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16/65)

 #6. 

 우지직-!

 "빌어먹을!"

 곽우량은 거칠게 발밑에 깔린 달팽이를 눌러버리며, 분노로 벌개진 눈을 들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저 놈들은 자기네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있겠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곽우량은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밥통들아! 밥은 공짜로 먹여주는 줄 알아! 그만큼 값을 해야할 것이 아냐!

 기껏해서 보내놓았더니 한다는 짓이 계집질이냐!"

 곽우량의 호통에 사내들은 더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긁적였고,

 사내들 가운데에 거의 걸레가 된 옷가지로 자신의 알몸을 가리고 있던 여인은

 더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20살이 조금 넘은 듯한 여인이었는데,

 목에 걸린 동물 이빨로 조각한 장신구로 보아 화전민의 딸 같아 보였다.

 곽우량은 한번 흘끗 그녀를 바라보더니 애꿎은 그녀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조용히 해! 암컷이 울면 정신 사나워!"

 그 말에 여인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조용히 울먹이기 시작했다.

 분하긴 했지만 저 사내들이 언제 자신을 죽여버릴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곽우량은 여인에게 이내 시선을 돌려,

 다시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계집질 한 것까진 좋다고 치자, 그런데 흔적을 찾으라고 했더니

 고작 찾아온게…."

 그리고 곽우량은 자신의 발밑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사내들의 얼굴에다 집어던졌다.

 "고작 이거란 말이냐! 이런 화전민 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쓰레기들을!"

 사내들은 우왕좌왕 하며 그것들을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한참 그 꼬라지를 바라보던 곽우량은 다시 소리를 빽! 질렀다.

 "다시 가! 저녁때까지 그 망나니 녀석의 흔적을 못 찾으면

 내 손에 죽을줄 알아라!!!" 

 사내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분히 사방으로 흩어졌고,

 한참 그 광경을 보며 씩씩거리던 곽우량의 어깨를 툭 치는 손이 있었다.

 뚱뚱한 체격에 갈색 치안복을 입은 사내, 번문호였다.

 그는 뒤룩뒤룩한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상당히 급하게 일을 처리하는군, 곽소사."

 "그럴 수밖에. 그 돈이 얼마인지나 아시오? 하긴 당신이 내건 상금도

 큰 액수긴 하지만."

 곽우량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번문호가 몇달전 만들어서 돌린

 전단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름 : 선우 헌.

  죄목 : 살인, 강간, 사기, 밀수, 절도, 마약거래 등 다수. 

  특징 : 보라색 머리칼과 눈동자, 냉랭한 말씨.

  외날인 도(刀)를 무기로 쓴다.

  붉은 머리칼의 마물과 함께 다니고 있음.

  위 범인을 청난성 치안청으로 잡아오는 이(시체도 상관없음)에겐

  상금 금 100만냥을 수여함.

  청난성 치안청장 번문호 인(印)' 

 번문호는 계속 웃으며 은근히 여인 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곽 소사, 저 여인은 어떻게 처리할 거요?"

 곽우량은 다시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번 청장이 알아서 해요. 즐기다 없애버리는 것도 좋고."

 "고맙소이다."

 번문호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울며 저항하는 여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사람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화려한 자신의 마차로 밀어 넣었다.

 막 들어가려는 그에게 곽우량이 한마디 했다.

 "좋은 시간 되시구랴, 번 청장."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리다, 곽 소사."

 번문호는 그 뒤룩뒤룩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자신의 뚱뚱한 몸도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내 마차 안에선 열기에 휩싸인 사내의 신음소리와

 가냘픈 여인의 비명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누나…."

 선우 헌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멍하니 앉아있는 시리아스를 불러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헌의 눈에서도 눈물이 맴돌았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소년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새어왔다.

 "누나…제발 정신차리고 이것 좀 먹어봐요…. 네, 누나…."

 "……"

 그러나 시리아스는 그저 고개를 도리질 할 뿐,

 헌이 내미는 음식물을 거절했다.

