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으음…뭐…지…."
링 메이는 밖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보았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다.
하긴 산에서의 아침은 늦게 찾아오지만 서도, 폐로 들어가는 공기의 차가운
느낌은 지금이 아무리 일러도 축시(丑時)와 인시(寅時) 의 접경(새벽 3시)임을
알려주었다.
링 메이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 근육을 풀어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 때, 자신의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 일어났어요, 아라?"
검은 단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 붉은 색 눈망울을 빛내며 말을 건네온 것이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까지 개켜놓은 그녀를 보며, 링 메이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냥꾼인 자신보다 더 일찍 일어나다니….
"벌써 일어난 거예요?"
"잠이 잘 안 와서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그 말에 링 메이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글쎄요…전 방금 일어나서. 지금 알아보려고 하던 참이에요."
창문 밖으로 마을 중앙에 모여있는 주민들이 보였다. 다들 얼굴에 분한 빛을
띄고 있는 것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리고 주민들 사이에 비천한
웃음을 흩날리고 잇는 염소수염의 사내와 그 사내 뒤의 수레에 실려있는
거무스름한 피부의 종족….
"뭐, 뭐야, 저건! 머리가 꼭 돼지같잖아!"
링 메이는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자신의 뒤에서 이상하게
얼굴이 찌푸려진 아라를 보고 흠칫했다.
"아, 아라는 보지 않는게 좋겠어요, 너무 흉측하게 생긴 종족이 들어왔는데요?"
링 메이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창문을 닫아버렸으나, 아라의 다음 말에
더 일찍 창문을 닫아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방금 그 종족…분명 오크였어요…. 이 특유의 오징어 구운 것 같은 악취…
우, 우욱!"
"이런, 아라! 아라, 괜찮아요! 자, 방금 그건 잊어버리고…그, 그릇!"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는 아라의 등을 두들겨 주며,
링 메이는 잠시 밖의 상황을 잊어버렸다.
※ ※ ※
돌말의 주민들은 얼굴에 분노의 빛을 띄고, 밤을 틈타 마을로 들어온 노예상인,
알 하즈의 염소수염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눈길이 실재로 작용한다면 아마도
그 비열하게 생긴 노예상인의 수염은 가닥가닥 뽑혀 버렸을 터이지만,
그러나 아무도 감히 달려드는 이가 없었기에 알 하즈의 수염은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다.
알 하즈는 얼굴에 장사꾼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칼을 수레를 묶은
끈 쪽으로 갖다대고 있었다. 한동안 계속된 소요가 조금 가라앉자 그 사내의
입이 열렸다.
"자, 어서 결정하십시오. 전 별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이어서요."
"알 하즈, 당신도 우리 마을의 규칙을 알고 있을 거라 믿고 있소."
그 사내의 말상대를 하고 있는 것은 돌말 최고의 장로인 덩 터우한이었다.
그는 자기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참나무 지팡이에 몸을 기댄체,
가슴팍에 늘어져 있는 흰색 반 검은색 반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 마을에선 절대로 노예를 두지 않소. 노예를 둔다는 것은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해오고 있기 때문이요. 모든 이는 평등한 것인데,
어찌 다른 이를 노예로 둘 수 있단 말이요."
"아, 장로님의 고견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 하즈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 평등을 주장할
권리는 없습지죠. 아, 물론 신에 가까운 권능을 지닌 용들은 제외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것들 역시 생명임에 틀림없소. 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아무래도 우린 노예를 둘 수 없소이다."
그러자 알 하즈는 하늘을 보며 크게 웃어댔다.
"핫핫하!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고요? 그렇다면 장로님이나 이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인간과 평등한 다른 짐승들을 죽이고, 그것의 가죽을
벗겨 파는 것입니까?"
덩 터우한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주름살로 뒤덮인 손이 빠르게 수염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그, 그건…그건 우리가 살 수 있기 위해 할 수 없이…."
"말도 안돼는 논리입니다, 장로님…!!!"
알 하즈는 더듬거리는 덩 터우한의 말을 끊고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자신의
단도를 고쳐 잡으며 빠른 속도로 말했다.
"더 이상 장로님의 말도 안돼는 논리에 대응할 시간이 없군요….
