 된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그것을 본 소년은 찬찬히 나무에서 내려와 섰다. 그리고 놀람과 부끄러움을
한데 담아 자신을 노려보는 귀족 아가씨의 눈길을 무시하며, 자신이 약을
타놓은 고깃국을 들이키고 쓰러진 덩치의 맥을 짚어보았다. 짐작대로 아직
살아는 있다. 산채로 잡아가야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소년은 다음으로 자신 옆에 쓰러진 귀족 아가씨의 몸을 묶은 밧줄을
푸르기 시작했다. 몸이 자유롭게 되자 그녀가 처음 한 일은,
쓰러진 덩치의 겉옷을 벗겨 입으며 소년의 뺨을 갈기는 일이었다.
"뭐야! 빨리 눈 돌리지 못해! 그 재수없는 눈동자 치워!
나와 이 쓰레기같은 놈 중 누가 더 중요하다는…뭐, 뭐야! 이거 놔! 으읍…!"
소년은 그대로 놓아두면 하루 종일 계속 놀려질 귀족 아가씨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쓰러트린 덩치가 하려던 일을 대신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옷조각들은 다 널브러지고,
팔다리는 육중한 사내의 몸무게에 눌려 꼼짝도 못하는 귀족 아가씨의 모습,
그것은 마치 표본을 하기 위해 자그마한 바늘로 판지에 박아둔 나비의 모습과도
흡사한 것이었다.
"훗, 이래서 강간하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지…."
소년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허리를 놀려댔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바둥거리고 있는 귀족 아가씨의
창백해진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