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17/65)

#1.

 해동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의 신변을 관리하는 올해 60살의 다루, 마제건.

 그는 언제나 와 같이 오늘도 관문에 나와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머리 꼭대기에서

 피어나는 하얀 안개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선도(仙道)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가 임독 양맥으로 치달았다가 정수리에서 만나 뒤섞일 때의 기분,

 그리고 정수리에서 뒤섞인 기가 십이 경맥 곳곳으로 퍼져나갈 때의 기분.

 "후우…역시 상쾌하군. 으음?"

 선도(仙道) 수련을 마치고 막 몸을 일으키던 마제건의 눈에 장백 산맥 쪽에서

 내려오는 두 인영이 보였다. 그의 턱 밑에 난 수염이 으쓱거렸다.

 "오랫만의 손님이군…. 마중을 나가볼까."

 마제건은 천천히 기를 돌려 자신의 발에 모으며, 마악 관문을 향해 걸어오는

 두 남녀를 향해 다가갔다. 

 ※     ※     ※ 

 "도착했군요…."

 "그래요."

 시리아스는 이마에 내려온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살짝 쓸어 넘기며

 곁눈질로 헌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감도는 야릇한 미소,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마에 흘러내린 보라색 머리칼, 그리고…여전히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보라빛 눈동자….

 그때 헌의 손이 시리아스의 어깨에 닿았다. 

 "저길 봐요, 누나. 저기 지금 다가오고 있는 사람이 아마도 수문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 꺼에요."

 "굉장한 속도로군요…."

 시리아스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흰 수염을 날리며 자신의 자세를 유지한 채로

 자기들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노인이었다. 문득 헌이 질문을 던져왔다.

 "누나가 만약 실프(풍계의 하위정령)의 힘을 빌린다면 저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지지는 않을 거예요."

 시리아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슬며시 헌의 눈을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는 눈이다. 결국엔…또다시 되풀이 되는건가….

 시리아스는 고개를 뒤흔들어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어두운 조각을

 던져버리고는 앞서 나가는 헌을 뒤쫓아갔다.

 노인이 빨리 다가온 탓인지 헌과 노인은 거의 한발자국 정도 떨어져 서로를

 대하고 서있었다. 노인의 얼굴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내왔다.

 "해 뜨는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하네, 젊은이.

 그리고 그 쪽의 레드 엘프 아가씨도."

 시리아스는 헌 앞에 선 노인이 너무나도 정확히 자신의 소속 종족을 알아내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퀘타라스나 훼이블이면 몰라도, 쿠리안엔 엘프라던가 고블린 이라던가 오크,

 트롤 따위의 데미 휴먼(Demi Human)은 드물었다. 그래서 쿠리안에선 그들을

 통틀어 '마물'이란 호칭으로 불렀다. 숲의 고귀한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도,

 가장 추악한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고블린도, 쿠리안에선 다 같은 '마물'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자신의 소속 종족을 정확히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게다가 블러드 엘프라고 하지 않고 레드 엘프라고 불러주었던 것이다. 

 시리아스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 노인에게 답례를 했다.

 노인은 얼굴을 온통 훤하게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 나는 자네들이 들어온 관문, '마루'를 지키는 다루 마제건이라 하네.

 그런데 그쪽에 있는 아가씨, 최근에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소만?"

 그 말에 시리아스는 놀란 얼굴로 마제건을 쳐다보았고, 헌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제건의 말은 계속 되었다.

 "이제 보니 '인육'까지 섭취했군…. 꽤나 큰 수술을 한 것 같은데,

 유산이라도 한 건가?"

 헌의 눈썹이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이내 아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십시오."

 "남의 아픈 과거를 캐묻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일이네. 나도 좋아하지 않고….

 일단 아가씨는 근처 방으로 들여보내 쉬게 하는 것이 좋겠군."

 마제건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어느 집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잠시 후,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가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소녀는 일단 마제건에게 인사를 한 후, 헌과 시리아스에게도 고개를 숙여보였다.

 "해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다루 마제건 님의 심부름을 맡고 있는

 아사라고 해요."

 "아, 예…."

 생각보다 깍듯한 소녀의 인사에 시리아스는 당황하며 인사를 받았고,

 그런 시리아스의 소매를 잡아끌며, 아사는 그녀를 해동에 도피해온

 사람들을 위한 숙소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뒤에 남자 분은 나중에 오실 건가요?"

 "아, 헌 당신은…?"

 마악 걸어가려던 아사와 시리아스는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며 물었고,

 헌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전 여기서 이분과 더 얘기를 하다 갈께요. 누나 먼저 가있어요."

 "예…."

 시리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사를 따라갔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중,

 문득 아사가 말을 건네 왔다.

 "뒤에 남자 분은 당신의 애인인가요?"

 "에? 아, 아니 그런건…."

 뜻밖의 질문에 시리아스는 당황하여 더듬거렸으나 아사의 말을 계속 되었다.  

 "그래도 언니가 마음을 두고 있는 건 확실한 것 같네요. 그럼 짝사랑?"

 "아, 알아버렸네…."

 시리아스는 겉으로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해동의 사람들은 남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더니…허튼 소리가 아니었어.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아사의 말에 그녀는 더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만약 그렇다면 언니는 불행할거예요. 허무…완벽한 공허….

 저 사람 마음속엔 아무것도 없어요, 단지 그 빈 껍데기를 피냄새와 여자,

 그리고 냉소로 가리고 있을 뿐…. 저 사람, 언젠가 무너지고 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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