 그녀의 아랫도리는 이미 깨끗하게 닦여있었지만,

 여전히 피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결국 헌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안해요, 누나…. 나 때문에…내가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에…."

 "미안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누나……."

 시리아스는 눈을 들어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 그리고 소년의 어깨 너머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오크들의 시체와,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잠자듯이 누워있는 링 메이의

 시신이 보였다.

 그녀는 가발이 벗겨져 드러난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행복하길 빌었는데, 링 메이…. 후훗…후후후…흐흑…우…우우윽…!!!"

 "누나…!!!"

 여인의 어깨가 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했고, 소년은 당황한 얼굴로 조용히

 울음을 속으로 삼키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래도 막 깨어났을 때보다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시리아스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누나…그만해둬요, 그렇게 누나가 슬퍼하다가 누나 몸까지 상한다구요…."

 "…우윽…그렇게 되면 아마도…흑…아이가 슬퍼하겠죠…아마도…."

 "그, 그래요, 누나. 틀림없이 아이도 그런 건 바라지 않고 있을거예요."

 시리아스는 자신의 눈가에 남아있던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런 상태로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자, 헌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누나…."

 "사랑…해본 적 있어요?"

 소년은 뜻하지 않은 여인의 질문에 적이 당황했는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발개진 얼굴로 겨우 입을 연다. 

 "사랑같은거…아직 해본 적 없어요."

 "전 짝사랑이 제일 슬프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짝사랑을 하면 그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나둘 수 있잖아요.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려고 할거고,

 그 사람을 바꾸어 버리려고 하겠죠. 그래서 전 짝사랑을 좋아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까지고 그 모습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을 테니까."  

 헌은 가만히 앉아 듣고 있었다.

 근처 나뭇가지 위에 새들이 날라 왔다 갔다 한다.

 그런 와중에 시리아스의 말은 계속 되었다.

 "난…인간의 남자를 사랑했어요. 정말로 사랑했죠.

 그런데 그 사람은 날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나요?"

 헌은 조용히 물어왔고, 시리아스는 약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그 사람이 절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절 이용하려 하는걸 알면서도, 전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죠.

 그 사람이 절 배신했을 때, 전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래도 그 전까진 그 사람이 그걸 드러낸 적이 없었거든요.

 전 아마도 그래서 착각에 빠진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절 사랑하지 않는다는걸 알지만 서도,

 겉으로 그걸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절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시리아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에선 다시 눈물이 몇방울 굴러나왔다. 

 "알았지만 서도, 절 사랑하지 않았다는걸 알았지만 서도,

 전 그걸 부정해왔던 거죠. 겉으로 그걸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드러내놓고 누나를…."

 헌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시리아스는 반대로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제 잘못일지도 몰라요. 절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보고 날 사랑하게끔 바꿀

 용기가 없었던 내 잘못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두려웠나요?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네…."

 시리아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소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마도…전 이런 사랑을 계속 하게 될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사랑하는…."

 "힘들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바뀌어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아니게 되니까요."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들이 앉아있는 곳에도 어스름이 깔렸다.

 헌은 조용히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여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무 대답도 없는 것이 깊이 잠들은 것 같다. 

 헌은 그런 그녀를 가볍게 안아 푹신하게 깔아놓은 낙엽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냘파 보이는 그녀의 손목을 들어 잠시 맥을 짚어보고는

 짧게 중얼거렸다.

 "'인육'이 필요하군…."

 그 말을 끝으로, 헌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달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음력 21일, 하현의 달. 인체 내에 돌고 있는 피의 순환속도가

 느려지는 때. 그래서 호흡 곤란을 유도하여 간단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밤.

 헌은 그대로 앉아 밤의 공기를 맡아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이제 해동까지는 앞으로 삼일거리. '자유'가 기다리고 있는 땅, 해동.

 그곳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저 블러드 엘프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편하겠지. 후훗…정말이지 귀찮은 짐이야…. 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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