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18/65)

 #2.

 "이거 정말 지독하군…."

 "크으! 정말 그 녀석다운 짓이로군…."

 갈색 치안복 차림의 번문호와 연푸른색의 경장을 입은 곽우량는 나란히 서서,

 여기저기 그을린 토막난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곽우량은 이를 부드득

 갈며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시체를 바라보던 곽우량은 쓰러진 시체 중에 낯이 익은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쪽으로 다가갔다. 유일하게 불에 그을리지 않은 시체, 그것은 바로

 그가 신임하는 부하중 한사람인 문곡의 시체였다. 

 퍼억-! 곽우량의 발이 주변의 애꿎은 돌을 걷어찼다. 상처입은 짐승의 소리가

 그의 입에서 으르렁 거렸다.

 "이, 빌어먹을 망나니 녀석! 내가 무려 10만 금이나 주고 고용한 놈들을,

 게다가 내 신임하는 부하까지 죽여버려! 그것도 보란 듯이!

 이 육시랄 놈의 자식!!!"

 "진정하시오, 곽 소사."

 번문호는 살기 어린 곽우량의 표정에 질렸는지 뒤로 주춤 물러서며

 달래보려 했지만, 오히려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은 꼴만 되었다.

 "이게 어디 진정할 일이란 말이요, 번 청장! 자신이 잠시 머무른 마을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완전히 태워버린 녀석인데!! 왜 그 녀석이

 내 부하들은 이렇게 보란 듯이 시체를 흐트려 놓았겠소!"

 "글쎄, 그건 잘…."

 번문호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있어도 하질 못했을 것이다.

 곽우량은 거의 혼자서 떠들어 대고 있었기에.

 "바로 나! 곽우량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니겠냐 이 말이오! 그 녀석은 지금

 내가 그 녀석을 쫓아오고 있다는 걸 알고는 이렇게 날 놀리고 있는거란 말이오!"

 "아, 그, 그렇소?"

 곽우량은 한참을 그렇게 씩씩거리더니, 몸을 돌려 지도엔 분명히 나와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만물암'으로 향하였다. 번문호는 잠시 멍하게 서있다가

 뚱뚱한 몸을 부지런히 놀려 그를 따라 갔지만, 그러나 쉽게 곽우량의 큰 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곽우량이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 망나니 놈은 이곳 '만물암'에 머물렀었겠지.

 그러나 자신의 흔적을 남길 우려가 있으므로 이 마을을 완전히 없애버린거야….

 무서운 놈 같으니라고, 그 녀석 어쩌면 날보고 일부러 쫓아오게 만드는게 아닌지 

 몰라. 하지만 이번 해결사는 틀릴 것이다, 망나니 놈…."

 "확실히 당신 말을 들으니 다른 때보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때 놀랍게도 곽우량의 그림자 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나왔고,

 곽우량은 잠시 멈춰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힘을 주어 말했다.

 "시체는 나에게 끌고 와야하오, 쉐도우 엘프 키란…!"

 "그렇게 하지.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시길."

 뒤늦게 달려온 번문호는 곽우량이 잠시 멈춰 서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는 따라 잡을 수 있겠다 싶어 힘겹게 몸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 번문호의 얼굴을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는 바람이겠거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곽우량의 곁에 서게 된 번문호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허이고…후우…곽 소사…걸음이…허억…무척 빠르구료…."

 "으음, 확실히 빠르지요…. 빛도 잡을 수 없을 만큼…."

 "엥? 곽 소사가 언제 경공을 익혔단 말이요?"

 번문호는 곽우량의 느닷없는 말을 농담으로 알고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으나,

 곽우량의 머릿속은 온통 망나니에 대한 것으로 쏠려 있었다. 문득 그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많은 시체들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땅 속에 묻었다면 쉽게 발견될

 텐데…. 설마 먹어버린 걸 아닐테고."

 "엥? 곽 소사, 갈수록 농담이 심해지는구만!"

 곽우량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번문호는, 이 사람이 이렇게 농담을

 즐겨 했나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     ※     ※

 시리아스는 두려운 눈빛으로 아사를 바라보며 더듬거리는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무너지다니…."

 "그건…."

 아사는 잠시 검은 눈망울을 깜박 깜박 거리다가 이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좋은 냄새를 풍기는 과일들을 익숙한 솜씨로 깎아

 시리아스 앞에 가져다 놓았다. 

 "더이상 말 안할래요. 언니도 그걸 바라는 것 같고."

 시리아스는 순간 흠칫했다. 자신 앞에 앉아 과일을 권하고 있는 저 소녀,

 저 소녀의 자그마한 입에서 나올 그 말이 두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선도 수련을 하다 보면 '맘일굼'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죠. 저같은 경우는 단지 사람의 얼굴빛을 보고

 추측하는 것뿐이지만…."

 "아……아, 그렇군요…."

 시리아스의 눈이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어지럼을 느끼며 머리에

 손을 갖다대었다. 역시 해동…아침의 나라, 해동. 어떤 비밀도, 어떤 범죄도

 있을 수 없는 나라…. 시리아스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다

 곧 다시 주저앉아버렸다. 

 아사는 그런 시리아스를 맑은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손으로 노랗고 옆으로

 길쭉한 과일을 집어들더니 그것을 손으로 비틀어 즙을 내었다.

 이내 노란빛을 띈 맑은 즙이 아사의 손에 흠뻑 묻었고,

 아사는 그 손으로 시리아스의 얼굴을 매만져 주기 시작했다.

 "이 과일은 니더우드에서 들여온 것으로 '노랑어리'라고 하죠.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가라 앉혀주고, 그 즙은 산후에 얼굴이 부은

 부인들의 미용에 그만 이예요." 

 아사는 그렇게 시리아스의 얼굴을 매만져 주며 조용히 말해주었다.

 시리아스는 눈을 감고 그대로 아사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확실히…배려하는 방법도 다른 것 같아…. 그 사람도 이런 손길로

 날 만져주었는데….

 시리아스의 머릿속에 몇일전 지나갔던 그 기억이 빠르게 스쳐갔다. 

 자신이 오크들에 의해 유산되고 난 후, 헌이 가끔 구해오던 고깃덩이들.

 유난히 부드럽고 맛도 좋아, 여태까지 채식만 고집해왔던 시리아스에게

 육식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헌은 이상하게도 그 고기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걸 알면 자신을 죽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

 그리고 어느날, 몰래 헌의 뒤를 쫓아가서 발견한 것은…. 

 "우우욱…."

 "…진정하세요. 아무리 언니가 먹었다 하더라도 그건 언니에게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죠.

 이미 타버린 재를 가지고 짚신을 삼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사는 몸을 웅크리고 흐느껴 우는 시리아스를 조용히 달래주었다.

 그러나 여인의 울음은 좀처럼 잦아들 줄 몰랐다.

 그렇게 해동에서의 첫날도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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