빨리 결정해주십시오, 사겠습니까, 안 사겠습니까? 사신다면 전
돈을 받고 고이 물러갈 것이고…안 사신다면 전 망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오크들을 실은 수레의 문을 열어 이들을 놓아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분노와 모멸감으로 시뻘겋게 변했다. 자신들의 장로가
저 따위 노예상인의 논리에 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요, 모멸감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겐 저 오크 무리를 살 돈도 없었다. 그 때, 그들의 뒤에서
약간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그 오크 무리를 사도록 하지요."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그 말을 꺼낸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검은 단발의 소년,
몇일 전에 링 메이가 유혼곡에서 데리고 왔다는 바로 그 소년이다.
소년, 선우 헌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알 하즈에게 다가섰다.
그가 다가섬에 따라 알 하즈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왠지 모를 압력이 느껴졌다. 예리한 칼이 자신의 심장 앞에 닿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땀을 흘리며, 더듬거리는 입을 열었다.
"저, 정말이요, 이 오크들을 다 사겠다는게…그, 그만 다가와요! 으윽…."
"정말이고 말고요. 모두 얼마죠? 그리고 당신은 내가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겁을 집어먹고 있는겁니까?"
소년은 얼굴에 계속 미소를 띈 채로 알 하즈에게 천천히 다가섰고,
그럴수록 알하즈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결국 그는
돌부리에 발이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고,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소년의 무심한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저었다.
"으아악! 다가오지마, 제발!"
그 순간 사내의 허리춤에서 무언가가 공중을 향해 날았고,
그것은 공중에 있는 상태에서 찢어지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알 하즈는 빛의 막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선우 헌의 눈이 꿈틀거렸다.
"부적…이로군. 아니, 훼이블의 것이니 스크롤(마법서적에 쓰이는 룬문자로
주문을 적어, 그것을 꺼내는 순간 적힌 주문이 발동되게 만든 마법 보조도구.
부적과 혼용되어 이곳 젤리아드 대륙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작가주)이라고
해야 하나…."
헌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가락을 뻗어 스크롤에 의해 생성된 빛의 막에 가져가
보았다. 순간 파지직! 하는 살타는 소리가 났고, 헌은 손가락을 거두어 들인 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끝이 거무스름하게 되어 있었다.
"뭐, 별로 고위 마법사가 만든 것은 아닌 듯 하군. 한번쯤 부딪혀 보는 것도
좋겠지…."
헌은 그렇게 중얼거린 후 자신의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천인참(千人斬) 일식, 천살(天殺)…!"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가닥의 도광이 알 하즈를 둘러싼 결계를 세로로 지나갔고,
마법력에 의해 생성된 결계는 마치 천이 찢어지듯이 쪼개져 버렸다.
알 하즈는 헌이 칼을 잡은 순간부터 이미 머리를 땅에 쳐박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볼 기회가 없었지만, 그와 반대로 소년이 나타날 때부터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헌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우 헌은 자신의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으며 숨을 고르게 한 뒤,
천천히 죽은 듯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알 하즈의 옷깃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으헉…!"
알 하즈는 헌과 눈이 마주칠 새라 얼른 얼굴을 돌려버렸으나,
헌은 강제로 그의 염소수염 을 잡아 돌려 자신을 보게 한 뒤,
예의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당신을 잡아먹을 것도 아니지 안습니까…. 이제 가격이나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아, 가, 가격이요…. 예, 예, 모두 합해…에, 그러니까 모두 35마리니까,
아, 그러니까…."
"한마리에 은 닷냥 쳐주도록 하죠. 합해서 은 175냥 어때요?"
"아, 예…좋습니다…."
알 하즈는 애써 헌의 눈을 피하며 더듬거렸고, 헌은 거래에 만족한 듯 잡았던
그의 옷깃을 놓아주었다. 알 하즈는 땅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서둘러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고, 헌은 그런 노예상인의 등뒤에 대고 외쳤다.
"반시진 뒤에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보도록 하죠! 약속 어기면 안돼요!"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알 하즈는 둗는둥 마는둥 하며 재빨리 마차를 몰아 사라져 버렸고,
그가 마을 밖으로 나가버리자 주민들은 함성을 지르며 소년에게 다가왔다.
"와아, 정말 대단해요!"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그 노예상인 놈이 꼼짝도 못한겁니까?!"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예요! 대협 칭호를 들어야 마땅해요!"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에게 몰려드는 주민들을 소년, 선우 헌은 멋적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었었다. 어느 순간, 헌은 고개를 돌려 링 메이의 집을 바라보았고,
마악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검은 단발의 여인, 아라 역시 그에게 미소를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