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년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방금 감옥에 처넣어진 붉은 머리의 여성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피부가 찢겨져 흐르는 피가 머리색과 어울러져 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여성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고, 소년은
천천히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개 좀 들어봐요."
"……."
여성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머리칼이 뒤로 흐트러지며 세갈래로
갈라진 귀가 뚜렷이 나타났다. 소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블러드 엘프였군요. 난 당신을 벨 망나니예요."
"……!"
여성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기 앞에 서있는
소년은 아무리 많이 나이를 쳐져도 20살 이상으로는 안보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띈채 여성이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는듯
대답해주었다.
"망나니는 세습이니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칼을 잡았죠.
여태까지…얼마나 베었더라…. 가끔 귀족들이 심심풀이로 가져오는 고블린이나
오크들을 베어보기는 했지만 당신같은 엘프를 베게 되는 것은 처음이에요."
"……."
여성은 아무말도 없이 다시 고개를 수그려 버렸고, 소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묻는 건데, 엘프들은 정령술에 능하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
여전히 여성은 말이 없었고, 소년은 피식 웃었다.
"뭐, 긍정의 뜻으로 알죠. 그리고 특히 당신네 블러드 엘프는 불의 술에
뛰어나다고 알고 있어요."
"…블러드 엘프가 아니라 레드 엘프에요…."
갑자기 여성의 고개가 들려지며 약간 죽어있는, 그러나 강경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소년은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었다.
"흠, 처음으로 입을 여셨네요? 그럼 레드 엘프 누나, 이 경기장의 규칙을
아시나요?"
"……."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누나란 소리에 그 여성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고, 소년은 다시 그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누나는 날 죽여야 살 수 있어요. 이건 알죠?"
끄덕- 엘프 여인의 붉은 머리칼이 약간 출렁였다.
"하지만 그냥 살게 되는건 아니에요. 망나니가 되는거죠."
여성은 화들짝 놀라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소년은 좀더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원래 망나니는 세습이에요. 하지만 죽은 망나니가 자손이 없을 때에는
그 망나니를 죽인 사람이 망나니가 되는 거죠."
"…그럼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에 소년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망나니죠."
"……."
"그렇게 되기 싫으시죠?"
여성은 눈을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갑자기 미소를 짓더니
창살 안으로 살짝 고개를 밀어 넣어 레드 엘프 여성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당황하여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는 그렇게 되기 싫으시죠?"
"…그래요."
"그럼 날 죽여요."
"……."
여성은 놀람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소년에게로 돌렸다.
이 소년은 제정신인가? 자신을 죽여달라니….
그러나 소년의 말은 계속 되었다.
"나도 이 직업이 슬슬 귀찮아졌어요. 그러니까 초반에 누나가 불꽃을 날려서
날 완전히 태워줘요. '흔적'도 안 남도록…. 그럼 우린 둘 다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죠."
"…그럼 혹시 당신은…."
여성은 문득 뭐가 생각난듯 소년에게 말하려 했으나 소년이 손을 가로젓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알아듣는 걸 보니 머리가 좋은가봐요? 그럼 처형일 날, 알았죠?"
살짝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소년을, 여성이 다급히 불러세웠다.
"아, 잠깐만요!"
"예?"
소년은 천진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고, 여성은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가만히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전 시리아스, 시리아스 뮤프넬이에요. 당신은 이름이 뭐죠?"
소년은 미약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헌…선우 헌(鮮宇 軒)입니다."
※ ※ ※
"대답하라, 시리아스. 왜 그런 짓을 했지?"
왜…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거죠?
"대답하라, 시리아스 뮤프넬. 계속되는 그대의 고집센 침묵은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뭘 말하라는 거죠? 어차피 당신들은 날 이해하지 않아!
"지노벨 크란테와 아넨 뮤프넬의 딸 시리아스 뮤프넬은, 부족의 규칙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금지된 불의 힘에까지 손을 뻗었소. 이에 대해 우리
최고 장로회는 시리아스 뮤프넬의 영구 추방을 결정하는 바요."
추방…추방이라고?! …그래, 당신들은 이해못해. 아니, 이해하려 들지조차 않아!
내가…내가 그 나무를 불태우지 않았다면…그랬다면 숲은…!!!
"시리아스 뮤프넬, 그대에겐 영구 추방과 함께 숲을 배신한 자들의 이름,
블러드 엘프의 낙인이 함께 하리라. 최고 장로회의, 이만 마치겠소."
블러드 엘프라고? 블러드 엘프…그런 식으로 날 부르지 마요, 난 누구의
피도 흘리게 한 적 없어! 누구의 피도…. 그리고…그리고 난 레드 엘프야….
불과 계약을 맺었을 뿐인…. 그래, 고작 계약이야! 숲을 버린 적도 없어,
난 단지 그 나무를 태워 없앴을 뿐이야. 그걸 그대로 나뒀으면…나뒀으면….
알아요? 당신들은 물론이고 이 숲이 죽었을꺼야….
"시리아스, 넌 어리석은 일을 했다."
어머니…. 어머니도 왜 그런 눈으로 날 보세요….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요!
날 이단자 취급하지 마요! 넌 이제 내 딸이 아니라는, 그런 딱딱한 투의 말은
그만둬요!
"그는 널 이용한거야. 그 나무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아. 그는 단지
그 나무가 있으면 그 '길'이란 것을 만드는데 불편하니까, 그래서 널 이용한
거야. 그런데 넘어가다니 너도 참 어리석구나. 게다가 그 인간을 위하여
금기된 불의 힘에까지 손을 뻗다니…."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그는…그는!
"어때? 내가 말한 대로지? 귀가 세갈래 나있고 머리카락은 불타는 듯한 빨강,
그리고 눈 밑에 나있는 '불의 눈물자국'."
"오, 정말 신기하게도 생겼군. 이것이 블러드 엘프인가?"
"그래, 아마 쿠리안에 가져다 팔면 비싸게 받을수 있을꺼야.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값이 비싸지지. 그런 곳에서는 이런 종류의 종족은 보기 힘드니까."
키온…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이러면 안돼요! 내 뱃속에는 당신의…!
"잡아라! 블러드 엘프가 도망친다!"
"조심해, 저 마물은 손에서 불을 뿜어낸다!"
"저 마물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자들은 다 그 불에 죽었다지?"
"정말 무시무시한 마물이군! 조심하게!"
왜…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왜 나에게만…? 왜? 왜!
"싫어 - !!!"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쇳소리…. 그 때문에 잠이 깨어버린 죄수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젠장, 저 마물 녀석 또 발작인가?"
"요새 와서는 좀 잠잠하다 싶더니만."
"근데 이번에도 그 망나니 녀석이 한칼에 벨 수 있을까?"
머리에 비듬이 덕지덕지 붙은 사내가 이렇게 말을 하자, 옆에 있던 코에
칼자국 난 사내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임마, 네 녀석 걱정이나 해. 한달후면 끝판(목베이는 장소. 죄수들의 은어임.
작가주)으로 끌려갈 녀석이."
"그렇군…."
비듬 사내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고, 때문에 옆의 동료들로부터
여름에 웬 눈이냐는 아우성과 함께 주먹 세례를 받아야 했다.
+ + +
다시 한번 글 올리는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설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올릴 것이며,
한번 올릴 때만다 두편 내지는 세편씩 같이 올릴 겁니다.
근데 한중 뛰어 쓰는 방식이 어떠세요?
맘에 드시는지...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