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11/65)

 #1.

 장백산맥. 

 인간의 발걸음을 거부하는 천연의 요새. 

 사시사철 꼭대기엔 눈이 쌓여 있다 하여 이름붙여진 장백산에서 시작하여,

 중원 변두리의 한수산에서 끝나는,

 장장 800여 리(1리는 약 4km)에 달하는 산줄기.

 산맥을 이루는 대부분의 산들은 높이 2700여 장(1장은 약 3m)에 달하는

 고산들이며, 특히 주종이 되는 장백산은 3200여 장에 이르는 최고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한 겨울이어서 사냥꾼의 발걸음조차도 뜸한 이 험한 산지를, 두 명의 남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 쪽은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고, 여자 쪽은 검은색

 단발의 키가 큰 여성이었다. 언뜻 보면 머리색깔도 똑같고, 얼굴도 둘 다

 미인이어서 남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눈동자에서는 둘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소년의 눈동자는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무심한 눈동자였으나,

 여인의 눈동자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담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소년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소년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여, 얼굴엔 미소를 띄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들죠? 조금만 참아요, 이제 곧 두 번째 지점에 도착하니까."

 "견딜만해요, 걱정하지 마요."

 검은 단발의 여인은 빙긋 웃어 보였고, 발걸음을 빨리 하여 앞에 가는 소년과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길 몇차례, 둘은 커다란 잣나무가 서있는 곳에 도달하였고,

 근처 바위 위에 여인을 앉힌 소년은, 나무 밑을 파더니 거기서 어떤 자루를

 들어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건량과 물을 꺼내 여인에게

 건네주고는, 자신도 천천히 육포 한조각을 떼어 씹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채로 입을 오물거리던 소년은 느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걸어가면 일주일 내로 해동에 도달할 수 있을겁니다.

 거기에 도착하면 일단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요."

 "그것이 이곳 쿠리안의 법률인가요?"

 여인은 씹고 있던 건량을 삼킨 후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고,

 소년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쿠리안의 법률. 아니, 불문율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죠.

 '어떤 사유에서건 쫓기는 사람이 해동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해동의 이름으로 보호받는다.' 이건 중원에서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해동의 법률이에요. 물론 중원은 그것을 인정하고는 있지 않지만,

 감히 해동을 건드릴 수 없으니 속만 태우는 거죠."

 "그렇군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검은색 머리칼이 조금 흘러내리더니,

 그 밑에 숨어있던 붉은색의 머리칼이 나타났다. 그걸 본 소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여인의 가발을 고쳐 씌어 주었다. 

 "조심해요.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지만 생계가 어려운 사냥꾼들은

 그래도 드나드는 사냥 골목이니까."

 "아, 미안해요."

 "뭐, 됐어요. 이제 출발할까요, 시리아스 누나?"

 소년은 건량과 물병을 챙겨 허리에 매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힘겹게 일어나는 여인을 격려하며 또다시 길을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런 지점이 또 얼마나 있죠?"

 한참 걸어가던 시리아스는 또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앞에 가는 소년,

 선우 헌에게 말을 걸었고, 헌은 뒤를 돌아보며 대답해주었다.

 "앞으로 일곱개 정도 남아있죠."

 "언제 이런걸 다 준비했어요?"

 시리아스의 그 질문에 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년 전부터…도주로를 계획해두었죠.

 그리고 틈틈이 그곳에다 도주에 필요한 물품들을 묻어놓았던 거예요.

 일단 망나니는 자신이 속한 도시 내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전 귀족들의 청부를 받아들인다는 명목으로 그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죠."

 "아…미안해요, 내가 또 실수했군요…."

 시리아스는 헌의 얼굴에 떠오른 쓰디쓴 표정에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고,

 헌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헌의 얼굴은 다시 무심하게 변해있었다. 

 ※     ※     ※

 "뭐요? 그게 진짜란 말요!"

 청난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치안청장 번문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흥분하여 책상을 쳐대는 곽우량을 비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태까지 코를 후벼파던 손가락을 그곳에서 끄집어내어

 그 목표지를 귓구멍으로 옮기며 중얼거렸다.

 "그렇소, 내가 알아본 결과 이선우란 원로 귀족은 존재하지 않소.

 그건 그렇고 너무 흥분하는군, 곽 소사(작은 관리소의 우두머리)."

 "흥분 안하게 됐소!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데! 금 사천 삼백 만냥이면

 자신은 물론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란걸 모르시오!"

 번문호는 귓가에서 노닐던 손가락을 꺼내 자신의 입에 넣어보며 말을 이었다.

 "곽 소사, 당신은 너무 일을 돈에만 치중시키는 경향이 있소.

 문제는 더 심각할 지도 모르오."

 "뭐가 말이오?"

 곽우량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씩씩 거리는 숨을 내쉬며 되물었고,

 번문호는 이번엔 손가락을 자신의 가슴속에 넣어 벅벅 긁으며 대답해주었다. 

 "얼마 전에 거부 왕보단의 창고가 홀라당 타버린 일이 있소."

 "아, 그 고기 백정 출신의?"

 곽우량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퉁명한 말투로 말을 받았으나,

 번문호의 다음 말에는 눈이 동그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불이 옮겨 붙은 바람에 그날 하루 전에 마물에게 죽은

 망나니의 집도 타버렸소.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 망나니는 금불산을

 자신이 베었던 마물 녀석과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는군."

 "서…설마…."

 "그 설마일지도 모르오. 뭐 미결 사건은 많으니까…."

 "그렇군…. 뭐 당신도 나름대로 속셈이 있겠지.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난 그 녀석을 지옥까지라도 쫓아가 내 돈을 받아내겠소."

 곽우량은 이를 바드득 갈며 자리에서 소매를 떨치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정보를 준 번문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채 밖으로 걸어나갔고,

 번문호는 그런 곽우량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성격이 급하니 아직도 이런 촌구석의 관리소에서 썩고 있지….

 좀 나처럼 진득하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한참 자화자찬을 하던 번문호도 자기 혼자 떠드는 것에 이내 싫증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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