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우 헌은 천천히 몸을 돌려 마제건이라 이름을 밝힌 늙은이를 쳐다보았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군요…. 내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도
그 블러드 엘프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흐음, 그 말만큼은 진심인 것 같군."
마제건은 피식 웃으며 헌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년은 사양하지 않고
그가 건네준 방석 위에 주저앉았다. 이내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차와
다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깍듯이 마제건과 헌에게 허리를 굽혀 보인 후,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물러갔다.
그걸 보고 있던 헌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마제건은 허허 웃으며
자신 앞에 놓여진 감잎차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네. 이곳 해동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무예를 가르쳐 주니까. 자네 보기엔 저런 일개 시녀들이 '걸음질',
아, 중원에선 '경공'이라고 하지? 하여간, 그걸 시전하는 게 놀랍겠지만 말야."
"솔직히 그렇군요. 그리고 이 방에 걸려 있는 그림들도 그렇고."
헌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빛을 나타내며, 자기 눈앞에 걸려있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웃통을 벗어던지고 한 다리로 서서 두팔을 벌리고 있는 것이
금강역사같아 보였다. 헌의 입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런 그림에서도 '태권무'의 기세가 느껴지니 말입니다. 영감님의 말마따나
이곳에서는 어디서나 무술을 접할 수 있군요."
"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저 그림일 뿐이지. 자네가 다른 사람과
별반 차이도 없었다면 난 자네를 내가 거처하는 방까지 오게 하지도 않았어.
그냥 근처 여관에서 식사나 한끼 시켜주고 헤어졌겠지."
마제건이 천천히 차를 음미하는 것을 보며, 헌도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약간 연갈색을 띄는 소박한 찻잔, 그러나 마치 살아있는 것 마냥
매끄러운 살결….
"확실히 도자기의 종주국으로 불릴만한 나라로군요."
헌은 찻잔속을 들여다보았다. 연푸른색의 액체가 약한 김을 내며
출렁거리고 있었다. 은은한 풀잎냄새가 코 속까지 배어왔다.
"기린초로 달인 차라네. 무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차지."
"역시 해동답군요. 이런 사소한 것까지 배려를 하다니…."
헌은 약간 어색하게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원래 예법에 어긋난 무식한
짓이라 할 수 있으나, 마제건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귀한 '기린차'를
물 마시듯 마셔버리고 입가를 쓱 닦아내는 소년을 보며, 마제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생각해본 적 없나? 자네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서.
처음 자네를 보았을 때, 솔직히 난 놀랐네. 자네 정도의 나이에 그렇게 까지
마음을 비울 수 있다는, 아니, 비워졌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겠지.
여하간 그렇게 공허해진 마음은 처음이었네."
마제건은 천천히 자신의 '감잎차'를 음미하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원한다면야 무술쯤은 얼마든지 가르쳐 줄 수 있네.
치우천왕가의 비전도 자네라면 문제없이 익히겠지.
하지만…자네가 진정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다면,
자네가 아무리 센 무술을 익히더라도, 아무리 큰 앎을 얻는다 하더라도,
자네는 결국 무너지고 말걸세."
※ ※ ※
해동으로 들어오는 여덟 관문 중 하나인 '메수리'.
바로 십여리 가량 떨어져 있는 '마루'와는 다르게,
험하디 험한 '백두대간'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통해 들어오는 암살자들이 특히 많았고, 경비 또한 삼엄했다.
이곳을 지키는 '다루' 한산. 올해 나이 마흔 줄에 들어서는 그는,
요새 들어 부쩍 자신의 그림자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자신의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림자 도깨비(퀘타라스나 훼이블에서는 어둠의 정령으로 알려진
쉐이드. 작가주)가 달라붙은 것 같은데…. 헛것(유령을 말함. 작가주)은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슨 이유지?"
한산은 자신의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보며 천천히 쉼터(일종의 술집. 작가주)
'나그네' 에 들어섰다. 기이한 것은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들도 마찬가지 란 것이다.
'나그네'의 문을 열자 떠들썩한 분위기가 그를 휘감았다.
주인되는 '아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를 불렀다.
"야아, 이거 다루 님 아니시오! 어서 이쪽으로 오슈.
석달 만에 온 것을 기념하여 내가 한잔 사리다!"
"훗, 그러다 나 때문에 장사 망치는 거 아뇨, 아무?"
한산은 멋적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젊었을 적에 그는 상당한 술고래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의 아내, '시내'를 얻고 나서 100일에 한잔 이하로 줄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전 까지는 '나그네'의 단골이었던 그가 이곳에 올 때마다
아무는 똑같은 소리를 하며 술한잔을 샀던 것이다.
아무는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솟아있는 팔로, 한산이 즐겨 마시는 '쇠주'를
잔이 넘치도록 부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앞으로 몸을 숙여 낮은
어조로 말했다.
"요새 '그림자' 때문에 병사들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얘기 들었수다."
"뭔가 집히는 것이 있나보지요, 아무?"
한산도 정색을 하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한때는 훼이블의 마궁-그곳에서는
'던전' 이라고 불리는-을 격파하고 다니며 모험가로써의 명성을 떨치던
아무였다. 지금도 훼이블과 니더우드의 정세는 그의 동료들에 의해 아무에게
전달되고 있다.
