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칙칙한 어두움.
시간마저도 죽어버린 듯한 사형수들의 독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 곳 복도.
아무도 없는 어두운 통로 한끝에선 드윽- 드윽- 하는 소리와 가끔가다
쥐가 찍찍 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소년은 칼을 갈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을 들여 칼을 갈고 있었다.
물이 다시 한 바가지 도신(刀身) 위에 뿌려지고 넓적한 돌에 날이 부딪힐 때마다
섬뜻한 빛이 번뜩인다. 곤두선 날 위에 날렵하게 생긴 손가락 하나가 스치고
지나간다. 피가 한방울 배어나오고, 소년의 무심한 눈동자가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날이 갈리기 시작한다.
"여기 있었군."
뒤에서 들려온 늙은 목소리에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잘 만들어졌어요, 산노?"
"네가 준 것만큼의 값어치는 될꺼다."
야율산은 소년의 앞에 들고 있던 물건을 털썩 내려놓았다.
그것은 조금 묵직하게 생긴 조끼였는데 소년은 그것을 손으로 만져보더니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었다. 야율산은 그런 소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몇번 불똥이 튀더니 이내 나뭇가지에 불이 붙었다. 소년은 그 불붙은
나뭇가지로 조끼의 한부분을 골라 지져보기 시작했다.
치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소년은 불붙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내던지며 자신이 지진 부분을 살펴보았다. 재가 묻어 약간 거무스름하게
된 것 빼고는 아무 흠도 나지 않았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품에서 기름 주머니를 꺼내 조끼 위에 떨어트렸다.
기름 주머니는 이내 터져 조끼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시 나뭇가지를 집어든
소년은 조끼에다가 그것을 가져다 댔다. 기름의 영향으로 조끼엔 이내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말 철저하게도 검사하는군…."
야율산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에 다시
입을 가져다 댔다. 조끼엔 여전히 불이 붙어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조끼 자체는
타지 않고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보고서야 손에 들고 있던 돈주머니를
야율산에게 던져주었다.
"확인해봐요, 틀림없이 맞을테니."
"넌 사기칠 놈은 아니니까."
야율산은 수염 밑에 숨어있는 입술을 삐죽이며 확인도 하지 않고 그 돈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소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조끼를 이리저리 굴려 불을 끈 후
탈탈 털어서 흙묻은 것을 깨끗이 했다. 그리고는 웃옷을 벗고 맨몸 위에 그것을
껴입었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오른쪽에 달려있는 실을 잡아당기게. 그러면 그 안에 있는
모래들이 뿜어져 나올테니까."
"그 마물에게 죽을 정도로 멍청한 짓은 안해요. 이건 방비일 뿐이야."
자신의 충고에 돌아오는 냉랭한 대꾸. 야율산은 허허 거리며 몸을 돌려
어두운 통로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제 다시 어둠 속에는 득득 하는 소리와
어렴풋이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 ※ ※
"와아! 드디어 나왔다, 소년 도부수!"
"저 망나니 녀석, 왠지 긴장한 모습인데?"
경기장은 이미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얼굴을 잔뜩 상기시킨채,
천천히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나오는 소년의 모습을 주시하였다.
소년, 선우 헌은 팔을 휘휘 돌려보았다. 천천히 몸을 풀면서, 그는 조용히
자신에게서 약간 떨어져 눈을 감은채 뭐라고 입을 우물거리고 있는 시리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쓰는 아버지의 칼을 왼손에 쥐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갑자기 웅성거리며 서로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이, 저 녀석 그걸 쓸 모양인가?"
"왼손으로 칼을 잡은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한편 망나니가 마물에게 쓰러진다거나 한칼에 베지 못한다는데 돈을 건
사람들의 얼굴은 찡그려졌다.
"이런, 좌수검(左手劍) 돌격자세로군…."
"저 도법은 저 녀석 아버지가 오우거를 한칼에 쓰러트릴 때 본 이후로는
처음이지."
"제길…저걸 생각 못했어."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무시한채, 선우 헌은 칼을 잡은 손을 뒤로 당기며
자신의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년의 몸은 시리아스를 향해
뻗어나갔다.
소년의 칼이 곧바로 블러드 엘프의 가슴을 뚫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시리아스의 입에서 맑은 음성이 터져나왔다.
"불의 정령 살라만더여, 내 목소리를 듣고 그에 응답하여 여기 모습
을 나타내어라!"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의 얼굴 옆으로 무언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선우 헌은 화끈거리는 눈을 팔을 들어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시리아스의 주위에는 불에 타오르는 도마뱀 모양의 물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마물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정령소환이다!"
"끝내주는군! 몸에서 불을 뿜어내다니!"
"으하하! 이길 수 있어! 승산이 있다구!"
한편 망나니 쪽에 돈을 건 사람들은 앞의 의자를 후려치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제길! 어떻게 저럴 수가…."
"젠장, 이 내기, 질지도 모르겠는걸…."
"야! 이 마물 녀석아! 저 망나니 녀석의 코웃음으로도 그 따위 반딧불은
꺼진다구!"
그러나 막상 싸우고 있는 선우 헌은 자신이 벨 목표물 주위를 맴도는
불의 정령들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소년은 다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다시 마물에게로 뛰어 들었다.
파아앗-!
"꺄악!"
채앵-!
짧은 파공음, 그리고 마물의 입에서 튀어나온 앳된 목소리,
뒤이어 터져 나온 쇳소리.
사람들은 마물의 손에서 뻗어나오는 검 모양의 불을 볼 수 있었다.
"오, 대단한걸? 불을 뿜어내어 칼을 막아내다니…."
"망나니 녀석, 고전인데?"
소년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도 잠시,
그는 다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칼은 왼손에 잡혀 있었다.
그리고 일순간 소년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소년의 칼은 정확히 그 마물의 배를 관통하여 등으로 뚫고 나와 있었다.
그것을 본 관중들, 특히 망나니가 한칼에 마물을 벤다는 쪽에 돈을 건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잘했다, 망나니!"
"역시 깨끗한 단칼 처리!"
"아냐, 저걸 봐!"
돈을 땄다는 기쁨에 들떠 어쩔줄 모르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 사내가
손가락으로 망나니 쪽을 가리켰고,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 따라 옮겨졌다.
소년의 칼날은 분명 블러드 엘프의 배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걸 봐, 망나니 등 쪽으로 튀어 나온게 뭐지?"
"불꽃이다! 불로 이루어진 마물의 검이야!"
"그, 그럼…승부의 결과는 무승부인가?"
사람들의 어수선한 소리를 받으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언뜻 보면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망나니와 마물의 손을
만져보더니 관중석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오늘 경기의 결과는 양측 동시 사망! 양측 동시 사망입니다!"
"뭐, 뭐야! 그런 결과가 어딨어!"
"말도 안돼! 이건 조작이야!"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불만을 토해내며 썰물 때처럼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텅 빈 경기장엔 싸늘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서로를 껴안고 있는,
소년 선우 헌과 블러드 엘프 시리아스의 시체만이 남아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