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후우…후우…. 정말 엄청난 살기였어…. 어떻게 그런 어린 꼬마가 그런 살기를
지니고 있는거지…."
알 하즈는 너무 심하게 몰은 나머지 다 헤져버린 수레바퀴 옆으로 굴러 떨어지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아까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그 안에 살기를 숨기고 다가온 소년의 모습.
알 하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애써 그 기억을 잊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나무 위에서 들려온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그의 악몽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늦었군요…."
"으힉!"
알 하즈는 소리가 들려온 나무에서 뒷걸음질치려 했으나,
예의 그 무심한 목소리는 어느새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흠…확실히 겁이 많으시군요. 뭐, 상관없지만…. 어쨌든 오크들을 넘겨주시죠.
여기 은 175냥 있습니다."
소년은 얼굴에 일점의 감정도 나타내지 않으며 주머니 하나를 알 하즈에게
던져주었고, 그것을 받아들은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자루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이 주먹만한 은덩이 18개, 확실히 은 175냥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알 하즈는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 소년은 자신을 헤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하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공격용 스크롤이 몇 개 있었다.
물론 보호막은 그냥 찢어져 버리고 말았지만, 저 소년이 공격 마법까지
막아낼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알 하즈는 다시 얼굴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다시 자루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거드름을 부리며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한 마리에 은 닷냥은 너무 적은 것 같습니다, 손님.
아무래도 은 여덟냥은 받아야 겠는데요?"
"……."
소년은 잠시 아무말도 없이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알 하즈를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보라색 눈동자…. 알 하즈는 흠칫 했으나
확실히 값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애써 열리지 않는 입을 열어
'가격조정'을 해보려 하였다.
그러나 소년 쪽이 더 빨랐다. 즉, 알 하즈에게 또다른 주머니를 던져 주었고,
알 하즈는 그 주머니 안에서 은자 105냥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알 하즈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오크들을 태운 수레를 소년에게 넘겨주었다.
천천히 수레 쪽으로 다가가던 소년을 향해 알 하즈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손님께선 그 많은 오크들을 다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당신은 팔면 그걸로 끝 아닙니까. 신경 쓰지 마십쇼."
냉랭한 소년의 목소리. 그러나 이미 거래는 끝났기 때문에 알 하즈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 때 수레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알 하즈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오크들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흉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 하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오크 무리 사이에서 그들에게
무어라 말하며 자신을 가리키는 소년을 보자 더 새하얘졌다.
한 건장한 오크가 어디서 났는지 손에 몽둥이를 들고 달려드는 것을 필두로,
오크 무리들 모두가 자신에게 달려오자, 알 하즈는 비명을 지르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공격용 마법이 적힌 스크롤을 펼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허리춤은 허전했고, 완전히 새하얗게 되어버린 알 하즈의 머리는
첫 번째로 달려든 오크의 몽둥이에 의해 깨어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알 하즈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오크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무서운 눈으로 쓰러진 '적'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서있는
'친구'에게 다가갔다.
"꾸르륵…고맙다…꿀꿀…우린 오크, 은헤 안 잊는다…꾸륵!"
"그렇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겠지?"
소년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오크를 무시하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고,
상대되는 오크는 멎적게 털로 뒤덮힌 자신의 손을 거두어들이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꾸르륵!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꾸륵!"
"좋아, 내 부탁은…."
※ ※ ※
링 메이는 서운한 얼굴로 아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 가요, 아라. 그리고 헌 당신도…."
소년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링 메이 쪽으로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그리고 손을 아라에게 내밀었다.
"자, 가요, 누나."
"네…."
아라는 그 단발을 흔들며 소년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링 메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있어요, 링 메이! 숲을 관장하는 신의 수호가 당신에게 내리길 빌겠어요!"
"잘 가요, 아라!"
링 메이는 그들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섭섭한 표정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득 자신의 뺨에 무언가가
흐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후훗…바보같이…."
링 메이는 손으로 그것을 훔쳐내며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없는 지금, 집안은 완전히 정적에 쌓여 있었다.
"출산할 때까지 좀 기다렸다 갈 것이지…."
링 메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무언가 자신의 발에 치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집어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은
일순 멍해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링 메이는 아라가
놓고 간 돈 주머니를 들고 그들이 향한 길로 빠르게 뛰어갔다.
※ ※ ※
소년, 선우 헌은 조심스럽게 시리아스의 손을 끌고 길을 가고 있었다.
계산이 맞다면 오늘로 시리아스의 임신은 6개월 째. 헌은 고개를 돌려
시리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안해요, 바쁘게 서둘러서."
"아뇨, 오히려 내가 미안하죠. 나 때문에 그렇게 길이 지연되었으니까."
시리아스는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고, 역시 헌도 미소로 화답했다.
해가 중천에 닿자, 헌은 좁은 공터로 시리아스를 인도해 들어갔다.
나무들이 우거져 충분히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장소였다.
헌은 그곳에 짐승가죽을 깔은 후 시리아스를 앉혔다.
시리아스는 사양하려 했으나 헌은 막무가내였다.
"여자는, 더군다나 임신했을 때 차가운 곳에 앉으면 해로워요."
헌은 그렇게 말하며 시리아스를 앉히고는, 주변 바위 밑을 파내더니
가죽부대를 꺼내어 예전처럼 그 안에서 건량을 꺼내 시리아스에게 던져주었다.
그러나 시리아스는 그가 던져준 건량이 예전과는 달리 약초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약간 충혈되어 헌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헌이 이렇게 물어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눈가를 훔치며
대답해야 했다.
"조금만 참아요. 이제 해가 오후로 접어들면 그때부터 길이 편하니까,
마을로 내려가기가 더 수월할 거예요. 거기서 의사를 찾아가자구요.