한산은 아무의 입을 주시했다. 그는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다가
천장에 매달린 등을 밝혀 환하게 한 뒤, 그림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쉐도우 엘프 하나가 침입한 것 같소."
※ ※ ※
헌은 조용히 팔베개를 하고서 천장을 보고 누워, 자신의 가슴에 매달려
잠들어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엘프를 쓰다듬어 보았다.
문득 몇일 전 있었던 그 날이 생각났다.
그래, 그때도 이랬어. 물론 일부러 날 쫓아오게 만들었긴 하지만,
그 상황에서 바로 나에게 안겨들 줄은….
헌은 잠시 자신의 기억을 돌려보았다. 자신이 지 않게 잘 갈무리 해둔,
링 메이의 언니 링 메슈의 시체, 그리고 갈라진 불룩한 배, 그 안에 반쯤
남아있던 태아….
시리아스는 그 광경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주먹을 세게 쥐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야영지로 돌아오자 마자 자신의 뺨을 갈겼다.
"어떡하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식인을 할 수 있는거죠?!"
절규하듯이 쥐어짜는 목소리. 헌은 계획했던 대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난 단지 당신의 몸을 낫게 해주려고 그런 것뿐이에요!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데 가장 좋은 약은 사람의 살이니까…."
"그런거 몰라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링 메이의 언니였죠?
그것도… 8개월이나 된 아이를…."
생각했던 것보다 더 흥분하는군….
"누나는 몰라요, 난 망나니니까 알아…. 귀족들이 공공연히 식인을 한다는 걸
난 알아요…. 사람 고기가 어디서 나오는 지도 알고 있고, 부위별로,
그리고 사람별로 값이 다르다는 것도 알아!"
"그…그만!"
시리아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여태까지 내가 망나니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건가. 뭐 좋아, 이번 기회에 완전히 내게 얽매어 버리는 쪽이….
"노인의 고기가 제일 싸고, 처녀나 첫아이를 밴 상태의 여인의 살코기가
제일 비싸다는 걸, 그리고 태에 들어있는 상태의 아이 고기는 인태라 해서
고급 약재로 쓰인다는 걸! 그게 누나의 몸을 회복시키는데 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만해요! 제발 그만!"
헌은 고개를 들어 폐부에서 쥐어짜낸 기를 담아 소리쳤다. 마무리군….
"그리고…그 모든 것들이 내가 죽인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도 난 알고 있어!
그래, 단지 귀족들의 식도락을 위해 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누나는 날 경멸하겠지! 왜 이미 죽은 사람을
편히 쉬게 하지 못하고 그 시체까지 파먹느냐고…. 비록 내가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난…."
"그만해요…."
선우 헌은 잠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귀를 막으며 몸부림치던
시리아스가 갑자기 눈물 젖은 얼굴로 자신의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소년의 보라색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시리아스는 조용히,
그러나 슬프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심한 곳에서 여태까지 견뎌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당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어요….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요…."
소년의 눈이 놀람으로 갑자기 커졌다. 금새 아무 감정도 없는 눈에 눈물이
돌기 시작했다.
"나…난…."
"됐어요, 말하지 마요…."
"난 용서받을 수 없어요….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죠?
난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져 버렸어…. 이런 종류의 일에 한번 젖어 버리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어…."
"그만해둬요…."
시리아스는 그때까지 끌어안고 있던 소년의 몸을 잠시 자신에게서 떼어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년의 입에 입맞춤했다. 소년은 잠시 멍한 눈동자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리아스의 대담한 손길에 자신을 맡겨버렸다.
자시가 지나고 축시로 넘어갈 무렵, 모닥불 가에 엉켜서 누워있던 두 인영 중
하나가 일어났다. 약간 키가 작은 그림자, 선우 헌이었다.
소년은 거의 꺼져가던 모닥불에 잔가지를 던져 넣어 불을 살린 후,
보라색 눈동자에 불빛을 담은채 곤히 잠들어 있는 시리아스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예의 무미건조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왜 이 블러드 엘프가 남자에게서 차였는지 알만하군…. 완전히 초보야….
뭐 다음부턴 내가 주도해 나갈 수 있겠지만."
그리고 소년은 잠시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그 무심한 눈동자로 시리아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용서…비슷한 아픔…. 흐음, 예전에 이미 내가 버린 것들이지….
도대체 이 블러드 엘프는 자신도 마물인 주제에 감히 '나'를 이해하려
든단 말이야…."
소년, 선우 헌은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어 자신의 눈가에 발랐다.
그리고 몇번 눈을 깜빡거리자 이내 그의 눈에선 아까 시리아스에게 안겼을 때
흘렸던 것 같은 맑은 눈물, 아니 액체가 흘러나왔다. 잠시 그 상태로 앉아있던
소년은 다시 나뭇가지를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헌은 잠깐 몸을 움직여 보았다. 시리아스는 약간
몸을 꿈틀거렸을뿐, 여전히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헌은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희미하게나마 감정이 섞인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