그런데 왜 안 먹고 있어요? 속이 또 불편한가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헌은 그녀가 흘린 눈물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그녀 옆에 앉으며
화제를 바꿔보았다.
"으음, 그런데 그건 그렇고 링 메이에게 제가 말한 대로 해주었나요?"
"네, 말한 대로…제가 주고 싶은 만큼 주었어요."
"잘 했어요. 그분, 또 만나고 싶네요."
"저도 그래요…"
시리아스는 어느새 다시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헌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동시에 그의 손이 등뒤에 꽂혀 있는 칼에 닿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시리아스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조심해요, 뭔가 무리를 지어 오고 있어!"
그러나 소년의 손은 곧 당혹스럽다는 빛을 띄고, 헛구역질을 해대는
시리아스의 등을 쓸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시리아스는 헛구역질을 해대면서도
헌에게 조언을 하려 애썼다.
"우욱! 이 냄새는…분명 그 때 그 오크들의 냄새…."
"그때 그 오크라면…."
헌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시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노예상인이 끌고 마을에 왔었던…우욱!"
"이런…괜찮아요, 누나? 그건 그렇고 왜 저들이 살의를 띄고 있는 것이지?"
"살의…라뇨? 우욱!"
헌은 또다시 헛구역질을 하는 시리아스의 등을 쓸어주며 짧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싸우게 될 것 같은데요…. 아앗, 조심해요!"
그리고 그 말과 함께 헌은 시리아스를 자심의 몸으로 덮으며 엎드렸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머리 바로 위에 있는 나무둥치에 짧은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헌은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시리아스도 마찬가지로, 비틀거리긴 했지만
눈에 분노의 빛을 띄고 몸을 세웠다. 숲 저쪽에서 무장한 오크들의 무리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문득 시리아스의 입이 열렸다.
"당신이 인정을 베풀어 저들을 사서 놓아주었는데도 도리어 우리를 헤치러
오다니…제가 처리하죠…."
"위험해요!"
헌은 다시 시리아스 주위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그녀를 몸으로 덮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리아스의 몸이 불꽃에 휩싸여 타오르자,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이런…그러고 보니 누난 레드 엘프였죠…"
"이것이 불의 힘…더 이상 당신 혼자 싸우게 할 순 없어요,
이것으로 저 배은망덕한 오크들을…아앗…!"
분노의 눈길로 오크들을 바라보던 시리아스는,
한 오크가 부메랑을 던지는 것을 보고 놀라 몸을 피했으나,
곧이어 자신의 뒤통수에 와닿는 묵직한 감각에 정신을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져갔다. 헌이 뭐라고 외치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미안해요…당신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시리아스는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그것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헌은 조심스럽게 시리아스의 몸을 안아 안전한 장소에 뉘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자신들을 바라보는 헌을 보며, 오크들 중 한 마리가
나서 물어보았다.
"부탁한대로 되었나? 꾸르륵…."
"그래, 어느 정도는…."
헌은 그렇게 말하며 무심한 눈으로 오크들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종족이다. 자신들을 죽여달라고 했을 때,
저들의 실력이 이렇게 형편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저들에게
의뢰를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쨌든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리고 헌은 뒤로 눈을 돌려보았다. 아까 그 오크가 던진 부메랑은
애꿎은 나무에 박혀 있었다. 결국 그 블러드 엘프는 자신이 기절시킬
수밖에 없었다.
헌은 다시 찬찬히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무서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한 오크가 나서 말을 건넸다.
"꿀꾸르륵, 죽여달라는 말 진심이냐, 인간? 꾸륵, 우린 오크, 꿀꿀, 도와주면,
꾸르륵, 인간, 꿀, 안 죽인다."
"아니, 너희들은 곧 날 죽이고 싶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까지 말한 헌은 갑작스럽게 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미건조한 눈을 들어 오크들을 바라보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지금부터 내 쪽에서 너희들을 죽이러 갈 테니까."
오크들은 갑자기 돌변한 헌의 태도에 웅성거리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헌은 자신의 칼자루에 손을 가져가며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 죽여야 하겠지, 증인이 없어야 하니까 말야…. 아깝긴 하지만…폭(暴)."
그렇게 외치며 헌의 칼이 허공을 향해 몇번 휘둘렸고, 뒤이어 오크들이 서있는
장소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광-! 쾅-!
폭발음과 함께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한 조각 고깃덩이로 변해갔고,
채 연기가 걷히지도 않은 곳으로 헌은 자신의 칼을 뽑아들으며 뛰어들었다.
차례차례 도망치는 오크들을 베어 넘기며 헌은 다시금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벌써 폭탄을 두 개나 써버렸군…. 저 블러드 엘프를 데리고 가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어…."
"꾸에엑-!"
마악 집어넣은 칼날을 오크의 배에서 뽑아내며 헌은 중얼거렸다.
"마지막인가…. 그럼 작업을 시작해보지…."
그리고 헌은 자신의 칼을 거꾸로 잡으며 천천히 시리아스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아까 기절시킬 때 수혼혈(睡魂穴)을 짚어두었기 때문에 앞으로
반시진 내에는 못 일어날 것이다.
이내 작업 준비가 완료되었다. 시리아스의 두 다리는 이미 양옆으로 곧게 세워져
벌려 있었고, 치마는 위로 말려 올라가 음부를 아무 수치심도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헌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그 부분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시리아스의 엉덩이 밑에 천을 깔고는 그곳에 준비해온 도구들을 늘어놓았다.
약간 굵은 쇠몽둥이 하나, 가는 쇠꼬챙이 하나, 집게 둘, 그리고 헌 자신이
쓰는 도(刀)….
헌은 우선 집게를 집어들어 여인의 음부 양쪽을 잡아 벌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안으로 쇠꼬챙이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